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장: 칠흑 같은 암운
우웅~ 푸슉!
베로카가 마력탄을 쏘아 냈다.
그리하여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기사 하나를 꿰뚫었다.
피격당한 기사가 그대로 절명했음은 두말할 필요 없었다.
그 기사의 소속이 제국군이라는 사실 역시도.
푸슉! 푸슉! 푸슉!
비단 한 번만이 아니었다.
베로카의 마력탄 사격은 쉼 없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제국군을 향해서.
주륵.
솔직히 베로카는 복귀 직전까지만 해도 뭔가 좀 달라질 줄 알았다.
드라마틱한 반전을 기대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렇듯 코피까지 흘리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우우우우우웅~
그녀가 새로이 도달한 경지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6개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서클의 수는.
즉, 6서클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고작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6서클 대마법사.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였다.
대륙 전체로 놓고 따져도 라이오넬 외에는 비교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재능만으로 쉽게 도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난 리브나로 백작성에서의 혈투를 거치며 간신히 도달한 경지였다.
당시 폭주하던 마력을 잠재우지 못했다면, 지금 그녀는 대마법사가 아닌 폐인이 됐을 터.
그녀와 함께 사경을 헤맨 센트럼은 여전히 회복에 전념 중인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르륵.
어찌 됐든 이렇듯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대마법사가 된 베로카였다.
하면 이제는 좀 경지에 걸맞은 포지션을 유지할 때도 된 셈이었다.
대마법사답게 거대한 마법을 영창하며 전장 전체를 주도하는 포지션 말이다.
지금처럼 코피나 흘리며 미친 듯 마력탄을 난사하는 처지가 아니라.
하나, 주어진 상황은 보이는 바와 같았다.
그녀는 경지에 오르기 전과 마찬가지로 성벽 위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딱히 서클 구분도 필요 없는 저티어 마력탄, 그리고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 함께.
“베로카!”
구웅!
스승인 막시무스 슈러그혼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에 베로카는 마력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거창한 양이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필요 최소한의 마력을 최적의 루트와 방식으로 배치할 뿐이었다.
움찔!
아주 찰나의 순간, 대상이 움직이지 못하고 움찔할 수밖에 없도록.
심지어 그 대상은 정령 소드마스터였다.
“기가 라이트닝!”
콰지지지직!!
그 틈을 노리고 막시무스의 마법이 쏘아져 나갔다.
그러고는 살짝 멈춘 상대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크으읏!”
콰지지지…….
물론, 이것만으로 쓰러뜨리기는 요원했다.
주지했다시피 상대는 제국의 정령 소드마스터.
급히 캐스팅한 5서클 마법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단, 그렇다고 해서 효과가 전무한 것 또한 아니었다.
파밧.
오히려 지대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마스터 급 실력자가 잠시 전장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위태롭던 트라인 요새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마법사!!”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요새의 위기는 끊길 줄을 몰랐다.
이에 상응하는 베로카의 바쁨과 고생 역시도.
이번에는 용병왕 지크프리트였다.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베로카를 불렀다.
구원을 요하는 외침이었다.
구우웅!
주르륵~
베로카가 또다시 마력 구속을 발휘했다.
인중에 흐르는 코피를 채 닦지도 못한 채였다.
오히려 그 양만 더 늘어날 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무려 마스터 급 실력자를 붙드는 일이었다.
아무리 필요 최소한의 마력만을 투입한다 해도, 그 양이 가벼울 리 만무했다.
심지어 한두 번도 아니고, 전투가 이어지는 내내 지속해서 펼쳐야만 했다.
실력자 면에서 슈라우드가 전체적으로 밀리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베로카의 서포트 없이는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슈아악~!
파가가각!!
베로카의 마력 구속 덕에 재차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다.
틈이 생긴 제국 소드마스터에게 지크프리트의 검격이 가해졌고, 이에 상대가 약간의 손해와 함께 물러난 것이다.
이로써 당장 코앞에 닥친 위기는 어찌어찌 넘길 수 있었다.
콰르르르릉!!
“커헉……!”
하지만 슈라우드에 닥친 위기는 여전했다.
