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179화 (180/200)

108장: 절대자

에펜시아 대륙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패권의 부정.

대륙 유일의 패권국인 로만 제국의 패권이 정면으로 부정당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북방의 악몽’이라 일컬어지는 이번 사태가 결정적이었다.

제국 북부가 웬 괴물들에 의해 초토화된 것으로도 모자라,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나선 북부군마저 괴멸되고 말았다.

이는 로만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유의 사태였다.

나아가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기에 충분한 근거이기도 했다.

제국의 패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의심 말이다.

슈라우드와의 예상외 접전부터 북방의 악몽까지, 제국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들이 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놓는 중이었다.

―총사령관 드로코보 후작 예하 5만의 마이바크 군이 오늘 출정식을 마쳤습니다. 한 달쯤 후면 제국 동부의 관문인 카이친스크 요새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왕녀님.

“이렇게 알려 줘서 고마워요, 그래플. 그래플과 마이바크 왕국 덕분에 우리도 숨통이 트였어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간 슈라우드 혼자서 제국이라는 버거운 짐을 감당해 오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도 모자랍니다. 좀 더 일찍 나섰어야 하는 것인데…….

“그래플이야말로 그런 말 말아요. 그래플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잖아요. 무엇보다 그래플이 그간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애써 줬는지 제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의심의 확신 전환 첫 사례는 마이바크 왕국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통신을 통해 그래플이 전해 온 소식대로였다.

마이바크 왕국이 로만 제국을 향해 선전포고 한 것이다.

이는 말로만 하는 단순한 엄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늘 아예 원정군의 출정식까지 끝마친 마이바크 왕국이었다.

“그보다 제국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3황자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평소 거만하기 짝이 없던 놈들답지 않게 굉장히 허둥대더군요. 아마 왕녀님께서 직접 보셨으면 실소를 금치 못하셨을 겁니다.

“어디 실소뿐이겠어요? 함박웃음도 모자랐을 거예요. 그래서 솔직히 좀 아쉬워요. 그 광경을 제 두 눈으로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선전포고의 명분 또한 확실했다.

로만 제국 비운의 3황자 프레드릭 대니얼 니바스 로만.

마이바크 왕국은 실종됐다 알려진 이 비운의 황자를 전면에 내세웠다.

과거 황제가 썬더 그라운드에서 꾸몄던 음모를 대외적으로 공개한 것이다.

북방 극지대에서 노가다 중이던 3황자를 데려와 공개석상에 세움으로써 반박의 여지마저 완벽하게 차단한 상태였다.

―앞으로 더 흐뭇한 광경들을 많이 보시게 될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테네시아 왕국은 언제쯤 출발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연락받기로는 닷새 후가 될 거라고 하네요. 편성이 마무리 단계라고 해요.”

비단 마이바크 왕국만이 아니었다.

테네시아 왕국 역시 동맹의 일원으로서 이 대열에 동참했다.

이들 또한 며칠 내로 제국을 향해 선전포고할 예정이었다.

마찬가지로 명분도 충분했다.

테네시아가 두 구의 시체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각 소드마스터 크루젠 벤투스 후작과 6서클 대마법사 스루지아넨 카이탄의 시체였다.

테네시아 내전 당시 제국이 꾸민 음모의 증거가 이 시체들에 담겨 있는 것이다.

당연히 테네시아 역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걸로 제국을 포위하는 그림이 완성됐군요. 그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그림인데, 왕녀님이나 라이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뇨. 이 그림, 누가 뭐라 해도 라이의 온전한 단독 작품이에요.”

이로써 제국을 사방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우선 제국 서부는 전쟁 시작 단계부터 슈라우드가 담당해 왔다.

그냥 담당하기만 하는 선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제국의 주력까지 완벽하게 서부에 묶어 둔 상태였다.

다음으로 북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라이오넬에 의해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형국에 마이바크 왕국과 테네시아 왕국이 가담했다.

