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장: 왕자의 현재
로만 제국 황도 내 한 저택.
사실 저택이라고 부르기도 다소 모자란 애매한 크기의 집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제국 하급 귀족들의 숙소 느낌이랄까?
실제로 이 집 주변 거주자의 구성비 역시 귀족과 평민이 반씩 섞여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곳, 사실 허름하다 치부해도 할 말 없는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왕자님, 다녀왔습니다.”
“오오, 후작.”
“아버님.”
슈라우드 왕국의 1왕자 크리스토퍼와 그의 외삼촌인 나로움 후작, 그리고 후작의 아들인 클리앙까지, 일국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인물들이었다.
아니, 장식했었던 인물들이라는 표현이 옳았다.
지금은 그 처지가 보이는 바와 같았으니까.
나름 일국의 왕자이고 변경의 주인을 자처하던 이들이었다.
한데, 그런 이들이 이런 허름한 곳에 처박혀 쥐 죽은 듯 지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제대로 된 생활 지원조차 받지 못한 채로 말이다.
슈라우드에서 떨쳤던 이들의 위세를 생각하면 정말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가신 일은요? 메리아나 남작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아직도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더군요.”
“아니,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하라는 겁니까! 대체 언제까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없이 저어지는 후작의 고개처럼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했다.
스스로의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필요성까지, 무엇하나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개인적인 능력이랄 것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클리앙이 머리를 조금 쓴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아카데미에서나 통하던 수준에 불과했다.
혈통을 제외하고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혈통이 이들의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의 슈라우드 1왕자라는 혈통이 이들에게 정치적 필요성을 부여해 준 덕분이었다.
제국은 이 혈통을 명분으로 슈라우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
슈라우드에 대한 침략 역시 이 명분을 기반으로 행해진 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전쟁의 발발까지였다.
그 이후로는 급속하게 효력을 잃고 말았다.
특히 라이오넬이 제국군을 박살 내며 전쟁이 장기화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제국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되며 더는 명분이 필요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제 제국이 망하든 슈라우드가 망하든 무조건 둘 중 하나였다.
이 둘 이외의 결론은 도출이 불가했다.
“후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기다려 보는 수밖에요.”
자연스레 1왕자의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찬밥 신세였고 말이다.
담당이랍시고 제국이 배정해 준 메리아나 남작이라는 자는 기본적인 보급조차 빼먹기 일쑤였다.
사실 처음부터 배정조차 안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최근 담당자의 극히 불량한 태도로 봐서는 그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했다.
“그놈의 기다리라는 소리, 지겹지도 않습니까! 난 아주 지겨워 죽겠단 말입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고요!!”
“…….”
“으아아아!!!”
그럼에도 대안이 없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급 귀족의 멸시와 모욕을 묵인하고 이로 인한 크리스토퍼의 지랄발광도 견뎌 내면서.
“으아아아아!! 제기랄! X 같은!! 이런 X발!! 으아아아아!!”
한 번 시작된 크리스토퍼의 발광은 쉬이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5분가량을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고는 끝내 목이 쉬어 버리고 나서야 다소 수그러들었다.
“그보다 아버님, 전쟁은요?”
이 틈을 타 클리앙이 입을 열었다.
사실 진짜 중요한 부분은 이것이었다.
슈라우드와 제국의 전쟁.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세 사람의 운명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승전보는 들어왔습니까?”
물론 이긴다 해도 제국이 크리스토퍼를 국왕으로 추대시켜 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입은 손해가 너무나도 막심했다.
다만, 아예 모른 척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컸다.
제국의 체면도 있으니만큼 어디 지방 영지 정도는 기대해 볼 만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결말이 됐든, 이들에게는 일단 제국의 승리가 필수적이었다.
절레절레.
그러나 이런 클리앙의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후작의 고개는 이번에도 힘없이 저어지는 중이었다.
“아니, 대체……? 이번 공방전에는 분명 병력을 되는대로 전부 끌어모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런데 어떻게요? 아무리 라이오넬 그놈이 미쳐 날뛴다 해도 제국에는 드라이슬러 공작이 있는데, 어떻게 본토에서까지 이리 무기력하게 깨져 나간다는 겁니까?”
