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장: 선을 넘어
“오늘 우리는 선을 넘었다.”
모두를 바라보며 라이오넬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자체는 분명 높거나 크지 않았다.
중저음의 음역과 더불어 가볍게 대화하는 수준의 작은 목소리에 불과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선이었다. 제국과 왕국을 가르는 일종의 기준과도 같은 그런 선.”
그럼에도 이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애초에 라이오넬의 목소리에는 수만 병력의 이목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이는 그를 따르는 모두가 인정하고 보증하는 부분이었다.
또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집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설사 라이오넬이 모기 같은 목소리를 낸다 해도 모두가 그만을 바라볼 터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보낼 터였다.
지금 라이오넬을 비롯한 4만의 슈라우드 군이 서 있는 장소 때문이었다.
나아가 이것이 지니는 의미 때문이었다.
“또, 우리의 무의식 속에 트라우마처럼 박혀 있는 선이기도 했다. 제국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니 절대 넘지 말아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넘어서는 안 된다고.”
현재 라이오넬과 4만 병력의 눈에 보이는 한 요새.
크리아드나 요새라 불리는 저곳은 로만 제국의 서부 국경선이었다.
즉, 슈라우드의 동부 국경과 맞닿는 지점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경계선이자 트라우마를 넘어섰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서 있다.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랬다.
라이오넬과 4만 슈라우드 군은 지금 국경을 넘어 제국의 땅을 밟고 서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것이 평화적 목적일 리 만무했다.
지극히 불순하고 파괴적인 목적에 기인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자근자근 지르밟아 줄 예정이었다.
그리고 철저히 유린할 계획이었다.
저들이 슈라우드에게 그러한 것처럼, 단 그보다 더 큰 치욕과 치명타를 안겨 주는 방식으로.
“우리는 오늘 크리아드나 요새 역시 넘어선다. 그리고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오직 저들의 심장부를 향해.”
척! 척! 척!
“그리하여 점령한다, 저들의 황궁을. 무릎 꿇린다, 저들의 주인을.”
척! 척! 척! 척!
모두가 일제히 발을 굴렀다.
그럼으로써 표출했다.
황제와 제국에 대한 활화산 같은 분노를, 복수에 대한 4만의 끓어오르는 의지와 열망을.
“가자, 황제에게.”
이에 라이오넬이 화답했다.
제국을 향한 진격의 명령으로.
“전군, 돌격!”
“돌격하라!”
“우오오오!!”
그렇게 시작되었다.
슈라우드 역사에 전례 없던 제국을 향한 대침공이.
철컥! 철컥! 철컥!
“발포!”
콰릉! 콰릉! 콰릉!
그 스타트는 매캐한 화연이 끊었다.
4만 병력 사이사이를 가득 메우는 화연이었다.
드워프가 심혈을 기울여 개량한 공성용 특제 철포의 화연.
쿠과과과광!!!
이것이 크리아드나 요새 성벽에 도달했다.
화연을 지나 화염지옥의 형태로서 말이다.
특제 철포의 화력 앞에 영원히 굳건할 것만 같았던 성벽이 움푹움푹 파여 나갔다.
성벽에 새겨진 마법진조차 이 막강한 화력 앞에서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파여 나가는 성벽과 함께 그대로 지워질 뿐이었다.
철컥! 철컥! 철컥!
콰릉! 콰릉! 콰릉!
당연히 단발로 끝날 리 없었다.
슈라우드의 돌격이 성벽에 닿기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남은 상황.
이 거리만큼 드워프들의 포격은 계속될 예정이었다.
쿠과과과광!!
그리고 제국군은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물론 제국에게 드워프 철포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 경험만 따지고 보면 오히려 질릴 정도로 많았다.
슈라우드와의 전쟁이 본격화된 이래 매일같이 이것에 얻어맞아 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오늘의 철포에 있었다.
지금 드워프들이 성벽을 향해 신나게 쏴 재끼는 이 철포, 달랐다.
순수한 위력 면에서 여태까지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과거의 철포가 갑옷을 뚫거나 바스러뜨리는 정도였다면, 현재의 철포는 성벽을 뭉개 버리는 수준이었다.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 크기 또한 철포보다는 철대포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고 말이다.