두 왕국은 각각 제국 동부와 남부를 압박할 계획이었다.

제국의 주력이 묶여 있음을 고려하면 아예 찌르고 들어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니 그 말은 북동부에서 라이와 조우하거든 그래플이 직접 해 줘요. 제게는 그편이 더 큰 위로고 칭찬이니까.”

―알겠습니다, 왕녀님. 제국 땅 위에서 녀석과 회포를 풀면서 꼭 직접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레나나 그래플이나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들이 아니었다.

당연히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고자 했다.

마침 상황까지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마이바크 군이 동부에 도착할 시점이면 라이오넬 역시 북부에서의 일을 마칠 터.

그때 라이오넬이 동쪽으로 이동하면 제국 동부군을 싸 먹는 구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플이 제국 땅 위에서 라이오넬과 조우한다는 것은 이 구도를 일컬음이었다.

―그럼 카이친스크 요새에 도착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혹시라도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얘기해 주세요. 무운을 빌어요, 그래플.”

그렇게 그래플과의 통신이 종료되었다.

이 짧은 통신은 그 안에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북방의 악몽부터 사방 포위, 이로 인한 제국의 위기까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어려운 것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이 엄청난 것들이 실현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최종 목표의 달성까지 이제 정말 한 걸음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사네, 나로움 요새에서 올라온 보고는요?”

“마스터 급 실력자에 관한 것입니다. 정령 소드마스터인 즈타시 백작과 마로이브 백작이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둘이 라이 쪽으로 갔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그런 듯합니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이제는 실력자가 부족할 테니까요. 실력자를 원하는 대로 뚝딱 뽑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입니다. 정말 끝이 보입니다, 왕녀님.”

“그렇죠. 곧 끝이죠, 이제.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 거고요. 그 사람은요?”

언제나 이 마지막 한 걸음이 가장 위태로운 법이었다.

수많은 실패가 바로 이 한 걸음에서 비롯되고는 했다.

따라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특히나 제국이 보유한 한 인물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황제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는 상태라고 합니다.”

“흐음, 확실히 카오 때문에 황제 곁을 비우기는 어려울 테죠. 그래도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이제는 제국도 궁지에 몰렸으니만큼 어떤 수를 쓸지 모르니까.”

가이덴 드라이슬러 공작.

그랜드 소드마스터이자 명실공히 대륙 최강자로 손꼽히는 그의 존재가 문제였다.

그가 만약 라이오넬과 충돌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뒤바뀔지 몰랐다.

라이오넬을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확률은 믿음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뒤집힐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그랜드 소드마스터는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물론, 그에게도 제약은 있었다.

바로 황제 아이단이라는 제약이었다.

근위기사단장인 그는 황제의 안위를 책임져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함부로 황제의 곁을 비울 수가 없었다.

특히 카오라는 사기적인 이동수단이 크게 작용했다.

자칫 자리를 잘못 비웠다가는 제국의 심장을 내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저처럼 아예 궁을 비우고 모습을 감추는 경우의 수까지 고려해야 해요.”

“예, 왕녀님.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겠습니다.”

“사네 말마따나 이제 정말 마지막이에요. 이 마지막 한 걸음에 우리의 모든 게 달려 있고요. 부디 총력을 기울여 주세요.”

* * *

“난 귀족이다! 귀족에 대한 기본적인 도리를 지켜라!”

“귀족에 대한 기본 도리?”

“그래! 품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재물은 챙겨 갈 수 있게 해 주기를 요구하는 바이다. 그대도 귀족이면서 설마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로만 제국 북동부의 라이잔 자작령.

나는 현재 이곳에서 한 귀족을 무릎 꿇린 상태였다.

내 앞에 무릎 꿇은 이 귀족의 이름은 자우너 라이잔.

로만 제국의 자작이자 이 영지의 주인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라이잔 자작이라는 자가 나에게 요구를 해 오고 있었다.

