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장: 바이젠 왕국의 한복판에서
“흐흠~ 으흐흠~”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전하?”
바이젠 왕국의 국왕 자리아트너 코마누스 바이젠이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에 소드마스터이자 근위기사단장인 우미오 나지르 후작 또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술이라, 좋구려. 오늘 같은 날 술 한잔하지 않으면 또 언제 하겠소?”
“미리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좋소이다. 그럼 오늘은 후작도 같이 한잔하는 걸로 합시다.”
“하지만 전하, 신은…….”
“아아,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오늘은 우리 바이젠이 비상을 선포한 날이외다. 이런 날 후작과 한잔하지 않으면 누구와 한단 말이오? 그러니 잔말 말고 오늘만큼은 허리띠 풀 각오하시구려.”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코마누스 국왕의 말대로였다.
솔직히 오늘만큼은 나지르 후작도 한잔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30분 전 마무리된 바이젠의 출정식은 그만큼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좋소이다, 좋아. 후작도 제대로 느끼고 있구려, 지금 내 가슴이 얼마나 벅차고 터질 것 같은지.”
“전하를 늘 곁에서 모시는 신입니다.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역시 후작이오. 솔직히 나, 그동안 선대왕들의 어진 앞에서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소이다. 저 간악한 슈라우드 놈들에게 이베리아 영지를 강탈당한 뒤로는 단 하루도.”
“예, 전하께서는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상치도 못하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지 뭐요? 어디 복수뿐인가? 우리 바이젠이 대대손손 영화를 누리게 될 둘도 없는 기회이기까지 한데.”
바이젠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오랜 원수인 슈라우드를 철저히 짓밟을 기회였다.
단순히 짓밟는 데에서만 그치지도 않았다.
빼앗겼던 이베리아 영지는 물론이거니와 더 많은 땅을 획득해 올 수도 있었다.
잘만 하면 슈라우드라는 왕국 자체를 지워 버리는 것도 가능할 테고 말이다.
그리고 이는 곧 바이젠의 번영을 의미했다.
영토 확장에 이어 숙적의 몰락까지, 이보다 완벽한 번영의 조건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이번 원정으로 제국에 지우는 빚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따라서 국왕의 기분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 역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환궁하는 길 내내 함박웃음과 콧노래를 그치지 못하는 그였다.
찌릿.
“음?”
그때였다.
국왕과 함께 미소 짓던 나지르 후작의 기감에 걸려드는 것이 있었다.
“왜 그러시오, 후작?”
“전하, 잠시만.”
스아아~
그것은 머리 위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이었다.
적당히 한두 뼘 정도가 아닌 아득히 먼 하늘 위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어떤 감각.
“무슨……?”
이에 고개를 들어 올린 후작의 눈에 웬 점이 걸려들었다.
당연히 그냥 점은 아니었다.
소드마스터인 후작의 신경을 온통 사로잡을 만큼 강렬한 점이었다.
쐐애액~!
심지어 순식간에 확대되고 있었다.
즉, 눈부신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형체가 이제는 뚜렷이 구분될 정도로.
정확히 환궁하는 국왕 일행을 향해서.
“그리핀!”
그렇게 눈에 들어온 것의 정체는 한 몬스터였다.
현재 에펜시아 대륙 전체를 진동시키는 엄청난 위명의 몬스터.
그 저주스러운 것이 바이젠 왕국의 한복판에 떡하니 들이닥친 것이다.
“후, 후작…….”
“놈입니다!”
물론 이것이 혼자일 리 만무했다.
이베리아 평원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랬듯 제 주인과 함께였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놈이 왔습니다!”
그리핀의 주인이자 로만의 대적자,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가 이곳 바이젠 상공에 출현했다.
쐐애액!!
“전하를 보호하라!”
그 목적이야 뻔했다.
바이젠은 라이오넬을 둘도 없는 원수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일 터.
