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193화 (194/200)

117장: 의미심장한 고요

“라투이드 군 본대는 어디쯤이지?”

“현재 로보드 영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합니다.”

아이단 황제가 동맹군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다소 머뭇거리는 모습을 내비치는 카일 이반이었다.

“역시나 본대는 뒤로 빼놓으려고 갖은 발악을 다 하는군. 네 왕국 모두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아주 똑같이.”

“……송구합니다, 폐하.”

제국의 동맹국들은 결국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슈라우드가 황도 앞에 진을 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동맹국 군대는 단 한 곳도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못 했다기보다는 안 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어떻게든 도착을 미루기 위해 늑장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장 황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슈라우드에게 눈부신 속도로 길을 내준 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책임이었다.

제국군이 그리 연전연패를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질 때 지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만 끌었더라면 동맹국들의 늑장은 먹히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제국은 슈라우드를 조금도 저지하지 못했고,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남을 탓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이다.

“즈리가 후작은?”

“내일 중으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럼 일단 마스터 급은 전부 합류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에 황제는 타협했다.

각국의 본대에 대해서는 그들이 언제 오든 신경 끄기로 했다.

대신 네 왕국에 대놓고 요구했다.

우선 마스터 급 실력자들부터 황도로 보내라고.

그러면 본대가 늑장을 부리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약점 잡힌 국왕들이 이것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또, 마스터쯤 되면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패배 시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대폭 감소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별말 없이 황도로 실력자들을 보내온 네 왕국이었다.

“어쨌든 조건은 갖춰졌군.”

제국 입장에서도 차선 정도는 됐다.

어차피 제국과 슈라우드의 전쟁에 있어 본질은 병력 양에 있지 않았다.

당장만 해도 제국군이 슈라우드 군보다 족히 다섯 배는 많았다.

그럼에도 슈라우드 군의 화력과 돌파력에 압도당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양 좀 늘어난다고 해 봤자 크게 달라질 바 없는 것이다.

핵심은 질이었다.

그것도 애매한 익스퍼트 급이 아닌 최상위 마스터 급의 질.

제국의 승리로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이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온 원인은 명백했다.

라이오넬과 그의 측근들.

이들을 막지 못해 여기까지 온 것이고, 지금이라도 다시 뒤집기 위해서는 이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게 아니고는 사실상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질이 중요했다.

마스터를 최대한 확보하여 이들을 찍어 누르는 것만이 답이었다.

“한데, 정말 드라이슬러 공작이 따를런지요?”

“따르지 않으면?”

“본인보다 낮은 경지의 상대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명예나 체면을 생각하면…….”

“그따위 것들을 따질 요량이었다면 애당초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지 말았어야지. 국경으로도 모자라 여기 황도 앞까지 허용한 이상 공작에게는 더 떨어질 명예도 없어.”

제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무기는 누가 뭐라 해도 가이덴이었다.

라이오넬과 그 측근들?

모두의 예상과 기대대로라면 사실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어차피 가이덴이 나서면 깨끗이 쓸려 나갈 것들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이 예상과 기대, 믿음은 철저히 배신당했다.

가이덴은 전부를 쓸어버리기는커녕 라이오넬 하나에도 쩔쩔매고 있었다.

비록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나, 그뿐이었다.

그 우위를 가지고 라이오넬을 처리하지도, 슈라우드의 진격을 막지도 못했다.

심지어 제대로 시간도 끌지 못한 채 길만 내주고 말았다.

황제로서는 실망을 넘어 배신감마저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공작에게는 이미 철저히 내 식대로 가겠노라 인지시켜 뒀다. 당연히 그 역시 두말없이 받아들였고.”

하여 황제는 분명히 말해 두었다.

가이덴이 실패한 이상 그의 식대로 갈 것이며, 토 달지 말고 따르라고.

그리고 가이덴은 이를 받아들였다.

지난 실라티 평원 전투에서 보인 행동이 그 방증이었다.

