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장: 진화
가이덴이 전장에 도착했다.
그런 그에게 원정군 총사령관 디나크 후작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아직 냉각 상태이기는 합니다만, 지난 전투에서 잃었던 기사 전력도 보충된 만큼 언제 다시 가열돼도 상관없습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공작 전하. 모든 편제와 준비를 마친 상태로 전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더 기다릴 것 없이 오늘 오후에 바로 시작하지.”
총사령관은 여전히 디나크 후작이었으며, 가이덴에게는 딱히 이렇다 할 직책이 없었다.
그러나 디나크 후작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이런 상황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당연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가이덴이었으니까.
로만 제국의 유일한 공작이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마스터이며, 자타공인의 대륙 최강자 말이다.
의문 따위를 품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폐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셨네. 나 역시 폐하 곁을 오래 비워 둘 생각은 추호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계신다면 식은 수프 먹기나 다름없는 일인 것을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나로움 요새를 향한 제국의 공성이 재개됐다.
지난 대참사 이후 조용해졌던 전장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본국에서 새로이 충원된 기사들의 지휘 아래 제국군이 미친 듯 달려들었다.
“오늘 저녁은 나로움 요새에서 먹는다!”
“가라! 가서 빌어먹을 슈라우드 새끼들을 싹 다 씹어먹어 버려!”
“우오오!”
사실 따지고 보면 제국 병사들 입장에서 그리 달가울 것은 없는 상황이었다.
요새를 지키는 슈라우드 군의 전력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오히려 지난 전투 때보다 강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휴식이 더 절실했던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슈라우드 쪽이었고, 지금은 그것을 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면, 제국군의 전력은 되려 깎였다고 볼 수 있었다.
우선 중간 지휘관 격인 기사들이 대거 교체되었다.
아무래도 단번에 손발을 맞추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또, 전장을 지키던 정령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자리를 비웠다.
황제 호위를 위해 본국으로 귀국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요인들로 인해 사기가 떨어졌어야 할 제국군이었다.
“라이오넬은 죽었다! 이제 라이오넬은 존재하지 않아!”
“우리에게는 공작 전하께서 계신다! 그분이 다 해 주실 테니, 쫄지 말고 들어가!”
“우오오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사기가 하늘 끝까지 충천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부재와 존재의 차이였다.
사실상 홀로 슈라우드를 지탱해 오던 라이오넬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부재했다.
정확히는 부재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덴에게 삭제당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제국은 이 사실을 대륙 전역에 널리 널리 퍼뜨렸고 말이다.
반면, 현재 제국 측에는 가이덴이 존재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륙 최강자로 불리는 그였다.
동시에 슈라우드의 대들보마저 처참히 무너뜨린 그이기도 했다.
그런 가이덴이 지금 요새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사기가 충천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공작 전하께서 나서신다!”
지이이잉!!
그리고 지금, 이 모든 상황의 핵심이자 주재자가 앞으로 나섰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무지막지한 오러 블레이드와 함께.
콰릉!!!
“우오오오오~!!!”
단 한 방이었다.
단 한 방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던 성문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돌격하던 제국군 입장에서 함성이 절로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광경이었다.
반대로 슈라우드 군 입장에서는 참담하고 참혹하기 그지없는 광경이겠지만.
샤아아아~!
화르륵!
드드드드!
우우우웅~
물론, 슈라우드라고 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엘프의 폭풍부터 불과 대지, 그리고 대마법사의 마력까지, 그들 역시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전력을 꺼내 들었다.
쿠과가가가각!!
그리하여 어찌어찌 일격은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제국 측 역시 놀고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의 마스터들 또한 가이덴을 따라 한창 돌격해 들어가던 중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힘 또한 고려해야만 했다.
문제는 작금의 슈라우드에 그럴 여력이 없다는 점이었지만.
콰르릉!!!
그래서였다.
마지막 관문까지 순식간에 뚫린 것은.
지난 전투에서 제국군에게 재앙을 선사했던 드워프 제 강철 벽마저 눈 깜박할 새에 붕괴되고 만 것이다.
“슈라우드 것들은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
이제 제국군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미친 듯이 달려들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토록 쳐 죽이고 싶던 슈라우드 군을 향해, 제국의 수호신이자 대륙 최강자의 뒤를 따라서.
* * *
가이덴 출현의 그날, 나로움 요새는 곧바로 제국군의 손에 함락됐다.
비단 나로움 요새만이 아니었다.
나로움 요새는 그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누바크 백작성과 리브나로 백작성은 물론이거니와 왕국 동부 방어선 전체가 무너졌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한 달에 불과했으며, 전선은 왕도까지 밀려 있는 상태였다.
수십 만의 대병력이 이동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인 것이다.
이에 슈라우드는 왕도 앞 트라인 요새를 거점으로 결사 항전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이곳을 마지노선이라고 봐야 했다.
여기서 밀리면 더 이상 답이 없었다.