라이오넬 또한 바이젠을 원수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이곳 바이젠 상공, 코마누스 국왕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방금 막 슈라우드 원정군에 대한 출정식을 마친 이때에.
지이잉!
국왕이 위험했다.
정황상 라이오넬이 노릴 대상은 오직 국왕뿐이었다.
하여 후작이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근위기사단에게 국왕 보호를 명함과 동시에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 올렸다.
그가 직접 막아설 작정이었다.
“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라이오넬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들려오는 소문만으로 따지면 그랜드 소드마스터에도 필적할 지경이었다.
라이오넬에게는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업적들이 수두룩했다.
단, 그렇다고 해서 지레 겁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라이오넬이 강하다는 것은 그도 인정하나, 결과적으로 경지 자체는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하면, 결국 그 또한 후작과 같은 소드마스터.
정령력이라는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방어가 불가하지는 않을 터였다.
적어도 나지르 후작의 판단은 그러했다.
쿠구구구!
사정없이 짓눌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엄청난 압력이었다.
형용조차 어려운 엄청난 압력이 후작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크으…….”
소드마스터인 그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갑작스러우면서도 거대한 압력이었다.
나아가 이는 후작의 기민한 대응을 방해했다.
그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그리핀은 이미 지근거리에 다다른 상태였다.
지이잉!
라이오넬의 얼굴이 또렷하게 눈에 담겼다.
그가 뿜어내는 찬연한 오러 블레이드의 광채까지도.
그리고.
콰과과광!!!
충돌이 일었다.
아득한 상공에서부터 강하해 온 그리핀, 그 위에 타고 있는 라이오넬, 그런 라이오넬이 내뿜는 오러 블레이드와의 정면충돌이었다.
더구나 막대한 압력에 노출되기까지 한 상태로 말이다.
“크허억!!”
결과는 참담했다.
나지르 후작의 예측과는 단 한 치도 부합하지 않았다.
라이오넬의 힘은 후작의 예측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소드마스터인 그가 고작 일 합조차 버텨 내지 못할 정도인 것이다.
“쿨럭, 쿨럭.”
그렇게 후작은 속절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단순히 밀려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각혈까지 하고 마는 그였다.
“안 돼…….”
하나, 지금 이 순간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 문제에 비하면 후작의 각혈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고 봐도 무방했다.
바이젠 왕국의 운명이 걸린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막아! 놈이 내게 오지 못하도록 막으란 말이다!”
그것은 바로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었다.
코마누스 국왕에게로 향하는 길 말이다.
나지르 후작이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밀려나는 바람에 이 길이 뻥 뚫리고 말았다.
“몸을 던져서라도 막으라고!!”
물론, 완전히 텅 비어 있지는 않았다.
왕국의 근위기사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나지르 후작의 명에 따라 이들이 국왕을 두텁게 둘러싼 상태였다.
“도, 도망가십시오, 전하. 쿨럭, 쿨럭,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후작은 알고 있었다.
아니, 방금 일 합을 통해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저들로는 턱도 없다는 것을.
목숨을 던져 막아 내는 것도 그 차이가 어느 정도껏일 때의 이야기였다.
방금 후작이 마주한 라이오넬의 힘은 그 정도란 것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저 힘 앞에서라면 근위기사들에게는 장애물 취급조차 과분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길 위에 널리고 널린 자그마한 조약돌 정도랄까?
쿠구구구!
후작의 깨달음은 있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앞서 후작을 짓눌렀던 엄청난 압력이 기사들까지 찍어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커흑!!”
“버, 버틸 수가…….”
그래도 후작은 이것을 버텨 냈으며, 어찌어찌 검을 맞대 보기라도 할 수 있었다.
반면, 근위기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검을 맞대 보기는커녕 압력조차 견뎌 내지 못하는 그들이었다.
“뭐 하는 짓들이냐! 나를 지키란 말이다, 나를!!”
