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장: 교수님의 과거(2)
브로든이 용병왕 지크프리트에게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때로부터 한 달 전, 슈라우드 왕도 내 모처.
귀족은커녕 여느 평민의 집이라 해도 믿을 법한 장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인물의 정체는 고귀한 왕족이자 현 슈라우드 계승 서열 1위의 왕녀, 바로 레나였다.
그리고 이런 레나의 맞은편에는 브로든이 함께였다.
두 사람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모종의 대화를 나누는 중인 것이다.
“가면 저 죽을지도 모릅니다, 왕녀님.”
“설마 용병왕이 브로든을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부탁하는 중이었다.
레나가 브로든에게, 용병왕에 대한 설득을.
“브로든이 술만 먹으면 무용담처럼 얘기했잖아요. 용병왕을 어떻게 만나서, 얼마나 깊은 우정을 쌓았고, 지크프리트 용병단을 어떤 식으로 키워 냈는지까지, 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으음…….”
레나의 말대로였다.
브로든은 용병왕 지크프리트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용병단을 함께 키운 동지이며, 나아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크프리트가 태생부터 용병왕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은 밑바닥 중의 밑바닥부터였다.
아무런 연줄도 배경도 없이 그저 스스로의 재능과 능력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할 리 만무했다.
용병왕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지크프리트와 용병단의 눈부신 성장세를 아니꼽게 보는 세력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무수히 많은 고난과 역경, 죽음의 위기들이 펼쳐졌다.
이 모든 것들을 끝내 극복해 냄으로써 그 자리에 오른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 지옥과도 같은 길을 지크프리트와 함께 헤쳐 온 이가 바로 브로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소년 가장 역할을 해 오던 브로든에게는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용병계에 뛰어들었으며, 가족 부양을 위해 위험한 임무 역시 마다하지 않았다.
한데, 마침 이 타이밍이 지크프리트 또한 물불 가리지 않던 때와 맞물렸다.
그와 용병단이 막 가파른 성장세에 접어들려 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맞물림이 인연이 되었다.
적대 세력의 함정에 빠져 전멸 위기에 몰린 지크프리트와 용병단을 브로든이 구해 준 것이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최고의 동료이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나아가 지크프리트 용병단을 정상에 우뚝 세우기까지의 모든 길을 함께했고 말이다.
“……최소한 죽기 일보 직전까지는 얻어터질 겁니다.”
그럼에도 브로든에게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언가 깊은 사연의 존재가 분명해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미안해요, 브로든. 하지만 머지않아 제국이 동맹국들을 끌어들일 테고, 그리되면 우리만의 힘으로는 버티기가 어려워져요. 그래서 지원군이 하나라도 절실한 상황이고요.”
하나, 이 또한 레나의 말대로였다.
슈라우드 왕국은 지금 백척간두의 절벽 위에 서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살짝이라도 삐끗했다가는 나라 전체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 터.
당장 현재 두 사람이 위치한 장소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제국과의 전쟁 시작 후 왕녀가 몸을 숨기고 있는 안가 중 하나였다.
제국의 암살을 피하고자 이런 허름한 곳에 후계자인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제국의 위협은 현실적이었으며, 왕국의 사정 또한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슈라우드에게는 손을 잡고 지탱해 줄 동지가 한 명이라도 절박한 상황이었다.
“부탁할게요, 브로든. 망설이는 걸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브로든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으으음…….”
“그리고 이건 왕녀로서가 아니라 브로든의 술친구로서 하는 진심 어린 조언이기도 하고요.”
“예?”
“언제까지 이렇게 피하기만 할 거예요? 솔직히 지금 브로든이 망설이는 게 용병왕 때문만은 아니잖아요. 그는 부수적인 이유나 핑계에 불과하다는 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귀에 딱지가 앉은 제가 모르겠어요?”
다만, 레나의 부탁이 꼭 왕국의 절박한 사정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브로든이 취할 때마다 수도 없이 읊어 대던 그의 과거.
그때마다 레나가 청승 좀 그만 떨라고 핀잔 놓던 그놈의 과거 또한 왕국의 사정 못지않게 중요했다.
아니, 브로든 개인으로만 국한한다면 오히려 이것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건…….”
“벌써 15년도 넘게 흘렀어요. 그만큼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살았으면 충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제 혼자 청승 그만 떨고 정면으로 마주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더 이상 피하지 말고 남자답게.”
* * *
여기까지였다.
한 달 전 대화에 대한 브로든의 주마등과도 같았던 회상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그를 향해 폭사 되는 살기 어린 분노 때문이었다.
“너라는 새끼 때문에 우리 이안나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알기나 하나?”
화아악!
“크읍!”
주륵주륵.
분노는 피를 불렀다.
소드마스터의 기세를 견디지 못한 브로든의 입과 코가 쏟아 내는 피였다.
“하긴, 알 턱이 없지. 여리디여린 내 동생이 그 상처 때문에 어떤 세월을 보내왔는지, 지 여자나 버리는 쓰레기에게는 관심 밖일 테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에도 마찬가지였다.
브로든은 어떠한 저항의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엄습하는 분노와 기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무거운 죄책감을 한가득 짊어진 채로.
“아니다? 설마 이안나를 쭉 신경 써 왔다, 뭐 이런 얘기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래……, 그랬어.”
