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장: 자르기
“이곳 나로움 요새를 중심으로 펼칠 전략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겁니다. 저들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시간을요. 지난 준비는 전부 이를 위한 것들이며, 모두가 맡은 바 역할을…….”
용병왕 지크프리트는 현재 어떤 회의에 참석한 상태였다.
한데 이 회의가 펼쳐지는 장소와 내용 모두 그와는 딱히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곳은 일단 지크프리트 용병단이 자리 잡은 대륙 중남부의 자유도시 트로니클이 아니었다.
대륙 북부에 위치한 슈라우드 왕국의 나로움 요새라는 곳이었다.
또한, 지금 들려오는 내용도 용병단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였다.
나로움 요새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쟁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달 전 어떤 방문을 계기로 오늘 이 회의는 그와 깊은 연관을 지니게 되었다.
무려 15년 만에 얼굴을 보게 된 친구 놈의 방문이었다.
친구보다는 웬수라 불려 마땅한 그놈, 브로든 프라우닉스의 방문 말이다.
결국, 지크프리트는 브로든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순수한 지크프리트 본인의 의지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브로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느 오라비가 제 동생 버리고 간 놈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다만, 이 결정에는 지크프리트의 의지가 딱히 중요치 않았다.
그가 아무리 지크프리트 용병단의 단장이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의 동생인 이안나가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용병단의 시작부터 실질적인 경영과 관리를 맡아 온 그녀였다.
그리하여 용병단을 대륙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그녀이기도 했다.
그런 이안나가 내린 결정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물론이거니와 용병단 내 그 누구도 토를 달 리 만무했다.
물론 이것이 맨입일 리 또한 없었다.
이안나는 슈라우드로부터 여러 가지 이득을 약속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특별한 조건까지 하나 걸어 두었다.
브로든 개인에게 부과된 아주 특별한 조건이었다.
현재 브로든은 트로니클에 남아 한창 이 조건을 이행 중이고 말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지크프리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 됐든 이안나가 직접 손을 쓴 이상 아주 볼 만하리라는 것을.
“……특히 중요한 것은 보안입니다. 두 번은 사용할 수 없는 일회성 전략이니까요. 그러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외에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 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유로 참여하게 된 전쟁이었다.
나아가 만약을 대비하여 참관한 전략회의이기도 했다.
혹여 그의 용병단이 희생양으로 내던져지는 일은 방지해야 했으니까.
그런 만큼 참관자이되 비관적인 시선을 견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의 지크프리트였다.
끄덕끄덕.
한데, 지크프리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이 회의,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일단 구성이 특이했다.
여기에는 지금 슈라우드 군의 최고위 수뇌부들만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인원은 기껏해야 지크프리트 본인까지 포함하여 6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말을 이어 가는 한 사람이 회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작업 일정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바르코스 후작 각하?”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소이다. 앤비르 스미스 족장이 호언장담했으니까.”
“다행이군요. 그럼 계획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정체가 불분명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조차 복면을 벗지 않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함이 풀풀 풍겨 나오는 차림인 것이다.
끄덕끄덕.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수뇌부의 반응도 지크프리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최고 사령관 바르코스 후작을 제외하면 나머지 역시 정체를 모르는 듯함에도 말이다.
오히려 제3자인 지크프리트보다도 이 상황에 의문을 품지 않는 모습이랄까?
“비록 제 입장이 여기 계신 분들과 다르다 하나, 라이 그 친구의 일인 이상 마음만큼은 다르지 않다고 자신합니다. 또, 제국은 제 적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러니 끝까지 믿고 따라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시오. 그대가 라이 경의 벗인 이상 우리 믿음이 흔들릴 일은 없소이다.”
이에 대해 바르코스 후작으로부터 지크프리트가 전해 들은 답은 간단명료했다.
그것은 바로 슈라우드의 수호신이자 로만의 대적자, 라이오넬 라인하트였다.
