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장: 칠흑 같은 암운(3)
라이잔 자작령에서는 내가 지속적으로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오러는 물론이거니와 정령력까지, 내가 끌어 올릴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한계치까지 끌어 올렸음에도, 심지어 이를 전부 방어에만 투입했음에도 그러했다.
충돌이 한번 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울혈을 느껴야만 했었다.
단지 실낱과도 같은 반격의 기회를 노리며 억지로 버텨 나갔을 뿐이었다.
이마저도 가이덴이 거리를 조절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불가능해졌고 말이다.
지이이잉!
콰우우우!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적어도 검격 교환 자체는 무리 없이 이어 가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구조는 탈피한 것이다.
달라졌다는 가이덴의 읊조림, 전과 달리 한없이 진지해진 그의 표정이 이를 뒷받침했다.
파밧.
지이이잉~!
더구나 이것이 근접전 상황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가이덴이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예의 그 변화무쌍한 오러 블레이드 활용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라이잔 영지에서 나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방식이었다.
콰가가가각!!
“…….”
그렇다고 해서 양상이 드라마틱하게 뒤집히지는 않았다.
분명 나의 오러 사용은 불가한 거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충분히 버텨 볼 만했다.
어둠의 진화 덕에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격차를 메운 것이다.
스아아아~
여기에 조건의 개선까지 더해진 참이었다.
우선 검이 달라졌다.
라이잔에서는 여정을 들고 싸웠던 반면,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은 심연이었다.
카밀라와 함께 복귀하며 돌려받은 것이다.
즉, 영혼의 파트너와 함께인 셈이다.
어둠의 파괴력과 컨트롤 능력이 전보다 배는 향상될 수밖에 없었다.
웅웅웅웅~
나아가 그 원천마저 무한한 상태였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지금 수십 만의 군인으로 가득 찬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더욱이 서로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투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점이었고 말이다.
이 말인즉슨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의미.
어둠의 원천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조건이었다.
버티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콰가가가가각!!!
“계속 이렇게 시간만 끌 작정인가?”
“그럴 생각입니다. 직접 붙어 보니 더 확실해지는군요, 아직은 당신에게 닿지 못했다는 게.”
물론, 이것만으로 격차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정도가 대폭 감소한 것일 뿐, 우열 자체는 여전했다.
이런 조건들을 업고도 나는 아직 가이덴을 넘어서지 못했다.
넘어서기는커녕 여전히 약자의 입장에 서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근접전은 오러의 힘까지 더해지기에 조금 더 해볼 만하나, 가이덴이 여간해서는 그 거리를 내주지 않고 있었다.
“비겁하게 나오는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야.”
“비겁?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는 분이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 진짜 비겁이 뭔지는 황제 옆에서 수도 없이 목도했을 텐데요?”
그러나 당장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내가 가이덴을 성공적으로 묶어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이덴은 분명 나를 밀어붙이는 중이나, 그렇다고 전처럼 압도하지는 못했다.
격차가 있기는 하되, 한순간의 방심만으로도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따라서 그 또한 내게서 함부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내 목표는 내가 아닌 슈라우드가 로만을 뛰어넘는 거라고.”
그렇다면 나로서는 다급해질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되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 좋은 구조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나의 영향력이 가이덴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쿠구구구구!
“…….”
가이덴과 달리 나에게는 광역기가 있었다.
어둠의 발전으로 그 위력과 범위가 대폭 증대된 중력장이라는 광역기 말이다.
이것이 가이덴과의 대결 와중에도 전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제국군이 그리핀 군단과 엘프, 드워프의 돌격에 아무런 대응도 못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야 안 봐도 뻔했다.
학살이나 다름없는 양상으로 제국군이 쓸려 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시작일 뿐입니다. 제국군은 그 누가 됐든 곧 슈라우드 땅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될 겁니다.”
“오만하군. 내가 그걸 두고 볼 것 같나?”
“두고 보게 될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제국군 진영 전체가 붕괴될 터였다.
