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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175화 (176/200)

107장: 북방의 악몽

“처음 봬요, 국왕 전하. 비아트릭스 셀레스티나 슈라우드 1왕녀라고 합니다. 물론 저에 대해 모르지는 않으시겠지요?”

“…….”

레나가 그녀의 앞에 앉은 한 사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나, 사내는 이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저 얼굴만 잔뜩 굳힌 채로 레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방금 질문에 대해서는 굳이 답하지 않으셔도 상관없답니다. 전하께서 지으시는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답변이 됐으니까요.”

그럼에도 레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인사야 요식 행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사 따위가 어찌 되든 주도권은 이미 레나가 쥐고 있었다.

감히 역전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말이다.

“대신 계속 이런 식이면 전하께서 많이 곤란해지실 거예요. 아시다시피 지금 전하께서 계시는 곳은 바이젠이 아닌 슈라우드니까요.”

사내의 정체는 바이젠의 코마누스 국왕이었다.

그는 바이젠 왕국 한복판에서 라이오넬에게 납치 아닌 납치를 당했다.

그리하여 현재는 슈라우드 왕국 한복판에 감금된 상태였다.

“……국왕인 나에게 범하는 이런 식의 무례는 대륙 차원의 공분을 사게 될 것이다, 왕녀.”

“어쩌면 그럴지도요. 그래서 저희도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었답니다. 정말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꺼내 들지 않으려고요.”

이 사건은 에펜시아 대륙에 시사하는 바가 엄청났다.

일단 사건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무려 일국의 국왕이 납치를 당했다.

그것도 백주대낮에, 자기 왕국의 중심부에서.

이는 대륙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대륙은 지금 거대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어떤 왕국이든 바이젠 왕국처럼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코마누스 국왕의 말마따나 대륙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전하께서 끝끝내 그 웬만한 경우를 만들어 내시더군요. 저희가 도저히 꺼내 들지 않을 수 없도록. 이만하면 다른 왕국들도 적당히 넘어가 주지 않을까요?”

“…….”

단, 여기에는 대륙의 평화라는 조건이 전제돼야만 했다.

만약 지금 대륙이 잠잠한 시기였다면 이 사건은 분명 공분을 불러일으켰을 터였다.

슈라우드가 다른 왕국들을 강제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대륙에 전화가 불어닥치는 와중이었다.

슈라우드에 대한 로만 제국의 일방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점차 번져 나가는 중인 것이다.

따라서 무슨 수를 꺼내 든다 해도 용납될 수 있는 시기였다.

질타든 공분이든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분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 상대가 바이젠이라면 더더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몰락의 기로에 선 슈라우드를 아예 묻어 버리고자 한 바이젠이었다.

이런 자들을 상대로 반칙 좀 쓴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리 만무했다.

설령 한다 해도 작금의 상황에서는 딱히 상관없었고 말이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저희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든 셈. 이대로 시시하게 묵혀 둘 수야 없는 노릇이랍니다.”

이로써 슈라우드는 그들의 막강한 전쟁억지력을 증명했다.

그리핀을 탄 라이오넬의 습격.

거의 그랜드 소드마스터에 버금가는 비대칭 전력이었다.

실제로 슈라우드 원정을 준비하던 각국에는 비상이 떨어졌다.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졌으며, 억지로 움직인다 해도 실력자들은 무조건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자연스레 원정군의 전력 또한 대폭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그 효율을 극대화시킬 생각이에요. 그러니 어디 한번 얘기해 보세요. 전하와 바이젠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서. 물론 그 방향은 저를 만족시키는 쪽이 돼야겠죠?”

나아가 그 이상을 뽑아낼 여지도 충분했다.

당장 눈앞의 코마누스 국왕이 그 시작이었다.

“……일단 선전포고를 물리겠다. 출병한 병력도 해산하고.”

“그리고요?”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하지.”

“얼마나?”

“얼마를 원하나?”

“잊지 마세요, 묻거나 통보하는 쪽은 언제나 저라는 걸.”

레나는 엄포했다.

코마누스 국왕 본인의 처지를 잊지 말라고.

“으음…….”

옅은 미소, 부드러운 목소리의 엄포였으나 그 효과는 확실했다.

레나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 마는 코마누스 국왕이었다.

