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장: 광휘의 일면
후우우~
다이너가 해냈다.
그가 끝내 빛의 기둥을 막아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센트럼과 베로카, 그리고 마법사들이 힘을 보태기는 했다.
하나, 대부분의 힘을 감당한 이는 다이너였고, 따라서 주된 공로는 누가 뭐라 해도 다이너에게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활약 덕에 성벽이 무너진다는 등의 대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단, 그렇다고 해서 이후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저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낸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7만여의 병력 중 단 일인이 펼친 공격을 말이다.
나머지 인원들은 여전히 달려드는 중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아무런 방해조차 받지 않았다.
슈라우드 군의 모든 관심이 빛의 기둥에 집중돼 있는 사이 이들은 성벽으로의 접근을 마쳤다.
그러고는 어수선한 틈을 타 일제히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손실을 빛의 기둥 하나로 무마해 버린 셈이었다.
퍼석!
“그리핀 군단!”
“오우!”
“다 쓸어버린다. 제국이고 뭐고 싹 다 씹어먹어!”
그렇게 본격적인 충돌이 개시됐다.
이에 레몬드는 올라서는 적군의 대가리를 곤죽 내 버리며 거침없이 소리쳤다.
싹 다 씹어먹고 쓸어버리라고.
“오우! 오우!”
당연히 의심 같은 것은 품지 않았다.
레몬드와 그의 수하들은 무적의 그리핀 군단이었으니까.
라이오넬과 함께 믿기 힘든 기적을 써 내려온 그들이었다.
순식간에 달라붙은 제국군이 까마득하게 올라오는 지금 정도의 상황?
카르가디아 산맥에서의 그 지옥 같던 나날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콧방귀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딜 올라와?”
스악~
콰직!
그렇기에 레몬드는 아무렇지 않게 찌르고 비틀며 부술 뿐이었다.
전투를 위한 약간의 긴장과 흥분을 제외한다면 현재 그의 감정은 잔잔한 호수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에헤이, 우리 대장 말 못 들었어? 어딜 올라오냐니까?”
푸욱!
“올라오는 건 네 마음인데, 그다음은 아닐걸?”
푸각!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핀 군단 전원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평정심을 유지한 상태로 올라오는 적을 확실하게 사살해 나갔다.
적어도 그리핀 군단 내에서만큼은 예외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핀 군단이 지키고 선 곳은 가히 철벽을 연상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떨궈! 떨구라니까?”
“밀려나면 안 돼!”
“뭐 이런 미친놈들이…… 크억!”
“어어어……? 커흑!”
문제는 다른 곳이었다.
그리핀 군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이런 곳들은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한 곳의 진행 상황이 아주 특별했다.
아주 특별하게 좋지 못했다.
심각하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놈들이군, 광휘인지 광오인지 모를 놈들이.”
광휘의 군단이 밀고 올라오는 위치였다.
그곳은 심각하게 밀리다 못해 아예 성벽을 내주기 일보 직전이었다.
원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리핀 군단이 저들을 도맡아 처리할 예정이었다.
한데, 그 망할 빛의 기둥이 계획을 헝클어뜨렸다.
슈라우드 측이 빛의 기둥을 막느라 어수선해진 사이 급작스럽게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리핀 군단이 처음부터 광휘의 군단을 전담할 수 없게 됐고, 지금과 같이 밀리는 형국이 펼쳐지고 말았다.
“바비!”
“가라. 여긴 우리 힘만으로도 충분해.”
“오케이.”
물론, 이걸로 끝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밀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가서 재차 밀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럴 능력도, 자신감도 충분했다.
이에 레몬드는 바비를 불렀고, 호응하는 바비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제1 천인대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이런 곳에 제2 천인대까지 붙어 있는 것은 전력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레몬드는 지금이라도 원래 맡았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제2 천인대는 저 광오한 놈들 대가리를 깨부수러 간다.”
그렇게 그리핀 군단 제2 천인대가 움직였다.
감히 슈라우드의 성벽 위에서 제 이름만큼이나 광오하게 날뛰는 놈들을 향해.
그리고 잠시 후, 문제의 지역에 빠르게 도달했다.
하면 굳이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곧바로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는 레몬드와 제2 천인대였다.
파앗!
서걱!
스타트는 언제나 그래 왔듯 레몬드가 먼저 끊었다.
그가 첫 번째로 짓쳐 들며 검으로 가장 앞서 있는 놈의 허벅지를 베었다.
“큽!”
털썩.
베인 놈은 당연히 중심을 잃었고, 자연스레 무릎을 꿇었다.
시작부터 적의 목을 따기에 아주 깔끔한 한 상이 마련된 것이다.
파밧!
하지만 레몬드는 그 상을 취하지 않았다.
취하기는커녕 더는 거들떠보지조차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쳤다.
취하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장이란 무릇 길을 닦고 상을 차리는 존재.
떠먹는 것은 뒤를 따르는 부하들의 몫이었다.
레몬드가 라이오넬의 등을 따르며 배운 바는 그러했으며, 천인대장인 그 역시 이 배움을 철저하게 실천으로 옮겨 왔다.
푸욱!
이런 배움과 실천이 불결하게 빛나는 놈들을 상대한다고 해서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레몬드가 다음 상대에게 짓쳐 들어가는 사이 뒤에서 들려오는 피륙음이 그 방증이었다.
서걱!
파앗.
이어지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몬드가 한칼 먹여 놓고 지나치면 뒤따르던 부하들이 마무리한다.
기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똑같은 과정이 반복될 뿐이었다.
나아가 레몬드 예하 백인장과 십인장들 역시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제2 천인대는 성벽 위로 올라온 광휘의 군단 한가운데를 순식간에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으음, 이상한데…….’
