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장: 지겹도록 길었던 악연
“본대는?”
“코르키 영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병력이 많다 보니 합류 지점까지 적어도 보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브루노 다스가 트라인 요새에서 퇴각한 제국군 본대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부관은 곧바로 답을 주었다.
이에 따르면 본대는 현재 빠르게 동쪽으로 후퇴 중에 있었다.
동시에 슈라우드 점령을 위해 각지로 흩어진 병력을 불러 모았다.
앞으로 펼쳐질 슈라우드의 대대적인 반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브루노 다스 역시 이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 또한 일부 병력을 이끌고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슈라우드를 휩쓰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 보름도 적의 방해가 없을 때를 상정한 것이겠지?”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본대에 계시는 분이 다른 분도 아니고 공작 전하시지 않습니까? 슈라우드 놈들이 아무리 주제를 모르고 멍청하다지만, 겁도 없이 전하께서 계신 본대에 게릴라를 걸 수 있겠습니까?”
“으음, 그렇기는 한데…….”
부관의 말이 맞았다.
가이덴이 꽉 버티고 있는 이상 게릴라는 쉽지 않았다.
어설픈 병력으로 잘못 시도했다가는 되려 역으로 싸잡아 먹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덴이라는 절대자는 분명 그런 억지력을 지닌 존재였다.
이 점은 브루노도 백번 천번 동의하는 바였다.
“라이오넬 라인하트는? 그놈에 관한 정보는 들어온 게 없나?”
그럼에도 브루노는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떨치려야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구보다 많이 겪었고, 그런 만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라이오넬 라인하트라는 놈의 무서움을.
“아직은 따로 없습니다. 정보부에서 최대한 주시하려고는 한다는데, 백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워낙 신출귀몰한 놈인지라…….”
“일단은 알겠다. 대신 놈에 관한 것은 최우선으로 주의를 기울이도록. 놈은 돌아온 이상 무슨 짓이든 할 놈이니까. 특히 본대가 아닌 별동대 쪽을 노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어. 다른 부대 소식도 분 단위로 체크하고 즉각 즉각 보고하도록 해.”
“……예.”
브루노가 아는 라이오넬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그는 어떤 조건에서든 항상 극한의 이득을 챙겨 왔다.
시작은 황도 아카데미에서부터였다.
당시 라이오넬은 힘을 숨기고 있다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 모두의 뒤통수를 쳤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이 음흉함은 이베리아 평원과 카르가디아 산맥으로 이어졌으며, 그를 통해 그리핀 군단이라는 강력한 군사력까지 손에 넣었다.
심지어 본신의 힘만을 숨긴 것도 아니었다.
주변 인물들의 힘까지 철저히 은폐했다.
그러고는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씩 꺼내 들었다.
카디즈 군도에서는 다이너 브란부르크, 왕궁에서는 그 아비인 에릭스 브란부르크, 나로움 요새 평원에서는 아인한드라와 엘프 및 드워프, 그리고 최근에는 동맹인 두 왕국까지.
남몰래 차곡차곡 쟁여 둔 실력자와 세력을 정말 결정적인 순간마다 최상의 방식으로 공개한 것이다.
마치 찬장 속에 꼭꼭 숨겨 둔 최고급 간식을 입이 궁금할 때마다 하나씩 빼먹는 느낌이랄까?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 더럽고 거지 같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라이오넬과 벌써 다섯 번이나 얽힌, 그리고 그 다섯 번 모두 철저히 농락당한 브루노 입장에서는 더더욱.
라이오넬이라면 이가 갈리는 것을 넘어 손발이 덜덜 떨리는 브루노였다.
분노의 감정을 넘어 이제는 공포와 두려움의 영역에 다다른 것이다.
오죽하면 이 굴욕적인 감정을 브루노 스스로 내심 인정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본대와 합류하기 전까지는 강행군을 유지한다. 휴식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예? 하지만 백작님, 오랜 원정으로 병사들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필요 이상의 강행군까지 해 버리면 전부 다 퍼져 버릴 게 분명합니다.”
