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장: 거룩하게 거지 같은
“여기 리브나로 백작성은 좀 어떤가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배치된 전력이 적다 보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 중이거든요.”
베로카의 물음에 다이너가 답했다.
다이너는 현재 이곳 리브나로 백작성 방어의 총책임자 역할을 맡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라이 경께 들었어요. 마스터 급이 한 명 달리는 상황이라 다이너 경께서 고생이 많으시다고.”
“라이 경이요? 어떻게든 볶아 먹지 못해 안달인 양반이 그럴 리가 없는데…….”
제국군은 총 세 갈래로 슈라우드를 침략해 왔다.
중군 20만은 나로움 요새로, 좌군 11만은 누바크 백작성으로, 그리고 우군 7만은 이곳 리브나로 백작성으로.
이와 같은 병력 배치에서 알 수 있듯 리브나로 백작성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편이었다.
하여 슈라우드 역시 여기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리브나로 백작성의 방어 전력은 그리핀 군단, 하이엘프를 제외한 겨울바람 일족, 그리고 정령 소드마스터인 다이너를 포함하여 총 2만의 병력이 전부였다.
라이오넬, 아인한드라, 카밀라, 드워프 포함 총 5만이 배치된 나로움 요새, 에릭스와 막시무스 슈러그혼을 비롯 총 3만이 배치된 누바크 백작성과 비교하면 확실히 부족한 전력이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 둘이 이곳에 배치됐음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베로카. 아니죠?”
“물론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이리저리 돌려 말씀하신 걸 종합하면 그런 뜻이었어요.”
“흐음, 베로카가 그렇다고 하니 일단 믿어는 볼게요. 그리고 뭐, 고생을 안 했다고는 못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하는 고생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리브나로 백작성의 사정이 약간 더 고되다뿐이지, 어차피 세 곳 다 죽을 맛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인 전력 자체가 달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힘들다고 불평할 때가 아니었다.
그 불평할 힘조차 쏟아부어 어떻게든 버텨 나갈 때였다.
“솔직히 지금 라이 경에 비하면 제가 하는 건 새 발의 피나 다름없고 말이죠. 어떻게, 그 양반 요즘 잠이나 제대로 주무시긴 합니까?”
절레절레.
더욱이 라이오넬이 하는 고생과 비교하면 힘들다는 불평조차 사치였다.
아무리 힘들어 봤자 라이오넬보다 힘들 수는 없었다.
그는 세 개의 전투 지역 전체를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로만 지시하는 관할이 아니었다.
전투의 최일선에 뛰어들며 직접 몸으로 하는 관할이었다.
주로 머무는 곳은 나로움 요새지만, 나로움 요새 전투가 끝나는 즉시 나머지 두 개 성으로 지원을 나서는 것이다.
“카오 위에서 쪽잠으로 주무시더라고요.”
카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슈라우드에 굉장한 전략적 이득을 가져다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덕분에 라이오넬의 힘이 세 지역 모두에 미치는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이것은 라이오넬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그의 일정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성과 성을 오가며 쉼 없이 전투하느라 제대로 눈 붙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즉, 지금의 전선과 전황은 모두 라이오넬의 희생 덕에 유지되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쯧, 그런 양반이 있는데 더 죽어라 힘을 쓴다면 모를까, 어떻게 힘들다고 칭얼댈 수 있겠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일 겁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베로카.”
그렇기에 다이너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비롯한 라이오넬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불만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조금이라도 더 라이오넬을 돕고자 젖먹던 힘까지 끌어낼 것이라고 말이다.
“다이너 경이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그건 그렇고, 혹시 광휘의 군단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두신 바가 있나요?”
“으음, 광휘의 군단…….”
어찌 됐든 라이오넬의 헌신 덕에 여태까지의 전황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수비하는 입장이니만큼 오히려 좋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황을 앞으로도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베로카가 언급한 광휘의 군단 때문이었다.