“170만 골드면 어떻겠나? 그 정도면 지난번 일과 비교해서 적절한 수준이 아닐까 싶은데.”

이베리아 전쟁 당시 슈라우드가 바이젠으로부터 받아 낸 돈이 총 170만 골드였다.

이것은 전쟁 자체에 대한 배상금뿐 아니라 90명 여의 귀족, 그리고 왕세자의 몸값이 포함된 금액이었다.

코마누스 국왕은 이러한 전례를 기반으로 상황을 풀어 가고자 하는 것이다.

“흠, 170만 골드라. 일단 전하의 생각은 그렇다 치고, 그다음은요?”

“다음?”

“병력 해산과 보상금 지불, 이 두 가지 외에는 따로 생각해 두신 게 없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다.”

“그런 거라면 전하께서 지금 상황을 너무 가볍게 보고 계신 것 아닌가 싶네요. 거기에 최소한 영토 할양 정도는 염두에 두고 계실 줄 알았는데.”

“크흠.”

그러나 이번 일은 그때와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었다.

이베리아 영지 때와는 분명 차원이 달랐다.

한정된 국지전의 성격이던 당시와 달리, 이번에 바이젠이 일으키려던 전쟁은 전면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게다가 사로잡힌 포로의 가치는 더더욱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물론 왕세자도 비싼 몸값을 자랑한다지만, 감히 일국의 국왕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금액 또한 천정부지로 뛰는 것이 당연했다.

“일단 전하의 의중은 대강 알겠네요. 그리고, 좋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병력과 금전, 이 두 가지에 한정 짓도록 하죠.”

“……?”

“대신 그 방식과 수준은 제가 정합니다.”

하여 레나는 확실히 뽑아먹을 작정이었다.

이베리아 영지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과 수준으로.

“우선 금전. 보상금 그거, 깔끔하게 딱 10배만 더 내세요.”

“뭐? 10배?”

“네, 10배요. 1,700만 골드.”

전쟁 중인 슈라우드 입장에서 170만 골드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그 수 배를 가져다 부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돈 대신 영토를 할양받는 것도 마땅치 못했다.

당장은 할양받아 봤자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 덩어리가 될 가능성이 더 컸다.

그래서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레나는 깔끔하게 돈으로 정리코자 했다.

단, 그 액수 역시 코마누스 국왕의 예상을 깔끔하게 압도하는 수준으로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그게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하는 얘기인가?”

“모를 리가요. 당연히 안답니다, 대략 바이젠 왕국의 10년 치 예산 정도 되겠네요.”

“그런데도 그 금액을 요구한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안 될 건 없다고 봅니다만? 전하께서 무슨 짓을 저지르려 했는지 생각하셔야죠. 또, 지금 전하의 처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실 필요가 있고요.”

“아무리 그래도 10배는 너무 심하지 않나? 우리에게는 당장 그 돈을 지불할 능력도 없어.”

“몇 년 할부 정도는 참작해 드릴 수도 있겠네요.”

“할부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 돈이면 어차피 우리 왕국은 거지꼴을 면치 못해.”

코마누스 국왕은 아연실색했다.

그만큼 막대한 액수인 것이다.

이걸 다 갚으려다 보면 바이젠은 사실상 슈라우드의 속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젠의 국왕으로서는 수용이 절대 불가한 조건이었다.

“원인을 제공하신 분께서 참 안 되는 것도 많군요. 이걸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염치가 없다고 해야 할지.”

“…….”

“정 그러시다면 지불 방식에 있어 선택지 정도는 드리죠. 현금 대신 몸으로 때우는 것도 허용해 드리겠습니다.”

레나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여 약간의 편법을 마련해 주었다.

물론 피차 사정 고려해 줄 관계는 아니라지만, 상황관리 측면에서는 이편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몸으로 때워?”

“이번에 전하께서 우리를 치려고 소집한 5만 병력. 굳이 해산할 필요 없이 그들로 때우셔도 된다는 말씀이에요.”

당장 슈라우드에 절실한 것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돈과 병력.

레나는 이번 기회에 이 두 가지 모두를 해소할 참이었다.