확실하게 명줄을 끊을 작정인지 제국은 단번에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슈라우드 본대를 트라인 요새에 가둬 둔 후 다른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이로 인해 슈라우드는 사실상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서 끝장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직 버틸 수는 있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가이덴의 참전을 예상했던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레나는 라이오넬과의 연락이 두절된 그날 바로 알아챘다.
그에게 무언가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을.
정기 보고의 부재도 부재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확인처가 존재하는 덕분이었다.
바로 카밀라.
라이오넬의 종속인 그녀가 그의 변고를 확인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비하는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이 대륙에서 라이오넬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란 가이덴,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레나는 곧바로 드워프들을 트라인 요새로 불러들여 방어 체계 정비에 들어갔다.
동시에 왕국의 방어선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트라인 요새까지 물러나라고.
또한, 제국이 휩쓸기 전, 동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병력 및 물자를 최대한 끌어모았다.
이런 빠른 대처 덕분에 슈라우드는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비록 암울하기는 하지만 마지막 불씨 하나를 부여잡은 채 필사적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라이오넬이라는 최후의 불씨 말이다.
레나가 카밀라를 통해 확인한 것은 라이오넬의 변고만이 아니었다.
그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 역시 확인했다.
나아가 모두에게 심어 줄 수 있었다.
슈라우드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스스.
카밀라가 현재 산속을 거닐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현재 카밀라는 전력 외나 다름없었다.
심연에 저장돼 있던 라이오넬의 어둠이 거의 다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레나는 카밀라에게 특명을 내렸다.
최대한 빨리 라이오넬을 찾으라고, 그리하여 하루라도 빨리 그를 데려오라고 말이다.
더 늦기 전에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쯤이기는 한데.”
그렇게 라이오넬을 찾아 나서게 된 카밀라의 현재 위치는 카르가디아 산맥이었다.
이곳으로 온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녀의 본질인 어둠이 이끄는 대로 따른 것일 뿐.
이러한 어둠의 인도 자체는 분명 틀리지 않았다.
점점 라이오넬과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산맥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올수록 그의 기운이 짙어지고 있었다.
“으음, 이건…….”
단지,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점이 문제였다.
라이오넬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무언가 그녀의 감각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명색이 뱀파이어 퀸인 그녀였다.
시각이나 청각 등의 오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본능적인 육감까지 초월의 경지에 다다른 존재인 것이다.
한데, 그런 그녀가 지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온통 그녀를 사로잡은 단 하나의 기운만을 제외하고는.
사아아아아아.
감히 범접은 꿈조차 꿀 수 없는 강렬함이었다.
아니, 강렬함 따위의 표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였다.
뱀파이어 퀸인 그녀조차 넋을 잃은 채 홀린 듯 다가가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으니까.
“카밀라 님?”
“……!”
오죽하면 카밀라가 누군가의 접근을 코앞까지 허용할 정도였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절대적인 기운인 것이다.
“접니다, 카밀라 님.”
다행히도 상대에게 적의는 없었다.
적의는커녕 오히려 반가움을 내비치는 중이었다.
“테페슈?”
그 누군가가 그녀의 수하였기 때문이다.
카밀라를 제외하면 유일한 뱀파이어인 테페슈가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처음부터 카밀라를 대신해 라이오넬을 따라간 테페슈였다.
따라서 그가 라이오넬과 함께 있으리라는 것쯤은 예상한 바였다.
그녀가 예상치 못한 부분은 작금의 이 상황에 있었다.
“저것들은 또 뭐고?”
또한, 지금 테페슈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광경 역시도.
그의 등 뒤로 몬스터들이 몰려가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몰림을 당하는 중이라고 봐야 했다.
테페슈가 내뿜는 피의 힘이 그것들을 한 방향으로 내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산맥의 몬스터들입니다. 밤에는 제가, 낮에는 주인님의 새가 번갈아 가며 저것들을 모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왜? 심지어 저쪽은 주인님께서 계시는 방향인 것 같은데?”
“주인님께서 필요로 하십니다. 그런데 저것들이 자꾸 주인님의 기운을 피해 도망치려 하니, 저희가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쩐지 산맥에 들어선 뒤로 몬스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선에서 그친 것도 아니었다.
아예 주변에서 그 존재 자체를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다.
몬스터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곳 카르가디아 산맥 한복판에서 말이다.
그녀를 사로잡은 기운으로 인해 별다른 신경은 쓰지 못했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몬스터들이 피해? 주인님의 힘은 어둠에 속한 존재들을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텐데?”
“으음,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럼 필요로 하신다는 건? 주인님께서 저것들을 왜 필요로 하시는데?”
“그것이……. 차라리 카밀라 님께서 직접 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뭐라 말로 설명이 어려운지라…….”
“알겠으니 앞장서. 일단 주인님부터 뵙는다.”
그렇게 테페슈의 안내에 따라 라이오넬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가 모아 온 몬스터들을 앞세운 채였다.
“저기 계십니다.”
잠시 후, 카밀라의 눈으로 직접 라이오넬을 담게 되었다.
사아아아아아아!
“아…….”
오랜만에 보는 주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압도적인 광경을.
시체의 몸조차 떨리게 만드는 엄청난 전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