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장: 자르기(3)
그러나 상황은 이대로가 아니었다.
이대로일 수가 없었다.
톱니바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것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저거?”
“드워프 철포?”
“철포 맞아? 너무 큰데……?”
그것은 기다란 원통 형태의 물건이었다.
마치 드워프의 철포를 연상시키는 모양이랄까?
다만, 그 크기가 달랐다.
드워프들의 일반적인 철포보다 족히 몇 배는 더 컸다.
또한, 그 사용 방식에 차이가 있어 보였다.
보통의 철포는 드워프들이 개인적으로 휴대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지금 등장한 철포는 받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땅에서 솟아오른 철벽, 그리고 성문 인근의 성벽이 바로 그 받침대였다.
“저것들 지금 전부 우리 쪽으로…….”
마지막으로 그 숫자 역시 적지 않았다.
족히 수십 문에 달하는 철포들이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마침 딱 외성 문 앞에 옹기종기 뭉쳐 있는 제국군을 향해서.
나아가 장전조차 필요 없었다.
등장과 동시에 이미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상태였으니까.
즉, 강력한 십자 포화의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셈이었다.
“방포!”
하면 굳이 뜸 들일 이유 또한 없었다.
하나로 연결된 방아쇠를 당겨 줄 단 한 마디, ‘방포’라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렇게 명령이 하달됐고.
콰광! 콰광! 콰광! 콰과과과광!
이와 함께 거대 철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하늘이라도 두 쪽 내 버릴 듯한 굉음을 쏟아 내며.
제국군의 비명조차 깡그리 묻어 버리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쿠우우우~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뿌연 폭연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광경을 눈에 담는 이라면 누구든 짐작 가능할 터였다.
지금 저 폭연 속에 끔찍한 아수라 지옥도가 펼쳐져 있으리라는 사실을.
“후우, 설명을 미리 들었는데도 적응이 안 되는군.”
이를 보며 지크프리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지 않고는 현실감이 쉬이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부하들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입만 쩍 벌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것들아 정신 차려.”
“아아…….”
“그냥 굿만 보고 말 거 아니면 얼른 정신 차리는 게 좋을 텐데? 떡도 챙기러 가야 할 거 아니야?”
“아…… 아! 다, 단장, 저게 대체……?”
“이번 작전의 비밀 병기라고 하더라. 드워프의 철포를 공성용으로 개조했다고 하는데, 세세한 거야 어차피 나도 모르니 묻지 말고.”
“아까 그냥 멋모르고 쫓아갔으면…….”
“뭘 물어? 저 안에서 갈가리 찢겨 나갔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저 안에 제국 놈들만 들어 있다는 거다. 물론 걸레짝이 되어 있으리라는 건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테고.”
지크프리트는 그런 부하들의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고는 일깨워 주었다.
지금 그들이 어떤 시간을 앞두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용병단으로서 할 일은 좀 전에 끝났다. 지금부터는 사냥꾼이 될 시간이야. 그물에 걸린 제국 놈들, 특히 재수 없는 기사 놈들을 싹 다 쓸어 담을 그런 시간.”
로만 제국의 콧대 높은 기사들이 죄다 걸레짝이 된 상황이었다.
뜨겁고 화려했던 한판 굿이 성황리에 마무리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굿을 다 봤으니 이제 떡을 집어 먹으러 가는 것.
아니, 집어 먹는 게 아니었다.
입속에 와구와구 쓸어 담는 것이었다.
“가라. 가서 뼈째로 씹어 먹어 버려.”
그렇게 펼쳐졌다.
나로움 요새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제국군에 대한 대학살극이.
* * *
“시체는 전부 태워야 하니 구덩이에 모아 둬.”
“기사들 무구는 하나도 버리면 안 돼. 빼먹지 말고 전부 벗겨 내.”
“뺑끼 치지 말고 빨리빨리 하자. 오늘만큼은 총사령관님께서 술을 허락해 주셨으니까, 얼른 마무리 짓고 가서 한잔해야지.”