특히 오늘 처음 선보인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전까지는 수성의 입장에 서 있던 슈라우드이기에 딱히 꺼내 들 이유가 없었다.
또, 나로움 요새 공성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되찾아야 할 성인데 이걸 써 봤자 우리 성벽만 무너뜨리는 꼴이었던 것이다.
반면, 오늘은 이러한 제약이 사라졌다.
공성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물론이요, 무너뜨릴 성벽 역시 명백한 제국의 것이었다.
하여 망설임 없이 꺼내 들었고, 거침없이 제국의 성벽을 뭉개 버렸다.
그리고 제국은 이에 심히 당황하는 중이었다.
샤아아~
화르륵~
스르르~
한데, 제국에게는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슈라우드 측에 철포 다음 단계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화살이었다.
그냥 화살이 아닌, 엘프의 정령력이 한가득 깃든 화살.
“격발.”
슈슈슈슈슉~!!
이 화살이 혼란에 빠져 있는 제국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평범한 인간의 화살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를 격하고서.
파바바바밧!!
그리하여 제국군에게 화살의 비를 선사했다.
방패나 갑옷 따위로는 막을 수 없는, 그렇기에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화살의 비를.
슈슈슈슈슉~!
파바바바밧!!
제국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여기에 대응할 만한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저 이 화살 비의 세례가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혹은 제국의 실력자들이 무언가 해 주기만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든가.
우우우웅~
그나마 마법사들이 나서 주기는 했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방어 및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일부는 방어막을 쳐서 쏟아지는 포탄과 화살 비에 저항했고, 나머지는 역으로 화염구 따위를 날려 보냈다.
구우우우웅!!
푸시시식…….
하지만 이것이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선 슈라우드를 향해 날아가던 화염구 따위의 마력 덩어리들.
이것들은 돌격 중인 슈라우드 군에 채 닿기도 전에 모조리 사그라들었다.
평범한 마법사들의 마력과 차원을 달리하는 6서클 대마법사의 마력이 원인이었다.
이 압도적인 마력의 홍수가 제국 마법사들의 마력을 짓눌러 버린 것이다.
심지어 혼자도 아니고, 스승과 제자가 사이좋게 둘이서.
카가각…… 콰과과광!!
투두두두…… 파바바밧!
마법사들의 방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간은 막는 듯도 해 보였으나,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포탄은 방어막을 깨부순 뒤 성벽을 짓뭉갰고, 화살은 방어막에 구멍을 낸 뒤 그 아래 있던 병사들까지 꿰뚫었다.
이렇게 되면 기원도 통하지 않는 셈이었다.
결국, 제국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무방비로 얻어맞는 것뿐이었다.
“거리에 들어왔어!”
“지, 지금이다! 반격해!”
“궁수들 뭐 하냐고! 반격하라니까!”
어차피 엘프의 화살 세례는 그치지 않을 터였다.
어찌 됐든 달라붙기 전까지는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악이라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슈슈슛~
마침 슈라우드 군이 제국군 사정거리 안에 진입한 참이었다.
이에 제국군은 대응 사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슛~!
기본적인 병력의 양은 제국군이 슈라우드를 앞섰다.
또한, 제국군은 성벽 위에서 수성을 취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혼란의 와중이지만 공중을 수 놓는 화살의 수는 적지 않았다.
더불어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대로면 달려드는 슈라우드 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화살이 이대로 슈라우드 군 머리 위에 떨어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사아아아아~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애초부터 성립이 불가했다.
화살이 슈라우드 군의 머리 위로 무사히 떨어진다?
지금껏 이 전제가 성립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어둠이 휘감은 전장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우뚝!
역시나였다.
슈라우드 군에게 날아들던 새까만 화살들은 기사 아닌 기사를 일으켰다.
일정 선을 기준으로 일제히 공중에 우뚝 멈춰 선 것이다.
이 자체만 놓고 보면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배리어 따위에 튕겨 나간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공중에 뚝 하고 멈춰 버린 상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것을 기사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슈라우드 군은 물론이거니와 황당함을 금치 못해야 할 제국군마저 그러했다.