더구나 트라인 요새 내부에서는 바르코스 후작이 병력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슈라우드의 본대가 치고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급한 쪽은 당연히 가이덴일 수밖에 없었다.
“건방진!”
파앗!
이윽고 그가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더는 거리를 재지도 않았다.
단숨에 짓쳐 드는 가이덴이었다.
콰르릉!!
‘큽!’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전심전력은 확실히 무서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근접전은 나름 비슷하다 여기던 참이었다.
한데, 직접 충돌이 재개되자마자 그 생각은 고이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검격의 파괴력이 한층 더 올라간 것이다.
어둠과 오러 블레이드를 모두 쏟아부었음에도 힘에서 밀리고 있었다.
콰릉! 콰과광! 쿠과과광!
쉼 없이 이어지는 검격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히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강력했다.
그 힘을 해소하고자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기만 할 뿐이었다.
“…….”
이렇듯 대결의 흐름은 가이덴 쪽으로 무게 추가 실린 상태였다.
그러나, 분명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굳어지는 쪽은 오히려 가이덴이었다.
가이덴이 유리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나를 무너뜨릴 만큼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서 얼마든지 시간을 더 끌 수 있었다.
현재 흐름대로라면 그것이 최소 몇 시간 이상은 될 터.
가이덴으로서는 최악의 흐름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제국군은 초토화될 것이 눈에 훤했다.
샤아아아~
화르륵~!
드드드드!
촤라락!!
특히, 병사들도 병사들이지만 마스터 급 실력자들의 문제가 치명적이었다.
트라인 요새에 배치된 제국의 마스터는 가이덴을 제외하고 세 명에 불과했다.
정령 소드마스터 둘과 6서클 대마법사 하나.
반면, 슈라우드는 보유한 마스터 전부가 이곳에 모여 있었다.
여기에 라이오넬과 함께 온 카밀라까지 추가된 상황이었다.
숫자에서 절대적인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나마 슈라우드의 마스터들이 적잖은 내상을 입었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거리랄까?
덕분에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으나, 오래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최대한 빨리 나를 처리하든, 혹은 전격적인 후퇴를 결정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만 했다.
아니면 정말 전멸을 금치 못할 터였다.
“자네, 사람을 너무 짜증 나게 만드는군.”
콰르릉! 쿠과과광!!
그래서인지 가이덴의 검에 실린 힘이 순간적으로 증폭되었다.
일순 버티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의 강력함이었다.
하여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는 폭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공격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점차 더 크게.
콰가각! 쿠구구궁!!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위기에 몰린 것은 분명했다.
검격이 계속될수록 나는 더 큰 핀치에 몰려 가는 중이었다.
‘조금만.’
하지만 이것이 꼭 최악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바라던 흐름이기도 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가이덴의 공격이 버티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강력해진 것은 맞지만, 대신 그 또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다.
강공 일변도로 스탠스를 전환하며 그만큼 무게중심과 밸런스가 불안해진 것이다.
공격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의 중심 역시 높아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기에 나는 커 가는 위기 속에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가이덴에게 한 방 먹일 최적의 타이밍 말이다.
그가 조금만 더 무리한다면, 그래서 중심이 높아진다면, 그때는 한번 건곤일척의 승부를 볼 작정이었다.
중력과 인력으로 흔들고, 최후의 일격으로 마무리.
라이잔 영지에서는 생채기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터였다.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해볼 만한 승부수였다.
쿠과광!!!
‘크읍! 이제…….’
힘에 밀려 크게 한번 물러났다.
여기서 가이덴이 재차 짓쳐 들면 그때는…….
파밧!
“으음?”
타다닷!
한데, 계획이 어긋났다.
가이덴의 행동이 예상했던 바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더 몰아붙이는 대신 물러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퇴각! 전군 퇴각한다!”
아예 퇴각을 명령하는 가이덴이었다.
이런 그의 목소리는 오러를 타고 전장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제국군의 즉각적인 후퇴 움직임을 이끌어 냈다.
“…….”
물론, 이것이 기댓값 자체를 완전히 벗어난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져 있었다.