그들이 드디어 슈라우드에 발을 들였다.
그러고는 곧장 이곳 리브나로 백작성으로 직행 중이었다.
“책임자로서 무책임한 말이지만, 당장은 없네요. 베로카와 센트럼이 직접 도우러 와 주기까지 했는데, 미안합니다.”
“아니요, 다이너 경이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죠. 그들에 대한 정보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인데.”
광휘의 군단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소드마스터인 크로아티 에르나르 백작이 이끈다는 점, 라투이드 왕국 내전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왔다는 점 정도?
이전까지의 공식 활동이 전무하기에 광휘의 군단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강하리라는 것.
나로움 후작성에 있던 베로카가 센트럼과 함께 리브나로 백작성으로 재배치 된 것도 이 강함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었다.
“어쨌든 특별한 대책이랄 게 없는 관계로 일단은 버티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라이 경이 전해 준 그자의 능력대로라면 괜한 객기 부리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니.”
“동의해요. 라이 경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자라면 분명 강할 테죠.”
라이오넬의 보증이 있었다.
광휘의 군단을 이끄는 크로아티 에르나르 백작.
이자의 강함이 특별하리라는 보증이었다.
라이오넬이 지닌 특별함을 고려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자였으니까.
황제 즉위식에서 라이오넬이 직접 그자를 눈에 담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확실했다.
하여 우선은 소극적으로 방어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라이오넬이 보증한 자를 상대로 객기나 부릴 만큼 다이너는 어리석지 않았다.
최우선 목표는 버티는 것이었다.
라이오넬이 도착할 때까지 사고 없이 무사하게.
달칵.
“베로카 양, 다이너 경.”
그때였다.
통제실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센트럼?”
성을 한번 둘러보러 나갔던 센트럼이었다.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가 황급히 되돌아온 것이다.
“그자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러고는 도착을 알렸다.
“광휘의 군단이요.”
전장에 던져진 새로운 변수의 도착을 말이다.
* * *
그로부터 한 시간여 후, 다이너는 성벽 위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4,000가량의 병력이 더해진 제국군의 모습이 보였다.
추가된 이 4,000이 광휘의 군단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라이 경께 연락은 됐습니까?”
“아직이요. 나로움 요새에서도 지금 전투가 한창이라고 해서 일단은 전달만 부탁해 놓은 상태에요.”
“역시 일부러 공격 시간을 맞춘 듯하군요. 저놈들은 피곤하지도 않나 봅니다. 이제 막 도착한 놈들이 휴식도 없이 곧장 치고 들어오는 걸 보면.”
여기에 한 가지 더.
적들이 전투 준비를 마친 모습 또한 다이너의 눈에 들어왔다.
도착하자마자 휴식도 생략한 채 곧바로 공성에 돌입하려 하는 것이다.
“어찌 됐든 두 소드마스터는 베로카와 센트럼에게 맡기겠습니다. 엘프들과 함께 주의해서 움직여 주세요. 그럼 오늘도 부탁합니다, 나르한지아.”
끄덕.
다이너가 겨울바람 일족의 나르한지아에게 부탁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번 전투, 엘프들의 활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법 콤비의 마법과 함께 이들의 정령 무기술이 방어의 주축이었기 때문이다.
두 소드마스터가 날뛰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일은 오롯이 이들의 활약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바비, 레몬드. 광휘의 군단을 막는 건 우리다. 이의 없겠지?”
“없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 맡기셨으면 오히려 서운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전투의 핵심인 광휘의 군단.
이들은 그리핀 군단이 상대할 예정이었다.
라이오넬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자의 군단이었다.
그렇다면 그 상대 또한 라이오넬의 군단이 맡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다이너 경도 조심하셔야 해요.”
“물론 저도 최대한 주의하겠습니다, 베로카. 최대한 붙들고 늘어지는 식으로 갈 겁니다. 제 특성상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테고요.”