위기의 근원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아니, 여전한 정도를 넘어 한층 더 미쳐 날뛰고 있었다.
방금 막 튕겨 나와 성벽에 대자로 처박힌 다이너 브란부르크가 그 방증이었다.
그가 오러 블레이드는 물론이거니와 대지의 정령력까지, 가진 바 모든 힘을 다 쏟아부었음에도 볼품없이 널브러진 상태였다.
지이이잉~
전장을 지배하는 특이한 오러 블레이드의 주인.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마스터이자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사내, 가이덴 드라이슬러.
그가 원인이었다.
다이너는 상식을 초월하는 가이덴의 힘 앞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화르르륵!!
콰아아아아~!!
비단 다이너만이 아니었다.
현재 슈라우드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나머지 두 명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쿠과과과과광!!!
“크흑!”
“컥……!”
에릭스 브란부르크와 하이엘프 아인한드라.
화염과 폭풍을 내뿜던 이들도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왔다.
그러고는 각각 성벽과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역시나 가이덴과의 충돌을 견뎌 내지 못한 결과였다.
“…….”
현재 제국 쪽의 마스터 급 실력자 숫자라 봐야 네 명에 지나지 않았다.
가이덴과 정령 소드마스터 둘, 그리고 6서클 대마법사 하나.
나머지 인원은 전부 타지역 점령을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반면, 슈라우드의 실력자 숫자는 그 1.5배나 됐다.
아인한드라, 에릭스, 다이너, 막시무스, 지크프리트, 그리고 베로카까지 무려 여섯인 것이다.
심지어 여기에 엘프와 드워프 일족까지 전부 합세했고 말이다.
이곳 트라인 요새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력 배치였다.
그런데도였다.
이렇듯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모았음에도 슈라우드는 밀리고 있었다.
그것도 처절하리만치 일방적으로.
그리고 그 이유는 굳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가이덴 드라이슬러, 오직 그 한 사람 때문이었으니까.
아인한드라와 에릭스, 다이너 삼 대 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저 일방적으로 내다 꽂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만큼 가이덴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아인한드라가 정령 소드마스터 둘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 더더욱.
지이이이잉!!
그런 가이덴이 프리 상태가 되었다.
요새 전체에 대위기의 순간이 닥친 것이다.
그 증거가 가이덴의 검 위에 뭉치는 중이었다.
창공조차 갈라 버릴 듯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의 형태로.
“……스승님!”
저것이 그냥 뭉치기만 할 리 없었다.
성문을 향해 그대로 떨어져 내릴 터였다.
베로카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미 수차례 겪어 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래서였다.
베로카가 막시무스와 함께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물론 이것을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으니까.
자신은 없다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는 스승인 막시무스도 마찬가지일 터.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막아서는 수밖에.
여기서 밀리면 어차피 모든 게 끝장이었다.
하여 앞뒤 재지 않고 미친 듯 서클을 돌리는 베로카였다.
위이이이잉!!
그리하여 요새에 새겨진 방어 마법진을 가동했다.
이것이 요새 전체를 둥근 방어막으로 덮었다.
베로카와 막시무스를 비롯하여 요새 내 모든 마법사의 마력이 담긴 방어막이었다.
콰르르르릉!!!
이것이 떨어져 내리는 가이덴의 오러 블레이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리고 이내 꿀렁였다.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만큼 위태롭게.
힘의 크기에서 확연히 밀리는 것이다.
“쿨럭, 쿨럭!”
“끄르륵…….”
털썩, 털썩…….
그 양상은 방어막 아래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베로카는 이제 코뿐만 아니라 입에서도 피를 쏟아 냈다.
막시무스의 목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역류하는 피 가래로 인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5서클 이하 마법사 중에는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또, 당장 쓰러지지 않았다 해도 앞으로 몇 초 내에 쓰러질 사람이 태반이었다.
이렇듯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파앗! 파앗! 파앗!
드드드드!!
콰아아아~!
화르르륵~!
그때, 성벽과 바닥에 처박혔던 3인이 다시금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가이덴의 오러 블레이드를 향해 뛰어들었다.
각자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 올린 채로.
쿠과과과과과…….
덕분에 최악은 면할 수 있었다.