근위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그렇게 손 한 번 써 보지 못한 채 무력화되고 말았다.
하면, 이제 길 위에 남은 것은 단둘뿐이었다.
코마누스 국왕, 그리고 라이오넬.
이 둘 사이를 가로막을 무언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저놈을 막으라니까!!”
그래서인지 더는 날갯짓조차 하지 않았다.
라이오넬을 태운 그리핀은 두 발을 옮길 뿐이었다.
마치 무릎 꿇은 기사들의 경배를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일어나란 말이다! 제발 일어…….”
“코마누스 국왕?”
“아아…….”
지금 이 순간, 국왕의 명령과 호통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목적지에 다다른 라이오넬 앞에서 그것은 그저 힘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혹은 애처롭기 그지없는 허망한 발악이든가.
“갑시다.”
“나, 난…….”
“반항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본인한테 더 좋을 겁니다.”
“난 바이젠 왕국의 구, 국왕이다. 이런…… 식으로 날 겁박할 수는 없어.”
“무슨 뜻입니까?”
“난 일국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 나를 향한 이런 식의 날강도 짓거리는 대륙법상 결코 용납될 수 없어.”
“대륙법이라. 그런 게 힘 앞에서도 통용되는 건지 오늘 처음 알았군요.”
국왕이 들먹이는 대륙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이것에는 법이라는 이름조차 과분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한없이 쪼그라드는 미약한 관습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륙법을 따질 양반이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코마누스 국왕은 그런 것을 따질 입장도 못 됐다.
불과 30분 전에 슈라우드 침공을 명령하고 온 그였다.
이런 그가 라이오넬 앞에서 국왕에 대한 처우를 운운함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더 할 말 남았습니까?”
“그…….”
“아니면 그만 갑시다. 할 일이 태산이라 당신과 입씨름할 시간 같은 건 없어요.”
“아, 안 돼. 난 갈 수 없어.”
철푸덕.
“내가 당신을 국왕 대접 해 주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반항하면 다음은 없습니다.”
“안 돼. 안 된다고…….”
국왕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체면이고 뭐고 일단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부질없는 헛수고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스윽.
그리핀의 발이 국왕을 향해 뻗어 나갔다.
라이오넬의 엄포대로 더 이상의 국왕 대접은 없었다.
우우웅~
파지지직!
그러자 마지막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작동했다.
일국의 국왕이니만큼 값비싼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이다.
콰장창!!
어차피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지만.
아티팩트가 발현한 갖가지 방어 마법들이 단번에 깨져 나갔다.
“아, 안…….”
덕분에 그리핀의 발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목표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콰득.
“커흑!”
도달 뒤에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리핀의 발이 그대로 국왕을 움켜쥐었다.
당연히 국왕이니 뭐니 하는 신분 고려 같은 것은 전무했다.
예사 먹잇감 대하듯 사정없이 움켜쥘 뿐이었다.
“크으으…… 라이오넬!!”
지이잉!
이에 나지르 후작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지금은 이리 억지로 힘을 써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작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근위기사단장으로서 상황을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앗!
하여 안간힘을 다해 압력을 거슬렀다.
그러고는 라이오넬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가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국왕은 내줄 수 없다는 필사의 다짐으로.
스아악~
쿠과과광!!
문제는 현실이었다.
다짐은 그저 다짐일 뿐,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다짐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크르륵…….”
또다시 일 합 만에 튕겨 나오고 만 후작이었다.
더구나 단지 튕겨 나오는 데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내상마저 심각한 수준으로 도지고 말았다.
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끄륵, 라이…… 크르륵, 오넬…….”
펄럭~
그래서였다.
나지르 후작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핀이 다시금 날갯짓하는 모습을.
나아가 바이젠 왕국 한복판에서 바이젠의 국왕이 납치당하는 모습까지도.
“카오오오~!!”
승리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그리핀의 포효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