나를 최대한 빨리 처리하든 아니면 전격적으로 후퇴를 결정하든.
가이덴은 이 중 후자를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후자가 정답이기도 했다.
다만, 기댓값이 훨씬 낮은 쪽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대륙에서 유일한 그랜드 소드마스터이자 자타공인 최강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사실상의 무승부를 인정한다?
세간의 평가도 그렇거니와 본인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전자 선택의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었다.
하여 나 또한 각오를 다졌던 것이고 말이다.
“쫓지 마.”
그러나 이미 결과는 나왔다.
예상과는 다른 방향이었다고 하나, 어쨌든 우리 또한 그에 맞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내 사람들에게 지침을 내렸다.
무리해서 쫓지 말라고.
“일단은 보내 준다.”
지금은 쫓지 않는 게 맞았다.
내 사람들의 상태가 심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이너를 비롯하여 모두가 최소 한 번씩은 울혈을 토해 낸 상태였다.
여기서 더 무리했다가는 어떤 변수를 초래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가이덴을 처리한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당장은 몸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겼다…….”
“후우…… 이겼어.”
“해냈다. 우리가 버텨 냈어.”
그리하여 트라인 요새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슈라우드의 승리로.
근 넉 달 만의 승리였다.
그것도 처절한 버티기 끝에 간신히 얻어 낸 값진 승리.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거 좀 일찍 좀 와 주지 그러셨습니까? 기다리다 진짜 목 빠질 뻔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오랜만의 전장을 둘러보고 있는 나에게 다이너가 다가왔다.
“미안. 대륙 최강은 괜히 최강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몸은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빨리 오려고 무리하신 건 아니고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괜히 툴툴대는 녀석이었다.
반가움과 염려가 공존하는, 지극히 다이너다운 툴툴댐이랄까?
“다행이구나. 제자 녀석 얼굴을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다.”
스승이자 아버지나 다름없는 에릭스도.
“라이 경…….”
그렁그렁한 눈망울의 베로카도.
“술 내놔라, 라이. 네놈 없는 동안 한 모금도 입에 못 댔어.”
걸걸한 목소리로 술부터 찾는 타로쉬핸드도.
“…….”
성격답게 말은 한마디도 없지만 진한 눈빛을 보내는 아인한드라와 바비도.
“저는 라이 경께서 오실 줄 알았습니다. 무조건 확신했어요. 제가 누굽니까? 라인하트 영지에서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라이 경의 왼팔 아닙니까? 그깟 대륙 제일이니 뭐니 해 봤자 우리 라이 경께는 안 되는 게 당연하죠. 의심하는 놈들은 제가 아굴창을 그냥 싹 다 …….”
역시나 성격답게 절대 입을 쉬지 않는 레몬드도, 그리고 뒤에 도열해 있는 그리핀 군단 전원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반가움의 눈빛과 환한 웃음으로 내 복귀를 열렬히 환영해 주고 있었다.
“모두 걱정 끼쳐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악착같이 버텨 내 준 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이런 내 사람들에게 나 또한 사죄와 감사의 인사로 화답했다.
나아가 지금까지 이들이 한 고생을 보답해 주고자 했다.
내 사람들이 바라고 또 바라마지 않았을 방식으로 말이다.
“다이너.”
“예, 라이 경.”
“현재 우리 왕국 내부에 들어와 있는 제국군 배치 정보 가지고 있지?”
“네, 가지고 있습니다.”
“정확도는?”
“오늘 아침에 갱신된 거라 오차는 거의 없을 겁니다. 바로 시작하시려고요?”
“그래야지. 그러려고 본대도 저리 쉽게 보내 주는 건데.”
내가 자리를 비운 넉 달, 다들 참 무던히도 맞았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도 그저 웅크리고 버틸 뿐이었다.
당연히 반격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다들 속에 쌓인 울분과 울화가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럼 다들 몸 좀 추스르고 있어요. 저는 가서 묵은 빚 좀 청산하고 오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것을 풀어 줄 생각이었다.
우리 땅을 유린한 놈들과의 묵은 빚을 청산함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