가이덴의 오러 블레이드가 채 성벽까지는 닿지 못한 채로 소멸된 것이다.
당장의 방어는 가까스로 성공한 슈라우드였다.
“끈질기군.”
이를 보며 가이덴이 낮게 읊조렸다.
분명 아주 작고 낮은 읊조림이었다.
그럼에도 이 읊조림은 전장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버틸 줄은 몰랐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 친구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야.”
약간의 경탄을 실은 읊조림이기도 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버텨 내는 끈질김에 대한 경탄이랄까?
라이오넬의 사람들은 이처럼 그랜드 소드마스터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나아가 이것이 가이덴에게만 국한된 감정일 리 없었다.
대륙 전체가 공유하는 감정일 것이 분명했다.
라이오넬과 그의 사람들, 그리고 슈라우드는 분명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써 내려가던 중이었으니까.
더욱이 그 기적의 끝자락을 목전에 두기까지 했었다.
딱 한 걸음이면 대륙의 판도와 질서 자체를 뒤집어엎었을 터였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걸음이면 말이다.
“처음부터 폐하께 반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으면 좋은 인재들이 이리 허망하게 스러질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단, 이는 결국 인상에 그치고 말았다.
그저 물음표 수준에서 그치고 마는 인상.
실제로 대륙을 뒤집는 느낌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라이오넬의 실종으로 인해 끝내 마지막 한 걸음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니, 마지막으로 묻지. 지금이라도 폐하께 무릎 꿇는 게 어떻겠나? 폐하는 관대하신 분, 그대들의 의기를 높이 사 분명 중히 쓰실 것이야.”
그렇기에 이와 같은 굴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슈라우드를 무던히도 유린한 제국이었다.
라이오넬이 제국에 한 일?
애초에 제국이 수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없었을 것들이다.
황제가 레나를 탐내지만 않았어도, 1왕자 크리스토퍼를 가지고 장난질 치지만 않았어도, 절대로.
그런 제국이 이제 와 선심을 쓰는 척하는 것 자체가 모멸이고 굴욕이었다.
“크으읍……!”
이에 다이너가 반응했다.
가이덴의 일격을 막아 낸 뒤 꿇려졌던 무릎을 다시 폈다.
절로 흘러나오는 신음과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함께였지만, 어쨌든 펴낸 그였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뱉어 냈다.
“지랄하네.”
지극히 다이너스러운 한마디였다.
또한, 그의 지위에 걸맞은 한마디이기도 했다.
“지랄 염병하고 자빠졌네.”
“저 노인네 치매가 들었나, 어디 레몬드 대장 같은 개소리를 늘어놓고 있어?”
“에이, 저건 솔직히 레몬드 대장도 안 할 개소리지.”
그리핀 군단 부군단장에 딱 부합하는 언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이너와 그리핀 군단이 필두가 되었다.
이들을 필두로 한 사람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에릭스와 슈라우드의 기사단, 아인한드라와 겨울바람 일족 엘프들, 타로쉬핸드와 드워프 일족, 베로카와 마법사들, 그리고 바르코스 후작과 슈라우드의 전 병력까지, 전부 다.
가이덴의 힘 앞에 무릎 꿇었던 이들이 전부 다시금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와 봐, 늙다리. 뼈째로 씹어먹어 줄 테니까.”
그러고는 일제히 무기를 겨눴다.
라이오넬, 그리고 슈라우드의 대적을 향해서.
“쯧쯧, 여전히 입만 살았군. 어리석은 것들.”
이것이 가이덴의 심기를 건드렸다.
끌끌거리며 혀를 찬 그가 곧바로 응징에 들어갔다.
지이이이잉!!
예의 그 오러 블레이드였다.
슈라우드에 끝없는 절망과 좌절을 선사해 온 그 빌어먹을 오러 블레이드.
그것이 이제 진정한 끝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압도적인 크기로.
“후회하지 말도록. 다 네놈들의 어리석은 선택이니.”
그렇게 슈라우드 최후의 보루에 칠흑 같은 암운이 드리웠다.
너무나도 어두운, 그래서 빛이라고는 단 한 톨도 새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거대한 암운이, 요새 상공 전체에 한가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