자신을 귀족으로서 대우해 달라고, 자기 재산을 챙겨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귀족이라…….”

“아무리 가면으로 가려 봤자 소용없으니 발뺌할 생각하지 마라. 그대가 슈라우드의 라이오넬 라인하트라는 사실을 제국 귀족 중에 모르는 이가 없어.”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내 정체는 이미 제국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 지경쯤 되면 부정은 딱히 의미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난 당신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는데?”

물론, 처음부터 부정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대도 귀족이라면 당연히…….”

“당연한 건 없어. 특히 제국과 나 사이에는 더더욱.”

“하지만…….”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거든 입 다물고 조용히 가. 자꾸 시끄럽게 쫑알대면 그냥 가면을 벗어 버리고 싶어지니까.”

“무, 무슨?”

“내가 여기서 얼굴을 보이면 당신은 죽어. 당신 말대로 명색이 귀족인데, 나름 명예라는 걸 생각은 해 줘야 하니까. 어떻게, 내 정체를 그리 확신한다면 지금이라도 가면을 벗어 줘? 원한다면 얼마든지 확인시켜 줄 의향은 있는데.”

“헙……!”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젓는 자작이었다.

이제야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직시한 것이다.

그저 난민의 숫자를 늘리고자 살려 둔 것일 뿐, 이 자의 목숨을 보전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 귀찮게 할 시 죽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몸 성히 보내 줄 때 조용히 떠나. 괜히 험한 꼴 보지 말고.”

“…….”

“가.”

그렇게 자작의 입을 합죽이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영지에서 내쫓았다.

이제는 난민이 된 수천의 영지민을 그 뒤에 매단 채로.

…….

그리하여 라이잔 영지에 더 이상 주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주인을 잃은 텅 빈 성과 집, 그리고 주인이 아닌 것들뿐이었다.

일종의 시체라고 볼 수 있는 괴물들 말이다.

“그럼 시작해.”

“예, 주인님.”

그리고 시작되었다.

제국을 한창 혼란에 몰아넣고 있는 철거 작업이.

쿠궁! 콰광! 쿠과과광!

이 분야에 있어 노스페라투들은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명령에 절대복종하면서도 예티나 아이스 트롤 등 대형 몬스터의 힘은 그대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막 주인을 잃은 영지이니만큼 방해가 될 만한 것도 전무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효과적이고도 철저한 파괴 행위뿐.

그리하여 라이잔 영지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라이잔 영지만이 아니었다.

이미 황폐화된 북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제는 제국 동부까지 번져 가고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마이바크 왕국과 테네시아 왕국 덕분이었다.

그들이 각각 제국 동부군과 남부군을 묶어 버리면서 제국에 여력이 부족해진 것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어쩌면 제국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그런 기회.

나와 내 사람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하여 서부, 동부, 남부 세 방향에서 동시에 밀어붙이기로 입을 맞췄다.

이때 나는 동부 국경까지 밀고 나가며 그래플과 조우할 계획이었다.

그러고도 힘이 남는다면 타깃은 남부까지 확장될 예정이고 말이다.

콰르르르릉!!

이윽고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방금 그 엄청난 굉음이 마지막이었다.

이 굉음과 함께 마지막 남은 건물이었던 대장간까지 무너졌다.

하면 이제 다음 영지로 넘어갈 차례였다.

어차피 휴식도 필요 없는 상황이니만큼 뜸 들일 필요 없이 바로.

“……!”

하지만 나는 그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내릴 수가 없었다.

“주인님?”

“조용.”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너진 대장간.

그곳에서부터 나를 향해 가까워지는 어떤 발소리 때문이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여유로움으로 가득한 그런 발소리였다.

동시에 어떤 격이 느껴지는 발소리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가 검을 맞대 온 그 어떤 상대들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압도적인 격.

이런 여유와 격을 지닌 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절대적인 존재감과 함께.

“오랜만에 보는군, 라이오넬 라인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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