그런데 이상했다.
영 석연치가 못하달까?
막힘없이 파고 들어가던 레몬드가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말이다.
‘전투 실력만 놓고 보면 특별할 게 없어. 기껏해야 잘 훈련된 보통 군단 정도야.’
전투력의 평범함이 그 첫 번째 이유였다.
광휘의 군단이라는 이름치고는 정말 별거 없었다.
훈련이 나름 잘돼 있다고는 하나, 그게 전부인 것이다.
적어도 전투력만 놓고 보자면 그러했다.
감히 그리핀 군단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정도였다.
‘그런데 겁이 없어. 뭐에 씐 것처럼 앞뒤 안 재고 달려들기만 하는 건 대체……? 지들이 광전사야 뭐야?’
그럼에도 지나치게 무모했다.
검에 찔리거나 베이는 것을 눈곱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광전사처럼 자기들 몸을 먼저 들이밀기까지 했다.
실력도 별 볼 일 없는 놈들이 말이다.
스각!
“크으윽……!”
그렇다고 고통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레몬드에게 무릎을 베인 놈이 그 명백한 증거였다.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크으, 으아아아!!”
문제는 저러고도 또다시 미친 듯이 달려든다는 점이었다.
상식적으로 이런 짓거리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석연치 못함의 두 번째 이유인 동시에 핵심이기도 했다.
푸각!
물론 이것만으로 레몬드와 그리핀 군단을 궁지로 몰 수는 없었다.
카르가디아 산맥 몬스터들의 광기는 이보다 훨씬 더했다.
그런 것들을 상대해 온 그리핀 군단이 고작 인간의 광기 따위에 짓눌릴 리 만무했다.
지독한 깡과 압도적인 실력 차로 가뿐하게 눌러 주면 그만인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이어지는 칼질에 복부를 관통당하고 만 광휘의 군단 병사였다.
‘일단은 밀고 나간다. 어차피 놈들을 몰아내는 게 최우선이야.’
또, 지금 이 타이밍에 흔들림은 금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에서 밀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성벽의 이점까지 내준다면 필패나 다름없었다.
이것들이 어떤 종류의 미친놈이라 한들 일단은 밖으로 밀어내고 봐야 했다.
하여 당장은 고민을 접기로 한 레몬드였다.
“크으으…….”
촤르륵~
“크아아아아아!”
아니, 접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어떤 소리 때문이었다.
도저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런 소리.
“……!”
레몬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눈에 담게 되었다.
분명 검이 복부를 관통하여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한데, 그 꼴을 당한 놈이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자기 손으로 박힌 검을 빼냈다.
고통으로 가득 찬 끔찍한 비명과 함께.
“크으아아!!”
“크륵, 끄르륵!”
“큭큭큭. 쿨럭, 쿨럭. 크크크큭.”
심지어 방금 그 한 놈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레몬드와 제2 천인대가 지나온 길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속출했다.
대원들의 일격에 죽지는 않은 놈들, 그러나 치명상을 입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놈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일으킬 수 없는 놈들은 바닥에서 꿈틀대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치 구울이나 좀비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슨……??”
어디까지나 모양새에 불과하기는 했다.
하는 짓이 언데드를 연상시킨다 해도 실제 그 힘까지 닮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몸을 일으켰음에도 그저 흐느적거리는 것이 다였다.
레몬드와 대원들에게 다시 달려든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처들이 갑자기 아물기라도 하지 않는 한,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아아아아아~!!
전장에 다시 한번 빛이 솟아오르기 전까지는.
그리고 이것이 광휘의 군단을 감싸 안기 전까지는.
“크으으…… 흐흐흐.”
“쿨럭. 후우~ 큭큭큭큭.”
이 순간부터였다.
이 순간부터 모든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모든 것들이, 어이없고 끔찍하게도 모두 가능한 현실들로.
* * *
“라이오넬 경은?”
“아직 전장을 정리 중인 듯합니다.”
“으음…….”
바르코스 후작이 다급하게 라이오넬을 찾았다.
이런 그의 다급함은 오늘도 나로움 요새 농성에 성공한 승장답지 못한 태도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머릿속에 방금 승리에 대한 기쁨이나 안도 같은 것은 쥐똥만큼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안 되겠군. 내가 직접 찾으러 나서는 수밖에.”
좋지 못한 소식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출처는 리브나로 백작성.
내용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외성을 포기하고 내성에서 결사 항전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보고일지도 모른다는 첨언도 함께였다.
광휘의 군단이 도착했으며 곧장 전투가 시작된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곳의 전투가 한창인 와중이었다.
따라서 최대한 버티라는 말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또, 애초에 그것이 리브나로 백작성의 기본 전략이기도 했다.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계산하에 세운 실현 가능한 전략 말이다.
그런데 이 계산과 전략을 광휘의 군단이 일거에 붕괴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 리브나로 백작성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성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요, 그곳의 병력은 전멸을 면키 힘들 터.
당장 라이오넬을 그쪽으로 보내야만 했다.
지금 막 전투를 끝낸 참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만이 유일한 답이었으니까.
샤락~
“아인한드라 공!”
그때, 나로움 요새의 주전력이라 할 수 있는 아인한드라가 다가왔다.
그는 방금까지 라이오넬과 함께 전장을 휩쓸던 참이기도 했다.
“라이오넬 경은 지금 어디……?”
“라이는 이미 떠났다.”
그런 아인한드라가 대신 전해 왔다.
라이오넬이 현재 리브나로 백작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위기에 빠진 그의 사람들과 슈라우드를 구원하기 위해, 전속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