“무기력하게 깨져 나간 건 아니라고 한다. 단지, 무리하지 않기 위해 브라차 백작성을 내주고 전선을 뒤로 물렸다고 하는구나.”
“그게 사실상 그 말이지 않습니까…….”
로만 제국 중부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브라차 백작성이었다.
이 성을 내준다는 것은 사실상 슈라우드의 중부 진출을 허용해 준다는 의미.
하여 제국은 병력을 끌어모아 슈라우드군을 정면으로 막아섰다.
왕자와 나로움 부자가 마지막으로 얻었던 정보는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오늘 후작이 들고 온 최신 소식에 따르면 제국은 이곳마저 내주고 말았다.
막심한 병력 손해를 입은 것은 아니라 하나, 이 자체만으로도 큰 타격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정말 황도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도가 라이오넬의 손에 넘어가는 그 날, 세 사람은 정말 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최악의 불상사인 것이다.
“정말 떠도는 소문대로 라이오넬 그놈이 드라이슬러 공작보다 강해진 거 아닐까요? 그게 아니고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정보 길드의 말에 따르면 확실히 그건 아닌 듯하다. 계속 밀어붙이는 쪽은 공작인 것이 분명해. 다만, 그게 놈을 뚫을 정도가 못 될 뿐이지.”
“그럼 여전히 그 주변 잡종들에게 맥을 못 추고 있다는 겁니까? 어디 일개 왕국도 아니고 무려 제국이?”
“…….”
문제는 아무래도 이 불상사가 실제로 일어날 듯하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의 흐름대로라면 분명 그러했다.
그리고 이 흐름에는 라이오넬도 라이오넬이지만 그 주변에 있는 조력자들의 영향도 지대했다.
일명 라이오넬의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클리앙이 잡종이라 칭한 엘프와 드워프가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했다.
하이엘프 아인한드라가 부리는 폭풍부터 엘프 일족의 차원이 다른 활 솜씨, 공성용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드워프의 철포까지, 라이오넬을 돕는 이종족의 힘이 전장을 찢어 ㄴ버리는 중이었다.
그나마 이것들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법이었다.
고서클의 범위 마법으로 일대를 통제해 버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제국에게는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슈라우드의 대마법사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달렸기 때문이다.
이제 제국에 남은 6서클 대마법사라 봐야 달랑 한 명뿐.
마법 전력을 온전히 집중시킨다 해도 균형 유지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다른 데 쏟을 여력 같은 것은 지니고 있지 못했다.
“동맹국들은요? 네 왕국 전부 출정식을 마친 지 좀 되지 않았습니까?”
“각자 국경은 넘었다고 하더구나.”
“놈이 황도에 도달하기 전에 합류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되면 제국이 믿을 구석이라고는 동맹국들의 합류뿐이었다.
이제는 속도 싸움에 돌입한 셈이다.
어느 쪽이 먼저 황도에 도달하느냐의 치열한 속도 싸움.
“글쎄다, 그건 뭐라 확답을 듣지 못해서.”
하나, 싸움의 향방에 대해서는 예측이 불가했다.
이들이 획득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나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정보 길드에 돈을 내고 얻어 오는 정보가 다였다.
심지어 그마저도 지극히 피상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내밀한 정보를 얻어 오기에는 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얻어 온 정보라는 게 고작 그딴 쓰레기 같은 것들뿐인 겁니까? 안 된다, 불확실하다, 모른다 따위만 반복하는?”
그때 왕자가 다시 개입했다.
있는 대로 찌푸려진 얼굴, 꼬일 대로 잔뜩 꼬인 목소리와 함께.
“왕자님, 그건…….”
“후작은 대체 밖에서 하는 일이 뭡니까? 그딴 쓰레기들이나 주워 올 거면 차라리 돈이라도 쓰지 말든지. 돈은 돈대로 쓰면서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고, 대체 이게 뭐냐 이 말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내 말이 틀렸어? 틀렸냐고? 지금 내가 왜 이 꼴을 하고 있는데! 후작이 밖에 나가서 쓸데없이 버리고 온 돈만 아니었어도 이 거지 같은 꼴은 면했을 거 아니야!”
틀렸다.
사실이 아니었다.