“그들을 제국과의 국경에 배치하세요. 직접 쳐들어가라는 말은 안 할 테니, 그들로 제국의 동맹국들을 견제해 주시면 됩니다. 그 기간과 성과에 따라 최대 절반까지는 깎아 드릴 의향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결국 제국과 척을 지는…….”

“그건 우리와의 전쟁을 선택한 전하께서 감당할 몫이죠. 물론 싫으시다면 전부 돈으로 해결하셔도 상관없고요. 이것 역시 전하의 선택이랍니다.”

어차피 상황은 완벽히 레나의 통제하에 있었다.

또한, 코마누스 국왕이 그녀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이것이 뒤집힐 가능성도 전무했다.

즉, 전혀 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상대를 압박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자,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녀가 정해 둔 답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 * *

레나가 코마누스 국왕에게 선택을 강요하던 그 시각, 로만 제국 최북단의 나이폴리 성에서는 이번 전쟁에 관한 대화가 한창이었다.

특히, 최근 벌어진 나로움 요새의 대참사와 바이젠 국왕 납치 사건이 주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한 인물 역시도.

“한센, 이러다 우리 제국이 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뭔 소리야? 우리가 왜 져?”

“솔직히 이제는 걱정해야 할 때 아니야? 그 검은 악마 놈 때문에 그간 입은 피해가 어마어마하다고 하던데.”

검은 악마 라이오넬 라인하트.

로만이 제국의 그들의 유일한 대적자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그의 마수로 인해 제국이 입은 피해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전장과는 동떨어진 이곳 나이폴리 성의 일반 병사조차 그 수준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새벽 불침번이라 추워 죽겠는데, 헛소리 좀 늘어놓지 마. 우리 제국이 전쟁에서 지는 거 본 적 있어? 전투에서야 한두 번 질 수 있어도 결국 전쟁은 우리가 이겨.”

“물론 그렇기는 한데, 이번에는 좀 다르니까 그렇지. 너무 오래 질질 끌려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거,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라니까 그러네. 기사님들이 추가 파병됐다고 하잖아. 그분들이 도착해서 병력 재편하는 대로 금방 끝날 거야. 전쟁이 길어지면서 슈라우드 놈들은 아예 골골대고 있다는 소식 못 들었어?”

“그러려나?”

“무조건 그래. 뭣보다 우리한테는 드라이슬러 공작 각하께서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야? 검은 악마 놈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그랜드 소드마스터한테는 상대가 안 돼요, 상대가.”

하지만 복무 21년 차 고참 십인장 한센의 믿음은 굳건했다.

그의 마흔둘 평생 제국이 졌다는 소리는 개뿔만큼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에게 제국은 질 리도, 질 수도 없는 신앙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하긴, 우리는 로만 제국이니까.”

그만이 아니었다.

비록 검은 악마로 인해 잠깐 흔들릴 수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제국인들에게 제국은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언제나 승리를 보장해 주는 절대적인 자부심의 근원 말이다.

“거 잘 알면서 괜한 헛소리 늘어놓지 말고 화톳불이나 키워 봐. 달도 가려져서 그런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시린 것 같네.”

“그래, 장작 좀 더 가지고 올게.”

그리고 이 자부심 덕분이었다.

북방 극지대 인근에 위치한 이곳 나이폴리 성에서 한센과 그의 동료들이 한눈팔지 않고 새벽 보초를 설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자부심이 없었다면 화톳불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기나 했을 터였다.

“엉? 저게 뭐지?”

“뭐가?”

“저기 좀 봐 봐. 웬 루비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니는 거 같지 않아?”

“헛소리에 이어서 이번에는 헛것이냐? 루비라고는 제대로 구경해 본 적도 없을 놈이 뭔 루비 타령이야. 진짜 가지가지…… 어?”

마찬가지였다.

졸지 않고 열심히 근무를 섰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진짜네?”

먼저 발견한 동료의 말마따나 검붉은 루비 같은 것이었다.

다만, 진짜와는 달리 어딘가 심히 음침하고 요사스러워 보이는 그런 루비.

심지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족히 수백 개는 될 법한 루비들이 한센의 시야에 잡히고 있었다.

“어어……? 가까워져?”

단순히 보이기만 하는 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 음침하고 요사스러운 것들이 점차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제국 최북단을 수호하는 이곳 나이폴리 성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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