저 복면인이 라이오넬 라인하트의 사람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모두가 수긍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외부인인 지크프리트로서는 이해가 어려운 이유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대의 전략이 지금 우리 상황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한 바이기도 하고. 지크프리트 공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혹시 이의나 의문 있으시오?”
“없소. 퍽 재미있군.”
그렇다고 지크프리트가 이걸로 꼬투리를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의 용병단에 피해가 가는 전략만 아니라면 잡을 이유가 없었다.
또, 지크프리트 역시 재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설명대로만 된다면 그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제국에 한 방 먹일 수 있을 듯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각 군단별 세부 배치와 움직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스터 군단과 클레드 군단은 중앙 본대에서…….”
15년 만에 찾아온 뻔뻔한 브로든의 간청으로 시작된 의뢰였다.
솔직히 지크프리트로서는 그리 탐탁지 않은, 그저 여동생을 위해 마지못해 맡는 의뢰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어쩌면 그의 여동생뿐만 아니라 용병단 차원에서 커다란 기회를 잡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이번 전쟁에 대한 용병왕 지크프리트의 몰입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복면인의 설명에 저도 모르게 점점 더 빠져들어 가는 방향으로 말이다.
* * *
지크프리트와 용병단이 나로움 요새에 도착한 지도 벌써 한 달 보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 시간 동안 하루가 멀다고 전투가 이어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지크프리트 용병단은 오늘도 쉬지 않고 제국군과의 전투를 펼치는 중이었다.
“밀어붙여라! 빌어먹을 슈라우드 놈들 씨를 말려 버릴 기회다!”
“오늘 저녁만큼은 나로움 요새에서 먹는다, 반드시!”
“밀어붙여!!”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투의 위치.
평소 지크프리트와 그의 용병단은 나로움 요새 성벽 위에서 검을 휘둘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이 속한 슈라우드 진영은 나로움 요새에서 수성을 펼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오늘만큼은 이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
성벽 위가 아니었다.
성벽의 아래, 즉 지상이었다.
그것도 그냥 지상이 아닌 내성과 외성 사이에 위치한 지상.
즉, 나로움 요새의 외성이 제국군에게 뚫리고 만 것이다.
“오늘도 라이오넬 라인하트는 오지 않는다!”
“겁먹지 마라! 그 비겁한 겁쟁이 놈은 우리가 무서워서 왕녀 치마폭에 대가리 처박고 숨어버렸으니까!”
굳건하게 버텨 오던 성이 뚫린 이유는 간단했다.
최고 전력의 부재, 즉 라이오넬이 부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한 달 반 동안 나로움 요새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단 나로움 요새만이 아니었다.
누바크 백작성과 리브나로 백작성, 나아가 슈라우드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도 무려 한 달 반이나.
사실상 홀로 슈라우드를 지탱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라이오넬이었다.
따라서 그의 부재는 슈라우드에 엄청난 전력 누수를 초래했다.
지금 이렇듯 뚫려 버린 나로움 요새의 외성이 그 방증이었다.
물론 제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 상황을 덥석 물지는 않았다.
그들이 바보도 아닐진대 무슨 함정이 아닐지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 덕에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셈이었다.
만약 제국이 의심하지 않았다면 외성이 뚫린 날은 족히 한 달은 더 일렀을 터.
다만, 이 시간이 계속될 수는 없었다.
제국도 백방으로 알아보았을 테고,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 결론이란 제국군이 외성을 뚫고 들어온 작금의 순간이고 말이다.
“크으……. 역시 제국 기사 놈들이 한가락 하기는 합니다, 단장.”
“그러게, 성벽 없이 막으려니까 좀 빡센데요?”
지크프리트의 수하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각각 용병왕의 왼팔과 오른팔로 불리는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힘에 부쳐 할 만큼 지금의 전황은 좋지 못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 괜히 제국 기사 놈들 맞상대하다 우리 애들만 다친다.”
제국의 기사들 때문이었다.