지크프리트가 언급한 이안나라는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 지크프리트의 살기보다도 훨씬 더 무겁게 브로든을 짓누르고 있었다.
“항상 생각해 왔어. 술친구가 제발 청승 좀 그만 떨라고 할 만큼.”
이안나는 지크프리트의 친동생이었다.
브로든이 지크프리트와 용병단을 함정에서 구하던 그 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즉, 이안나 역시 브로든에게 목숨의 구함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그녀가 브로든이라는 사내에게 푹 빠져 버린 것은.
브로든 역시 자신을 사랑해 주는 그녀를 좋아했고 말이다.
“그 개소리를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15년간 이안나 앞에 코빼기는커녕 편지 한 통 보낸 적 없는 네놈 말을?”
“사실이야. 단지…….”
“단지! 아직도 그놈의 단지인 것이냐? 네놈의 그 X 같은 말 때문에 내 동생이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왔는데!”
단지, 당시는 이 감정이 브로든에게 그리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브로든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나날을 바꿀 만큼은 되지 못한 것이다.
“역시 사람 새끼는 변하질 않는구나. 누구도 책임지기 싫다는 그 더러운 습성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대로야.”
과거의 브로든은 책임이라는 굴레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소년 가장으로서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책임 등 어린 시절부터 지고 있던 것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부담이나 책임을 극도로 꺼리는 성향이 되었다.
이안나를 두고 떠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에게는 더 이상 타인을 책임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안나에 대한 마음 또한 그의 내면에서 이 타인이라는 범주를 깰 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 힘이 필요하다고? 좋아. 네놈이 나와 이안나를 구해 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니, 한 번 고려는 해 보마.”
둘도 없는 친구였던 지크프리트 또한 브로든의 이런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터였다.
떠나간 브로든을 15년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그가 오늘은 이처럼 분노를 금치 못하는 것은.
성향을 알았기에 보내 주었건만, 기껏 떠나서는 아예 한 왕국을 짊어진 채로 돌아왔으니까.
여자도, 친구도, 용병단도 전부 버리고 도망쳤던 놈이 말이다.
“단,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내놔야 한다. 그걸로라도 우리 이안나의 버려진 지난 세월을 조금이라도 달래 봐야겠으니까.”
저벅저벅.
결국, 지크프리트의 분노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가 기세를 넘어 직접 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한층 더 짙어진 살기를 품은 채 똑바로 브로든을 향해서.
“할 말 있나?”
우우웅~
이내 브로든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유언 같은 것을 묻는 그였다.
“……미안했어, 특히 이안나에게만큼은 정말로.”
“이 개새끼가 이제 와서!”
후아악~!
끝내 변명조차 하지 않는 마지막 한마디가 지크프리트의 분노를 더 돋운 모양이었다.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살인 병기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정도로 끔찍한 위력의 주먹을.
이에 브로든은 눈을 감았다.
저항할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맞아 죽어야 한다면 그냥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덜컥.
“그만!”
우뚝.
그때였다.
단장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모든 상황을 중단시켰다.
고작 그만이라는 단 한 마디로 용병왕의 주먹을 중도에 멈춰 세운 것이다.
“그만둬, 오빠.”
대륙에서 오직 한 사람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안나.
지크프리트의 동생이자 브로든의 연인이기도 했었던 바로 그녀 말이다.
“네가 여긴 어떻게? 자이라 지부로 출장 갔었잖아?”
“용병단을 총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잊었어? 오빠가 아무리 숨기려 해 봤자, 어차피 내 귀에는 들어오게 돼 있어.”
“으음, 숨겼다기보다는 그냥 네가 좀 충격을 받지 않을까 해서…….”
“됐어. 어떤 이유가 됐든 지금은 상관없으니까. 그보다 뭐 해? 손 안 내려?”
“하지만, 이안나…….”
“오빠.”
또다시 나온 낮고 서늘한 한 마디.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고작 한 마디에 불과하나 그 안에는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여자의 몸으로 소드 익스퍼트에 도달한 본신의 힘만이 아니었다.
싸움에 미친 오빠 대신 실질적으로 용병단을 이끌어 온 카리스마가 주는 힘이기도 했다.
이 힘이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던 지크프리트의 분노를 단번에 정리했다.
그리하여 상황의 모든 주도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오랜만이네요, 브로든.”
그런 뒤, 브로든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였다.
동시에 인사를 건네왔다.
무려 15년 만에 듣는 목소리로.
“이안나.”
15년 만이라 해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브로든이 알던 그대로였다.
여전히 당차고 아름다우며 구김이 없었다.
그저 흘러간 세월에 따라 그가 알던 모든 것들이 한층 더 깊어졌다는 정도뿐이었다.
“쓸데없는 인사치레 같은 건 하지 않을게요. 어차피 그동안 브로든 소식은 꾸준히 전해 들었으니까. 또, 괜히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 없고요. 고작 그 한 마디로 담아내기에는 너무 길었거든요.”
“…….”
“그러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요, 우리.”
성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로든에게 고백을 했던 그때처럼 여전히 직선적이고 저돌적이었다.
“원하는 게 오빠와 우리 용병단의 힘이라고 했나요?”
“그래, 맞아. 원하는 게 있다면…….”
“좋아요, 지원해 드릴게요.”
“최대한…… 뭐?”
“지원해 드린다고요. 오빠도, 용병단도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