마지막으로 크로아티 에르나르 백작.
이자는 다이너가 홀로 맡기로 했다.
단, 결코 무리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처음 계획대로 일단은 시간을 끄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다음은 베일에 싸인 크로아티와 광휘의 군단을 탐색하는 것이고 말이다.
승리는 라이오넬의 도착 이후였다.
“부군단장님, 옵니다.”
뿌우우~
그렇게 한창 마지막 점검을 마쳐 가던 중이었다.
바비의 알림에 맞춰 전장에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제국군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광휘의 군단을 가장 앞세운 채로.
“전군 전투 준비. 반드시 막아 낸다.”
“오우!!”
당연히 이쪽 또한 준비에 들어갔다.
다이너의 명령, 그리핀 군단의 호응, 그리고 전군의 전투태세 돌입까지.
이제 남은 것은 양군의 본격적인 충돌뿐이었다.
그아아~
“음?”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본격적인 충돌까지는 아직 한 가지 절차가 더 남아 있었다.
그아아아~
“부군단장님, 저거……?”
그리고 이 절차, 이쪽의 것이 아니었다.
저쪽, 즉 제국군의 것이었다.
광휘의 군단을 이끄는 자, 크로아티 에르나르.
라이오넬의 대척점에 서 있기도 한 이 인물로부터 비롯된 절차인 것이다.
그아아아아~!!
“저거 설마……?”
레몬드의 읊조림대로였다.
비록 완성되지 않은 읊조림이나 그 뜻만큼은 분명하게 전달됐다.
적어도 라이오넬의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절차란 것의 의미를.
“그래, 단순히 정령석만 섭취한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빛이었다.
어둠을 배척하는 찬연한 광휘 말이다.
성스러울 정도로 거룩한 이 광휘가 전장의 모두를 눈부시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의 눈에 그 찬란함을 영롱하리만치 선명하게 뿜어내는 것이다.
“유형화까지 가능해.”
유형화의 단계였다.
라이오넬의 어둠이 탐욕과 음습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때와 같은 그 유형화.
물론 이것이 정확히 어떤 성질을 가졌고, 얼마만큼의 파괴력을 지녔는지는 알지 못했다.
또, 라이오넬 정도의 수준에 이른 것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식하리만치 강하리라는 사실, 이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그우우우웅!!
전장 한복판에 이윽고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확연했다.
라이오넬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한없는 찬란함으로 인해 고결하고 고귀해 보이기까지 할 지경이었으니까.
“젠장.”
다만, 그 의미 역시 보이는 것과 정반대라는 점이 문제였다.
고결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다이너를 비롯한 라이오넬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했다.
더럽고 추하며 불결하고 불길했다.
이보다 더 거지 같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불러올지도 모를 파멸적인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드드드!
지이이잉!!
다이너가 지닌바 모든 힘을 끌어 올렸다.
검 위에 대지의 힘을 덧씌운 뒤 이것을 오러로 강화했다.
그럼으로써 대지의 성질을 변환시켰다.
한층 더 오밀조밀하고 단단하게.
저 파멸적인 힘에 어떻게든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센트럼, 베로카.”
“말씀하세요.”
“아까 한 말은 취소입니다. 저거 저 혼자서는 못 막아요.”
그리고 인정했다.
저 빛의 기둥이 정말 라이오넬의 그것에 버금간다면 다이너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어떻게든 막아 내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끌어다 써야만 했다.
“예, 저희도 돕겠습니다.”
우우우웅~!
파지지직!!
그렇게 마력과 뇌전의 힘까지 더해졌다.
여기에 여력이 되는 마법사들 역시 자신들의 힘을 보탰고 말이다.
물론 이걸로도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하나, 일단은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콰우우우우우!!
완성된 기둥이 그 거룩한 더러움을 뽐내며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다이너를 비롯한 라이오넬의 사람들, 그리고 슈라우드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