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장: 한판 뒤집기
후우우우~
높게 치솟았던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러자 똥 씹은 듯 표정을 일그러뜨린 크로아티 에르나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 검격의 여파를 해소하고자 족히 10m는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힐끗.
나는 그런 크로아티에게 힐끗 한번 시선을 준 것이 다였다.
그러고는 일단 그에 대한 관심을 껐다.
지금은 먼저 수습해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로카.”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베로카였다.
녀석은 지금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완전히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의 상태랄까?
당장 가라앉혀야 했다.
“……라이 경.”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폭주하는 와중에도 나만큼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베로카를 잠시간은 멈출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마력 가라앉혀. 더 늦으면 진짜 큰일 나니까.”
“하지만, 하지만 저자들이 센트럼을…….”
우우우웅!
그러나 정말 잠시일 뿐이었다.
베로카는 여전히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마음 상태가 자연스레 마력으로 연결되었다.
과부하 되어 깨져 나가기 일보 직전의 서클들이 다시금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막아야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갔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터였다.
사아아~
해서 어둠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베로카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좌절과 분노를 어루만지기 위해서.
“아직 안 늦었어.”
단,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녀석은 지금 제 단짝을 잃었다 여기는 참이었다.
단순히 억누르거나 달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너도, 그리고 센트럼도.”
“네? 그게 무슨……?”
우우웅…….
“센트럼 말이야. 아직 늦지 않았다고.”
다행히 그 무언가가 존재했다.
베로카는 이미 잃었다 여기는 그녀의 단짝, 센트럼이었다.
실제로도 잃기 직전이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은 희망을 포기할 단계가 아니었다.
어둠이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빨리 손을 쓴다면 아직 가망은 있다고.
“저, 정말이요?”
“그래, 정말이니까 얼른 마력부터 가라앉혀. 센트럼 녀석 떠나지 못하게 붙잡으려면 네가 옆에서 돌봐 주는 수밖에 없어.”
“아아…….”
“어서, 베로카. 센트럼 이대로 보낼 거야?”
“아니요! 그럴 리가요!”
덕분에 베로카가 정신을 차렸다.
비록 몸은 만신창이인 데다 서클은 깨질 듯 위태위태하지만, 다행히 끝에 다다르지는 않은 상태였다.
쉽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상황을 되돌릴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이다.
센트럼과 베로카 둘 모두에게.
“카오오~”
그리고 이 타이밍에 맞춰 카오가 살포시 착지했다.
착지 지점은 쓰러져 있는 센트럼의 곁.
그러자 곁에 있던 엘프들 몇이 나서 센트럼을 조심스레 카오의 등에 태우기 시작했다.
베로카 역시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환한 얼굴을 한 채 그쪽으로 이동 중이었고 말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건가,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럴 리가. 당연히 보이지.”
물론 이 전장에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로아티와 소드마스터, 그리고 수만에 달하는 제국군이 건재했다.
어쩌면 현재 이곳 전장의 주인은 저들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내 등장과 함께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주도권은 여전히 저들 손에 쥐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우리가 두 손 놓은 채 얌전히 기다려 줄 거라고?”
“뭐, 얌전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무사히 보내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데?”
“지나치게 건방지군. 아니면 아예 상황 파악 능력 자체를 지니지 못한 것이든지.”
크로아티가 경고를 건네왔다.
둘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둘 다 틀렸다는 걸.”
하지만 상관없었다.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내 사람들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가만히 놔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고이 보내 줄 생각 같은 건 나에게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받은 것은 몽땅 되돌려 줄 작정이었다.
이자까지 제대로, 아주 톡톡히 쳐서.
“일어날 수 있지?”
작정한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하여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내 뒤편을 향해서였다.
“저 지금 많이 아픈데요……?”
그곳에는 다이너가 위치하고 있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말이다.
“꾀병 부리지 말고 얼른 일어나. 난 너 그렇게 약하게 키운 적 없으니까.”
다이너의 컨디션은 분명 좋지 못했다.
곳곳에 난 혈선들과 몸 전체의 미세한 떨림이 현재 그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다이너였기 때문이다.
“누가 들으면 군단장님이 진짜 날 키운 줄 알겠습니다. 나이도 내가 한 살 더 많구만…… 흐읍!”
일어나라는 내 지시에 다이너는 툴툴댔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180도 다른 그였다.
다이너가 다시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죽을 힘을 다해서.
“크아압!”
벌떡.
죽기 일보 직전의 순간에도 펴지 못하던 무릎이었다.
한데, 그런 것을 내 등 뒤에서는 끝내 펴 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온전하게 우뚝 선 다이너였다.
“그리핀 군단!!”
그러고는 외쳤다.
다시 그의 등 뒤편을 향해서.
“오우!”
다이너의 등 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있는 그리핀 군단 역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언제나처럼 내 뒤에 설 준비 말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다. 열외 희망자 있나?”
“부군단장님부터 손드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계시는데?”
“하여간에 저놈의 입은……. 그래서, 당연히 없는 거겠지?”
“오우!!”
지금까지의 전황이 어떠했고, 그리핀 군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레몬드의 가벼운 농지거리가 나타내듯 어차피 전부 리셋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핀 군단 전원, 열외 없이 전투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래, 그럼 가자.”
내 등 뒤에 선 순간, 그리핀 군단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했다.
찬연한 광휘조차 남김없이 집어삼킬 탐욕스러운 어둠의 한 자락으로.
“전부 쓸어버리러.”