정보 구입에 돈을 쓰지 않았다면 조금 덜 쪼들리기는 했겠으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어차피 크리스토퍼의 씀씀이로 미루어 계산해 보면 하루 이틀 차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돈에 대한 개념 자체가 거세 된 크리스토퍼였다.
본인의 생활과 품위 유지에 얼마나 많은 돈이 깨지는지 따위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저 생떼를 부릴 뿐이었다.
왜 이 거지 같은 상황에 고귀한 왕족인 자신을 방치해 두느냐고.
빨리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으아아아!! X발, 개 X 같은!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냐고!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X발!!”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상황을 한층 더 거지같이 만드는 크리스토퍼의 지랄발광이.
“으아아아아아아!!!”
“…….”
그리고 이를 다시 바라만 보는 나로움 부자였다.
미처 숨기지 못한 채 얼굴 위로 조금씩 짙어져 가는 짜증과 함께.
* * *
로만 제국 중부에 위치한 실라티 평원.
제국 중부의 곡창지대로 불리던 이곳은 현재 평소의 용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동시에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들이기도 했다.
밀이나 수확하는 평원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쿠우우우우~!
우선 한복판을 휘젓는 거대한 폭풍부터가 그러했다.
평소 바람도 잘 불지 않는 이곳에 자연재해 급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는 것부터가 현실성이 떨어졌다.
콰광! 콰광!
구우우우웅!!
지축을 울리는 포탄 소리와 대기를 진동시키는 마력의 떨림도 마찬가지였다.
실라티 평원은 100년 넘게 이렇다 할 사건·사고 한번 없이 경작지로만 활용돼 온 곳이다.
지극히 정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이곳에 포탄의 소음과 마력의 대규모 진동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동적인 것을 넘어 지나치게 파괴적이었다.
“겁쟁이 로만 놈들이 또 슬슬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망설이지 말고 밀어붙여! 어차피 또 꽁무니나 내뺄 놈들이야!”
푸슉! 촤륵! 콰가각! 서걱!
“컥! 안 돼…….”
“사, 살려…… 크헥!”
“밀리지 마라! 밀리거나 물러나는 놈은 내 손으로 직접…… 커헉!!”
또, 한없이 잔혹했다.
사람의 살이 베이고 피가 튀며 뼈가 꺾였다.
이곳이 로만 내부, 그것도 국경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중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 되지 않는 광경인 것이다.
“어이쿠~ 이거 로만 샌님들이 웬일로 저항을 다 하시고.”
“그리핀 군단!”
“거, 적당히 하고 평소처럼 줄행랑이나 치지? 괜히 버티다 개죽음당하지 말고. 이렇게~”
“아, 안…… 크아악!!”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었다.
언제나 평화롭던 실라티 평원에는 지금 대학살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심지어 소수가 다수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비상식적인 대학살극이.
사아아아아~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은 하나였다.
장소와 동떨어진 광경부터 비상식적인 대학살극까지, 모두 하나의 힘 아래 뭉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전장을 지배하는 거대한 어둠.
실라티 평원에 짙게 깔린 무저갱의 어둠이 이 모든 것을 조율하고 있었다.
“으음…….”
가이덴이 이런 어둠의 암약을 일별했다.
그러고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컨디션이 안 좋은 겁니까? 오늘은 다소 소극적인 듯한데.”
“그런가?”
“그렇죠. 평소의 당신이라면 지금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을 테니까.”
이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아는, 지금껏 수만 번도 더 검을 맞대온 가이덴은 이렇지 않았다.
보다 더 날카롭고, 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오늘처럼 애매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뭐랄까, 왠지 모르게 산만하다고 해야 할까?
나와의 대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전보다 버티기가 조금 수월해졌다는 것일 뿐, 나는 여전히 방어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다소간의 산만함이 더해졌다 해도 가이덴은 여전히 가이덴인 것이다.
그의 일검 일검은 오늘도 역시 치명적이었다.
“그랬나……. 어쨌든 전세도 이미 넘어간 듯하군. 이쯤 하지.”
지이이이잉!!
“……?”
단지 어딘가 이상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딱히 뭐 해본 것도 없이 대결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그였다.
그렇게 가이덴이 검 위로 막대한 양의 오러를 집중시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