“그럼? 라이오넬 그놈이 이쪽으로 오면 어쩌겠다는 거지? 놈을 무슨 수로 막을 건데? 잠시 퍼지는 게 무서워서 죄다 죽이자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괜히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제 승리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놈이다. 본대 합류 전까지는 결코 안심할 수 없어. 하니, 그때까지 우리는 강행군을 지속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 더럽고 거지 같은 기분, 브루노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피할 작정이었다.
라이오넬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또, 본대와도 수시로 연락을 취해서 혹시 경로가 틀어지거나 날짜가 늦어지지는 않는지도 계속…….”
흠칫.
그렇게 브루노가 한창 재확인을 이어 가던 때였다.
라이오넬과 관련해서 놓친 것은 없는지 체크해 나가던 그때, 갑작스레 그의 감각에 걸려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쐐애액~!!
대기를 무참히 찢어발기는 무언가였다.
비록 아직 거리는 좀 있지만, 그 엄청난 속도 때문에 금세 거리를 좁혀 올 것만 같은 무언가.
그리하여 브루노 앞에 어떤 익숙하면서도 너무나도 끔찍한 존재를 내려놓을 것만 같은 무언 가 말이다.
그 무언가가 지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드높은 상공에서부터, 정확히 브루노를 향해, 미친 듯한 강하 속도를 뽐내며.
“젠장…….”
굳이 확인조차 필요 없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그 누구보다 브루노가 잘 알고 있었다.
도저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브루노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겨 준 그놈, 불과 5초 전까지 브루노를 벌벌 떨게 만들던 그놈과 그놈의 탈것이었으니까.
결국,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어어? 저거?”
“저거 뭐? 뭐가…… 어어어?”
“설마……?”
“그, 그리핀!!”
이내 병사들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절대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공포의 존재가.
그것이 자신들을 향해 쏘아져 내려오는 악몽과도 같은 모습이.
“라이오넬이다! 라이오넬 라인하트가 온다!!”
검은 악마 라이오넬 라인하트.
제국의 악몽인 그가 하필이면 이곳을 먹잇감으로 선택한 것이다.
“저자가 왜 하필 여기…….”
“아, 안 돼, 이건 아니야.”
“아아…….”
모두가 심각한 패닉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브루노에게 강행군은 재고해 달라고 요청하던 부관조차도.
그 역시 연신 ‘안 된다’는 말만을 읊조리며 절망할 뿐이었다.
타다닷!
그래서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최고 지휘관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그들과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타다다다닷!!
그랬다.
병사들이 악몽의 등장을 눈치챈 시점, 브루노는 이미 발을 구르는 중이었다.
그리핀이 떨어져 내리는 곳과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서.
절대 눈에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을 장악한 깊은 트라우마의 원천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콰우우우우~!!
그러나 세상일이란 것이 꼭 마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먹은 것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브루노의 경우에는 지금껏 라이오넬과 얽히는 일만큼은 꼭 그러했다.
반드시 엉키고 꼬여 언제나 그를 초라하고 처연하게 만들었다.
“헛!!”
지이이잉!
안타깝게도 이 액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니, 지금 브루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 한층 더 강화된 상태였다.
촤르륵!!
기다란 채찍의 형태로 떨어져 내리는 어둠이었다.
이 특이한 형태의 어둠이 브루노의 검을 묶어 버렸다.
강한 타격으로 찍어 눌러서 묶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검 자체를 둘둘 휘감아서 문자 그대로 정말 묶어 버린 것이었다.
“커헉……!”
물론 이것이 일반적인 채찍이라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거리에 불과했을 터였다.
브루노의 검 위에 실려 있는 것은 무려 오러 블레이드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역시나 냉혹했으며, 브루노에게 닥친 액운 또한 너무나 강력했다.
묶여 버린 그 순간, 브루노는 그대로 압도당하고 말았다.
채찍이 강제하는 대로 제자리에 박힌 채 꼼짝조차 못 하게 된 것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여과 없이 내뱉는 것뿐.
그그그그극!!
힘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지금껏 브루노가 직접 경험해 본 것 중 두 번째로 강력했다.