포연이 걷히고 난 뒤 드러난 모습은 모두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제국군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특히 포화가 집중된 기사들 쪽은 그 처참함이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다음 상황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한 묘사가 필요 없었다.
그냥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포연이 걷힌 직후 달려든 슈라우드 군에 의해 제국군은 무참히 썰려 나갔다.
당연히 전투 결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론의 여지조차 없는 슈라우드의 대승이었다.
“리브나로 백작성과 누바크 백작성의 상황은 어떻다고 합니까?”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전투가 마무리됐다고 하는군. 어차피 제국도 이번에는 여기에 잔뜩 힘을 실은 상태였지 않나?”
“다행이군요. 하면 당분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이번 타격은 절대 가볍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전투가 끝난 뒤, 뒷정리가 한창인 전장을 보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르코스 후작과 그래플 스트라우스.
각각 슈라우드 군의 총사령관과 오늘 전투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설계자인 그래플의 말대로였다.
오늘 전투의 결과는 제국에게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간이 뚝 하니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8,000이었다.
사실상 기사들이 궤멸당한 것이다.
이 말인즉슨 제국군의 중간 지휘계통이 붕괴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정말 고맙네. 자네 덕분에 제국 놈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었어.”
“그게 어디 제 덕분이겠습니까? 저는 가만히 서서 입만 놀렸을 뿐, 실제 공은 전부 드워프들이 세웠지요.”
오늘 전투의 키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드워프.
사실상 드워프들이 전부 다 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그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우선 제국군을 뚝 갈라 놓은 철벽부터가 그들의 작품이었다.
제국군은 이 철벽의 등장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 고립되고 말았다.
더욱이 이는 잠깐에 그치지도 않았다.
철벽은 밖에서 가해지는 오러 블레이드의 충격마저 일정 수준까지 버텨 냈다.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고립 상황이 펼쳐질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나아가 이렇게 마련된 시간의 활용 측면 또한 그러했다.
이 부분에서도 드워프들의 공이 지대했다.
개량된 거대 철포 역시 그들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철포들의 십자 포화가 뭉쳐 있던 제국군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충돌 전부터 처참하게 찢긴 이들이 슈라우드의 돌격에 대응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말이다.
덕분에 상황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철벽이 채 뚫리기도 전에 전투가 끝난 것이다.
“또, 그간 제국에 깊은 트라우마를 심어 준 라이오넬 덕분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두 번째는 라이오넬이었다.
제국군 사이에는 라이오넬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가 심어진 상태였다.
어찌나 깊은지 고작 녹음된 포효만으로도 줄행랑을 쳐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일반 병사나 기사도 아닌 마스터 급 실력자들이.
따라서 오늘 작전의 베이스는 어디까지나 라이오넬에게 있었다고 봐야 했다.
제국군에게 심어진 그에 대한 공포가 모든 전략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둘이 친구 아니랄까 봐 라이 경처럼 겸손이나 떨기는. 오늘 승리에 드워프나 라이오넬 못지않게 자네 공이 지대하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알아. 그러니 흰소리 말고 내 감사 인사나 받게.”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야……. 어찌 됐든 앞으로 제국이 군을 수습하는 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중간 지휘계통이 완전히 무너진 셈이니까요.”
“그렇겠지. 이제 우리는 내부를 정비하면서 라이 경이 들고 올 좋은 소식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고.”
다만, 이 포인트에는 특이점 또한 존재했다.
그것은 왜 굳이 이런 수고를 감수하느냐는 점이었다.
지크프리트를 포함하여 소드마스터가 셋이나 추가된 상황이었다.
이런 조건하에서 최고의 전략은 제국군 전체에 타격을 주는 것일 터였다.
기사들만 따로 잘라 내는 것이 아니라 요새 앞에 진 치고 있는 18만 제국군 전체에 말이다.
라이오넬의 힘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슈라우드는 그러지 않았다.