이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는 전무했다.
“젠장.”
“검은 악마가 또…….”
“싫어……. 이젠 정말 싫다고…….”
단지, 좌절과 절망을 금치 못하는 이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오직 제국군 한정으로.
후두두두두둑!
이어서 공중에 떠 있던 화살들이 동시에 추락하는 광경도 마찬가지였다.
이 또한 경악이 아닌 절망만을 자아냈다.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전쟁 동안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하여 펼쳐져 온 그런 광경.
따라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니, 아는 정도를 넘어 골수에 깊이 각인시켰다.
라이오넬 앞에서 제국군의 화살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콰아아아아~!
나아가 라이오넬은 잔인했다.
그는 제국군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되려 제 손으로 끄집어 올렸다.
콰우우우우!!
그것은 거대한 어둠이었다.
유형화를 거쳐 모두의 눈에 훤히 보이는 짙고도 음울하며 탐욕스러운 어둠.
동시에 라이오넬에게 검은 악마라는 별칭을 붙여 준 어둠이기도 했다.
“아아…….”
“제발 안 돼…….”
“주, 죽고 싶지 않아.”
제국군에게는 깊고도 깊은 트라우마였다.
그들의 혼에 새겨진 두려움과 공포의 원천이었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고 마는 거대한 벽이었다.
쿠과과과과과과!!!
그런 벽이 떨어져 내렸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성벽, 그리고 그 위에서 혼란과 좌절에 허덕이는 제국군을 향해.
어둠 본연의 음울함과 무자비함, 탐욕스러움 따위를 유감없이 뿜어내며.
* * *
-동부는 넘어갔다고 봐야겠군.
슈라우드가 제국의 국경선을 넘은 지 두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 두 달은 제국에게 전례 없는 치욕을 감내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황제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이 두 달 동안 로만 제국 동부는 슈라우드의 손에 넘어갔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 그들이 제국 동부의 주요 거점을 모조리 함락시킨 것이다.
-혹, 공작도 참모들과 같은 핑계를 늘어놓을 참이오? 거점만 함락된 것이지 실제로 슈라우드의 땅이 된 것은 아니니 뭐니 하는 그런 핑계.
물론, 완벽한 점령과는 거리가 멀었다.
슈라우드가 몰고 온 병력은 총 4만에 불과했다.
고작 그 병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 봐야 단순 함락이 전부였다.
함락 이후의 영향력 행사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조건인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제국 참모들의 핑계도 꼭 틀린 것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근거를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아닙니다.”
-역시 공작은 변명하지 않을 줄 알았소. 최소한 내가 아는 공작이라면 당연히 그럴 테지.
하지만 근거 따위가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상황 그 자체였다.
슈라우드가 제국 내부로 깊숙이 치고 들어온 현 상황 그 자체.
나아가 그 목적지가 명백히 황도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슈라우드는 어차피 점령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애초에 하나뿐이었다.
바로 황제 아이단을 사로잡는 것.
그리하여 이 전쟁을 단숨에 종결짓는 것.
오직 이 목적 하나만을 바라본 채 엄청난 속도로 제국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설령 황제를 사로잡지 못한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황도를 함락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국의 상징성이 송두리째 붕괴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륙의 판도 전체를 뒤집어 놓을 터, 진짜 점령은 그때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다만, 요즘은 내 이 믿음에 자꾸만 의심이 생기고 있소. 내가 알던 공작은 핑계는 물론이거니와 입에 발린 사과 따위도 늘어놓지 않는 사람이었거든.
“…….”
-그런데 요즘은 공작의 입에서 사과밖에 들리지 않으니, 내가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거요?
결국, 핵심은 하나였다.
제국이, 그리고 가이덴이 슈라우드와 라이오넬을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전부였다.
이 외에 다른 그 어떠한 핑계나 변명 따위도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
-말이 없구려.
그렇기에 가이덴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제국 유일의 공작이든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마스터든 뭐든, 그에게는 현재 입을 열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내 식대로 가지.
그리고 그래서였다.
황제의 방식이 슈라우드와 라이오넬을 향해 온전히 펼쳐지게 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