첫 번째가 무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임을 고려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물론 그에 살짝 미치지는 못하나, 어차피 브루노의 힘으로 대적 불가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드마스터조차 대번에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힘인 것이다.
사아아아아~
“크흐윽…….”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힘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브루노에게 더 큰 강제를 가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신력의 고갈.
어둠의 채찍에 감기는 그 순간, 브루노는 부정적 감정의 쓰나미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러고는 쉬이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런 비가시적 요소가 그의 집중력을 완전히 흩뜨리는 중이었다.
사실 처음 겪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이 공격을 이미 수도 없이 당해 본 브루노였다.
이베리아 평원을 기점으로 최근 나로움 요새까지 적어도 수십 번은 더 됐다.
이쯤 되면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분명 나로움 요새에서의 마지막 충돌 때는 나름 버틸 만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마치 이베리아 평원에서 처음 경험했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소드마스터의 정신력으로도 도저히 버티기가 어려웠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채로 그냥 휩쓸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스아아~
터벅.
이런 연유였다.
아무런 대비도 못 한 채 라이오넬을 맞이한 것은.
비 오듯 흐르는 식은땀과 고통으로 얼룩진 표정만이 그가 내보일 수 있는 전부였다.
“오랜만입니다, 다스 백작.”
“크윽, 네놈…….”
“근 일 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 백작은 반갑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어딜 그리 급하게 가던 겁니까?”
라이오넬이 주변을 한번 빙 둘러보며 말했다.
당연히 일부러 그런 것일 터였다.
근처에 있는 병사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달아나기만 하는 거, 지겹지도 않습니까?”
대번에 험악해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도주 전적이 화려한 브루노였다.
그의 앞에서는 다들 쉬쉬한다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봐도 좋았다.
한데, 그런 브루노가 또다시 싸워 보지도 않은 채 도망부터 쳤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까발려진 것이다.
전해져 오는 시선이 고울 리 만무했다.
“나는…….”
“내 앞에 당당하게 다시 설 게 아니라면 차라리 아예 먼 곳으로 도망을 치던지요. 그러는 편이 검사로서의 당신에게도 더 좋다는 거, 모를 리 없을 텐데요?”
“크으으…….”
브루노라고 모르지 않았다.
이런 어정쩡한 스탠스가 검사로서의 정체성에 최악이라는 거, 누구보다 브루노 본인이 가장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라이오넬에 대한 트라우마를 인정한 직후부터 확연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장의 정체를 넘어선 실력 자체의 급격한 하락세가.
반전을 위해서는 일단 물러나 라이오넬을 목표로 수련을 하든 아니면 아예 미친 척하고 들이받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그럼에도 브루노는 이도 저도 아닌 스탠스를 계속 유지했다.
완전히 도망을 치지도, 그렇다고 미친놈처럼 도전하지도 않았다.
그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애매하게 전장에 서 있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러는 사이 트라우마는 골수까지 파고 들어갔고, 이제는 정말 답이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도 한때 나와 검을 맞댔던 상대로서의 예의는 지켜 주겠습니다. 더 이상 지저분하게 끌지 말고 끝내죠.”
“크윽…… 아, 안 돼. 제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그 사실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음에도 브루노는 여전히 삶을 구걸했다.
이에 라이오넬이 잔뜩 구겨진 인상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 대체 어디까지……. 정 그렇게 본인의 목숨이 소중했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썩어 빠진 검으로 애꿎은 사람들은 잘도 죽여 놓고 이제 와 무슨…….”
“제, 제발…….”
사아아~
라이오넬이 움직인 것은 입만이 아니었다.
브루노를 구속하고 있던 그의 어둠 역시 움직였다.
“당신은 이미 우리 왕국과 왕국민들을 너무 많이 유린했어. 당신에게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아.”
애처롭게 구걸하는 브루노의 심장을 향해서.
“크아아악!! 안 ㄷ……”
“잘 가시오, 다스 백작. 내세든 환생이든 두 번 다시는 마주치지 맙시다.”
퍼석!
“컥……!”
그리고 마무리했다.
브루노의 목숨을.
지겹도록 길었던 둘 사이의 악연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