그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본인보다 몇 수는 낮은 상대의 등을 공격했다.

그것도 비열한 암습의 형태로.

물론 일국의 운명을 걸고 펼쳐지는 전쟁이었다.

이런 상황에 비열함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지도 몰랐다.

하나, 가이덴은 달랐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상황 자체를 압도하는 초월자요 절대자였다.

그런 그가 상황에 순응하고 비열함을 묵인했다.

아니, 묵인을 넘어 본인이 주체가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가이덴은 더 이상 초월자도 절대자도 아니었다.

이제 그 역시 하나의 체스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퀸 정도는 되는, 그러나 승리를 위해 어떤 식으로든 활용될 수 있는 체스 말.

따라서 어떤 명령이 내려지든 가이덴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설령 전보다 더한 비열함을 동반하는 명령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국운이라는 명분이 걸린 이상 무조건.

“놈은?”

“아직 특별한 반응은 없습니다. 고요하게 전투 준비에만 몰두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놈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현재 제국이 겪는 모든 비극의 원흉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놈뿐이었으니까.

“좋아, 이번에야말로 놈을 찢어 버린다.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도록 갈기갈기.”

그를 언급하는 황제의 눈빛은 섬뜩했다.

마치 혈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제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에 대한 극도의 광기와 원한.

그런 것들이 황제의 눈을 통해 여과 없이 폭사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오직 한 사람, 검은 악마라 불리는 제국의 재앙, 라이오넬 라인하트를 향해.

* * *

“으음…….”

한창 슈라우드 군 진영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다이너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그러게 그냥 좀 쉬시라니까, 거 높으신 양반이 괜히 똥고집은.”

그러자 옆에서 보좌 중이던 레몬드가 그를 타박해 왔다.

“얼씨구? 쉬면 또 지만 일 시킨다고 궁시렁궁시렁 댈 놈이 말은. 쯧, 하여간에 입만 살았어, 입만.”

“에헤이, 제가 궁시렁대면 또 얼마나 궁시렁댄다고 그러십니까?”

“그럼, 아니라고? 다른 놈도 아니고 레몬드 네가?”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몬드였다.

라인하트 영지에서부터 다이너와 근 30년을 함께해 온 바로 그 수다쟁이 레몬드.

어떤 상황에서든 그의 입이 쉴 리 없다는 것쯤, 다이너가 모를 리 만무했다.

비단 다이너만이 아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일 터였다.

심지어 레몬드 본인조차도.

“흠흠, 그렇긴 해도 제가 틀린 얘기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궁시렁대는 걸로 몰아가시는 건 좀…….”

피식.

“그래서 맨날 그렇게 군단장님 앞에 대가리를 박으시는구나~ 우리 레몬드 천인장께서는.”

“험험.”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는데, 자꾸 정신 사납게 할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일이나 해, 일이나.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다이너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홰홰 내저었다.

그럼에도 레몬드는 물러나지 않았다.

라이오넬의 구박 앞에서도 끝까지 입을 쉬지 않는 그였다.

고작 이 정도로 물러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사돈 남 말 하시는 것도 아니고,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드는 분이 누군데 그러십니까? 말 좀 그만 돌리시고, 그래서 괜찮으시냐고요?”

더구나 오늘은 레몬드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신음에서 알 수 있듯 다이너는 현재 몸이 성치 못했다.

“괜찮아.”

“괜찮기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이나 닦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좀 누워 계셔도 누가 뭐라고 안 합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 상대하다가 다치신 걸 가지고 감히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런 개잡놈이 있으면 제가 묵사발을 내 버릴라니까, 제발 가서 좀 쉬세요.”

지난 실라티 평원 전투의 여파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다이너는 전투 종료 직전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

그것도 무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기습이었다.

아무리 다이너가 소드마스터에 정령력까지 지니고 있다 한들, 이를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 적잖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너야말로 제발 그 입 좀 다물면 안 될까, 레몬드? 내가 무슨 그랜드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다 다쳐? 군단장님이 다 막아 주시고 남은 것도 해소 못 해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구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격을 피했다는 점이었다.