뚫려 버린 외성 문으로 제국의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규모 병력 투입 전 소수 정예로 공간을 확보코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제국 기사들의 힘은 확실히 강력했다.
지크프리트 용병단의 1급 용병들은 물론이거니와 슈라우드의 기사들 역시 버티지 못한 채 물러나기만 할 뿐이었다.
더구나 그 숫자까지 기사만 물경 8천에 달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밀어붙이는 기사들의 뒤편으로 제국군의 병력이 진입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그러게 왜 애먼 데 뛰어든 것인가, 용병왕?”
그때, 물러나던 지크프리트를 불러 세우는 이가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무구들로 무장한 한 고위 기사였다.
“용병이 뭐 별거 있겠소, 치라드 백작? 그냥 돈 따라온 거지.”
지크프리트도 아는 인물이었다.
기사의 이름은 아마키데스 치라드.
로만 제국의 백작이자 소드마스터로, 과거 제국의 의뢰를 수행하던 지크프리트와 안면을 튼 바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그대와 그대의 용병단은 사리가 밝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로 그런 편이기는 하오.”
“그런데도 곧 망해 없어질 슈라우드 편에 선다고? 잔금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겠나?”
“하긴, 누가 봐도 이게 미친 짓이기는 하지. 하지만 어쩌겠소? 바보 같은 동생을 둔 오라비가 치러야 할 숙명인 것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굳이 알 필요 없소. 그리고 솔직히 슈라우드가 진짜 망해 없어지리라는 생각도 딱히 들지 않고.”
“지금 저 상황을 직접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혹 눈이 멀어 버린 것인가?”
치라드의 말대로였다.
현재 지크프리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전황은 심히 암울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에서 밀리던 슈라우드 군이 외성이라는 보호막까지 잃고 말았다.
하면 남은 것은 내성뿐인데, 내성으로 몰린다는 것은 사실상 옥쇄나 다름없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상 나로움 요새는 끝이라고 봐도 좋았다.
슈라우드의 미래 역시 나로움 요새와 운명을 같이할 테고 말이다.
그나마 남은 방법이라면 마스터 급 실력자들이 힘을 써 주는 것뿐이었다.
하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마스터들의 처지 역시 주변 상황과 비슷했다.
지속적으로 밀려나기만 하는 중이었다.
마스터 전력 역시 제국에 비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제국 측에는 정령 소드마스터만 다섯에 6서클 대마법사 하나까지 존재했다.
이 중 둘을 하이엘프가, 나머지 하나씩을 지크프리트 포함 세 명의 소드마스터가 마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꺼먼 검을 든 창백한 여자 하나가 6서클 대마법사를 담당하는 중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슈라우드가 나름 선방한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하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세 명의 소드마스터가 모두 정령력 없는 일반 소드마스터였다.
이로 인해 셋 모두 제국 측 마스터들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대치 구도로는 일방적으로 밀려나며 억지로 버티는 것 이상은 불가한 것이다.
“어차피 라이오넬 라인하트가 오면 단번에 뒤집힐 전황이니까. 지금까지 제국이 늘 당해 온 패턴 그대로.”
“하, 그대 눈으로 직접 그자를 보기는 했고? 그대가 여기 오기 전부터 종적을 감춘 것으로 아는데?”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기는 하지. 뭐, 어찌 됐든 난 여전히 슈라우드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오.”
“쯧, 그래도 과거의 연이 있어 한 번쯤 자비를 베풀어 줄까 했건만, 어쩔 수 없군. 그냥 이대로 멍청함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는 수밖에.”
지이잉!
물론 지크프리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눈앞의 적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지난 한 달 반의 시간 동안 여러 차례 부딪쳐 본 만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스윽.
그럼에도 이 사실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그였다.
대신 내성 쪽을 스윽 한번 흘깃했다.
의미심장한 모종의 눈빛을 담은 채로.
지이잉!
“얼마든지.”
그리고 대꾸했다.
대가를 치를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강한 확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