그렇게 시작되었다.
리브나로 백작성 전투의 제2막이.
빛을 뒤덮는 어둠의 진군과 함께.
* * *
라이오넬 하나가 더해진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정반대로 뒤집혔다.
그리핀 군단 전원의 눈빛에 광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천인장의 지위에 있는 레몬드는 이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체감하는 중이었다.
등 뒤에서 끓어오르는 부하들의 사기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2 천인대!”
“오우!”
“저 좀비 새끼들 이번에야말로 싹 다 찢어 버린다! 알겠나!”
“오우! 오우!”
이는 부하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레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레몬드는 한술 더 떴다.
그 누구보다 라이오넬에게 깊이 감화된 그였다.
따라서 그가 흩뿌리는 것은 광채를 넘어선 광망에 가까웠다.
푸슉!
“컥!”
그렇다고 열기에 잡아먹히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폭발할 듯한 기세와 달리 레몬드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좀비 놈의 어깨를 관통한 그의 검이 이를 방증했다.
우뚝.
이어지는 후속 대응 또한 그러했다.
레몬드는 앞서와 달리 그대로 지나쳐 가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죽이고 제자리에 서서 긴장감을 한층 더 끌어 올렸다.
지나쳤다가 낭패를 본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크큭.”
적의 반응 역시 여기에 기반하고 있었다.
분명 어깨를 관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 나간 기세는 여전했다.
고통 때문에 표정이 일그러지기는 했으나 기괴한 웃음만큼은 그대로인 것이다.
좀비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그아아아아~
이내 이 좀비 놈의 비정상적인 반응을 뒷받침해 주는 현상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빛이었다.
라이오넬이 도착하기 전, 슈라우드 군의 모든 것을 앗아 갈 뻔했던 바로 그 빛.
크로아티로부터 뿜어져 나온 그것이 상처 입은 좀비들을 덮어 나갔다.
“크크크크큭.”
“전원 주의한다! 목숨줄을 확실하게 끊어 놓기 전까지는 방심하지 말도록!”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어질 광경은 자명했다.
좀비들을 덮은 빛이 놈들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해 버릴 터였다.
하면 좀비들은 용기백배하여 그 광기를 폭발시킬 것이고 말이다.
레몬드와 그리핀 군단은 이미 수차례 겪어 본 과정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치른 희생 또한 만만치 않았다.
끓어오르는 사기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파고들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크크크…… 크으?”
그런데, 어째 이번에는 달랐다.
좀비들의 반응에 전과는 차이가 있었다.
“크으으…….”
퍼엉!!
“커걱!!”
이어지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빛이 내려앉은 곳에 벌어진 현상은 치유와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치유와 정반대에 위치한다고 봐도 무방한 현상, 바로 폭발이었다.
상처 부위가 치료되기는커녕 아예 통째로 터져 나가 버린 것이다.
푸화악~
이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피 분수는 덤이었다.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고통에 눈깔 뒤집고 쓰러지는 좀비 놈 역시도.
퍼엉! 푸각! 퍼걱! 퍼벙!
심지어 이놈 하나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이런 광경이 그리핀 군단과 좀비 놈들의 충돌 지점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
분명 치명상을 입혔다고 보기는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그리핀 군단이라 해도 좀비처럼 달려드는 놈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다소 애매한 상처들이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치명상으로 돌변했다.
심지어 폭발은 커다란 상처들에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생채기를 살짝 넘어서는 수준의 상처들까지도 일제히 터져 나갔다.
이로 인해 광휘의 군단 곳곳에 구멍이 생긴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리핀 군단 입장에서도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는 광경인 것이다.
“뭣들 하냐?”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앞서와 다른 이 광경의 발생 원인.
즉, 폭발의 원인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했다.
“우리 군단장님 힘인 거 딱 보면 모르겠어?”
지금 이 순간, 앞서와 달라진 요인은 어차피 한 가지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핀 군단의 주인, 라이오넬.
그가 레몬드와 모두의 앞에 등을 보이고 서 있다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라이오넬의 작품이었다.
“하여간에 소름 돋을 정도로 사람 미치게 하는 양반이라니까.”
벌써 10년 넘게 라이오넬 뒤에 착 달라붙어 있는 레몬드였다.
그런데도 매번 이 감각은 도무지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전장에서 라이오넬의 등을 바라볼 때마다 느껴지는 이 미묘한 감각.
심장의 떨림을 넘어 온몸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이 내밀하면서도 오묘한 감각이 정말 레몬드를 미치게 만들었다.
동시에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라이오넬이라는 한 거대한 인간으로부터 말이다.
“뭣들 하냐니까? 일들 안 해? 저 양반 뒤 안 따라갈 거냐고!”
레몬드는 장담할 수 있었다.
오묘하면서도 간질간질한 이 감각, 그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부군단장 다이너를 필두로 천인장인 그와 바비, 그리고 예하 2,000여 군단원 전체가 공유하는 감각이고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120%의 확신을 담아 다시 한번 외칠 수 있었다.
“싹 다 찢어발겨!!!”
지금부터는 이성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그리핀 군단이 가장 잘하고 제일로 자신 있는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라이오넬이 만든 판 위에서 미친놈처럼 날뛰는 것.
그리하여 적들을 무참히 짓밟고 무자비하게 찢어발기는 것.
오직 그뿐이었다.
“오우!!!”
그리고 지금, 드디어 개시되었다.
전장을 씹어먹는 그리핀 군단의 미쳐 버린 활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