떨어져 내리는 힘의 대부분을 라이오넬이 해소해 주었다.

비록 충격파로 인한 내상까지 피하지는 못했으나, 생명의 위기를 넘긴 것만으로도 일단은 감지덕지했다.

기습에 대한 대비 자체가 전무했고, 사실상 죽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라이오넬 덕에 간신히 목숨을 구한 것이다.

“군단장님이야 애초에 논외죠. 괜히 심심풀이로 저 괴롭히실 때만 아니면 같은 인간인지도 헷갈리는 분인데. 부군단장님은 당당하게 어깨 피셔도 됩니다. 군단장님 오른팔인 저 레몬드가 보증해요.”

“얼씨구.”

절레절레.

다이너가 끝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어차피 말로 한다고 들어먹을 레몬드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라이오넬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얼차려를 받지도 않았을 터.

차라리 포기하고 화제를 돌리는 편이 나았다.

“……어쨌든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 그리고 몸을 풀려면 돌아다니기도 해야 돼.”

“그 몸을 하고 바로 전투에 나서시려고요?”

“그럼, 안 나가? 저쪽이 치사하게 동맹국 마스터들까지 불러들였다는데, 여기서 내가 쉬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하고?”

이틀 전, 레나가 다급한 정보를 전해 왔다.

그리고 그 정보란 슈라우드 쪽에 심히 좋지 못한 것이었다.

라투이드, 크레이드, 말라, 하이센다크 왕국의 소드마스터가 제국군 본대에 합류했다는 정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 제국군 본대에 있는 마스터 숫자는 무려 11명.

황제 호위로 빠진 실력자까지 포함 시키면 12명이나 됐다.

다해서 8명밖에 안 되는 슈라우드로서는 감당 불가한 숫자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 다이너까지 빠진다?

그러면 정말 답도 없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라도 일단 나서야 했다.

그리하여 최소한 마스터 급 하나 정도는 묶어 줘야 했다.

사실 이마저도 최소한이라고 봐야 하고 말이다.

“그래도 될 겁니다. 아니, 그러셔도 됩니다.”

그럼에도 레몬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지가 워낙 가벼워서 그렇지 레몬드 역시 유명한 영웅이었다.

왕국 전체의 선망을 받는 그리핀 군단, 이 그리핀 군단을 이끄는 두 명의 천인대장 중 하나인 것이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만 제외한다면 군을 넘어 왕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따라서 군의 주요 정보는 그에게 역시 전달되었다.

마스터의 합류 사실 또한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평온을 가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레몬드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다이너가 쉬어도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말투와 그늘 한 점 없는 그의 얼굴이 이를 방증했다.

“군단장님께서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우리 군단장님이 그리 말씀하신 거면 무조건이죠. 전 걱정 안 합니다, 쥐똥만큼도요. 여태 그래 온 것처럼 제국이고 동맹이고 싹 다 쓸어버리실 테니까.”

라이오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그간 모든 고난과 역경을 보란 듯 쳐부숴 온 그라면, 그런 라이오넬의 장담이라면 어떠한 문제도 없으리라는 절대적인 믿음.

“하긴.”

그리고 이는 꼭 레몬드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라이오넬의 사람이라면, 나아가 슈라우드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었다.

“그 양반이라면.”

라이오넬이라면 해 줄 것이다.

그가 우리를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라면, 라이오넬이라면 반드시.

“그렇다니까요. 부군단장님은 그냥 마음 푹 놓고 좀 쉬고 계십쇼. 제가 군단장님 따라가서 그 X 같은 황제 놈 모가지 뚝 분질러 가지고 오겠습니다.”

레몬드의 호언장담에 결국 다이너도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바라보았다.

지난 전투 이후 의미심장한 고요에 잠겨 있는 라이오넬의 막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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