최고의 전략을 놔두고 굳이 수고로운 길을 선택했다.
왜?
그러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러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 라이오넬이 없었으니까.
라이오넬은 제국군을 끌어들이고자 모습을 숨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자리를 비웠다.
심지어 슈라우드 밖으로 아예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자연스레 오늘의 선택 역시 여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넬이 자리를 비운 동안 버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쪽으로.
“라이라면 반드시 가져다줄 겁니다. 늘 그랬듯 모두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요.”
다행히 노림수는 완벽하게 통했고, 원하는 만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라이오넬의 활약.
그가 이 시간의 방점을 찍는 것 말이다.
* * *
“슈라우드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 땅을 자기들 것이라 주장해 온 간악무도한 놈들이다. 얼마 전에는 그것을 아예 도적질까지 해 갔고 말이다.”
바이젠 왕국의 왕도 인근 모렐로 지역.
평야로 이루어진 이 지역에는 지금 병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상태였다.
대충 잡아도 족히 5만은 될 법한 대규모 병력이었다.
그리고 이런 병사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지금도 보라. 대륙의 평화수호자인 로만 제국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전쟁까지 벌이고 있지 않은가? 저 흉악한 슈라우드 놈들이야말로 이 대륙의 공적으로 규정짓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자리아트너 코마누스 바이젠.
바이젠 왕국의 현 지존, 즉 국왕이었다.
그가 5만의 병력 앞에서 작금의 상황 및 슈라우드에 대한 성토를 이어 가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바이젠에게 기회가 왔다. 대륙의 평화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지난 수십 년의 원한을 청산할 기회, 나아가 잃어버린 우리 땅을 되찾아 올 기회가.”
그 이유야 간단했다.
슈라우드 침공의 서막을 여는 것.
즉, 슈라우드로 향하게 될 바이젠 군대의 출정식을 마치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출정식 마지막 순서로써 사기를 북돋기 위한 국왕의 연설이 한창인 와중이고 말이다.
“우리 바이젠에게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다. 그러니 가서 놈들의 땅을 마음껏 짓밟고 유린하라. 그 더러운 종자들을 내키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라. 앞으로 제군들이 행하게 될 모든 것은 평화수호의 이름으로 찬양받을지니, 단 한 치의 망설임도 품지 말지어다.”
바이젠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수십 년간 슈라우드와 이베리아 영지를 두고 싸워 온 바이젠이었다.
더구나 9년 전에는 이 영지를 완전히 빼앗기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 원한이 가벼울 리 만무했다.
철천지원수라 해도 모자람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한데, 그런 슈라우드가 지금 핀치에 몰려 있었다.
비록 제국의 힘 앞에 예상외로 선전 중이라고는 하나, 어차피 그래 봤자였다.
슈라우드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만 흐르더라도 슈라우드의 쇠락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코마누스 국왕에게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슈라우드였다.
점진적인 쇠락 정도로는 불타오르는 그의 적개심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슈라우드의 급속하고도 완전한 몰락뿐이었다.
하여 각이 잡히자마자 지체 없이 병력을 소집한 그였다.
그러고는 일사천리로 출정식까지 마쳐 버렸다.
“가라, 바이젠의 용사들이여. 이 나라의 국왕인 나, 자리아트너 코마누스 바이젠이 기다리고 있겠노라. 역전의 용사들인 그대들이 전해 올 찬란한 승전보를.”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였다.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원정을 통해 바이젠은 비상할 것이며, 나아가 찬란한 미래를 보장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흐름대로라면 분명 그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아아아~
다만 지금 이 순간, 안타깝게도 코마누스 국왕이 모르는 한 가지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어둠이었다.
이 흐름은 물론이거니와, 바이젠의 미래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음흉하고도 탐욕스러운 어둠.
그런 어둠이 현재 그와 바이젠의 머리 위로 짙게 드리워진 상태라는 것을 코마누스 국왕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