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장: 처형
브루노 다스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그가 현재 슈라우드 땅을 밟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슈라우드는 그에게 참 거지 같은 기억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브루노는 이곳에서만 벌써 세 번의 패배를 경험했다.
심지어 그냥 패배도 아닌 심각하리만치 굴욕적인 패배였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그가 현재 그놈을 앞에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브루노에게 번번이 굴욕적인 패배만을 안겨 준 그놈, 라이오넬 라인하트 말이다.
이제는 브루노도 인정했다.
그는 무슨 짓을 해도 라이오넬에게 안 됐다.
네 번이나 똑같은 패배를 반복하다 보니 인정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브루노의 심경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솔직히 이제 라이오넬 앞에 서는 것이 꺼려지는 그였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다시 그 굴욕적인 패배의 순간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나,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브루노는 현재 제국군 본대에 속해 그놈이 있는 나로움 요새 앞에 도달한 참이었다.
머지않아 다시 한번 라이오넬 그놈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객관적인 전력이야 제국이 한참을 앞서 있다지만, 이는 이전에도 마찬가지.
그때마다 최일선에서 깨져 온 장본인으로서 꺼림칙한 심정을 금할 수 없는 브루노였다.
“이거 감회가 남다르시겠소?”
“무슨 뜻이오, 치라드 백작?”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지금 막 그의 옆으로 다가온 한 인물 때문이었다.
아마키데스 치라드라는 자로 로만 제국의 백작 중 하나였다.
나아가 브루노와 같은 소드마스터인 동시에 정령석 섭취자이기도 했다.
“무슨 뜻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가벼운 질문이외다. 드디어 라이오넬 라인하트라는 놈에게 복수할 기회가 찾아온 셈 아니오?”
“…….”
“아아,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시구려. 난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뿐이니. 솔직히 라이오넬과 다스 백작 사이에 묵은 감정이 가볍지 않다는 거, 제국 귀족들이 다 아는 사실 아니오?”
뜻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명백했다.
브루노를 조롱하고자 함이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모를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아직 놈을 만나기도 전인데 감회고 뭐고가 어디 있겠소? 없소, 그런 거.”
“아직 만나기 전이라 해도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 아니오? 이곳 나로움 요새에 우리 둘을 포함해서 정령 소드마스터만 무려 다섯이고 6서클 대마법사도 둘이나 되는데. 이런데도 놈을 처리 못 하면 접시에 코 박고 콱 죽어야지요.”
“라이오넬 그놈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되오.”
“아, 물론 라이오넬을 얕잡아 보는 건 아니외다. 그놈 실력이 대단하지 않고야 다스 백작이 그리 여러 번 낭패를 겪었을 리도 없을 테니.”
브루노와 아마키데스는 황도 아카데미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다.
단, 선의의 경쟁과는 거리가 먼, 차라리 앙숙에 가까운 좋지 못한 라이벌 말이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쉼 없이 비교당했으며, 그렇기에 시도 때도 없이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브루노가 아이단 황제의 황자 시절 측근으로 발탁됐다.
팽팽하던 둘 사이에 격차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검 실력은 비등하나 정치적인 면에서 벌어진 차이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더욱 브루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된 아마키데스였다.
“다만, 그렇다 해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소이까? 놈이 그랜드 소드마스터도 아니고 말이지.”
“놈은 항상 그 정도라는 예측을 뛰어넘어 왔소.”
“이런~ 그리도 겁 없던 백작이 어쩌다 이리 신중하고 염려가 많아진 것인지, 동기로서 내 마음이 다 아프구려.”
그런 아마키데스에게 지금은 호기였다.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브루노를 합법적으로 잘근잘근 씹어 줄 수 있는 둘도 없는 호기.
반면 브루노는 이에 대한 맞대응이 어려웠다.
그간의 실패도 실패거니와 아마키데스의 조롱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소. 이번만큼은 놈을 완벽하게 분석하지 않았소이까? 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백작도 그 분석에 동의했고 말이외다.”
참모부가 라이오넬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이 분석에 따르면 일단 그랜드 소드마스터 급은 아니었다.
그 정도 급이었다면 지난 전투에서 굳이 시간을 끌지 않았을 터.
대신 평범한 소드마스터 급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정령 소드마스터 둘을 상대로 팽팽한 대결을 펼쳤기 때문이다.
최후의 순간에는 둘 중 한 명을 압사시키기도 했고 말이다.
하여 내린 결론은 정령 소드마스터 둘 이상 셋 미만이었다.
이 결론에 브루노 역시 동의했다.
지난 대결을 가늠해 본 결과 그 또한 셋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판단했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였다.
브루노의 감성이랄까 혹은 본능이랄까, 어쨌든 그의 비이성적인 영역은 이 판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오넬에게는 단순한 분석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했다.
지금껏 라이오넬과 검을 가장 많이 맞대 온 브루노의 느낌은 분명 그러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백작의 동기인 나도 있어요. 내가 동기를 위하는 마음으로 백작에게 힘이 돼 줄 테니, 마음 푹 놓아도 되오.”
“……고맙구려.”
그렇다 해도 반박은 불가했다.
설령 느낌이 좋지 못하다 한들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근거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것을 가지고 참모부의 분석과 아마키데스의 자신감이 틀렸다고 말한다?
남들 귀에는 연이은 실패에 대한 궁색한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지독한 겁쟁이로 낙인찍히고 말 것이 분명했다.
“뭘 또 감사 인사까지. 그럴 필요 없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극한의 조롱을 이어 가는 아마키데스였다.
이런 그에게 굳이 추가적인 소스까지 줄 필요는 없었다.
하여 브루노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패배자인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물론 브루노가 입을 다물었다 하여 아마키데스의 조롱이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백작이 최근 힘든 일을 연달아 겪었으니, 동기로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
“카오오오~!”
그때였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아마키데스의 조롱이 뚝 끊기고 말았다.
요새와 제국군 진영 전체에 울려 퍼지는 한 포효 때문이었다.
“그리핀?”
브루노에게도 나름 익숙한 포효였다.
이베리아 평원에서 그에게 두 번째 패배를 안겨 준 바로 그 포효였으니까.
“놈이 본격적인 전투 전에 한마디 해서 병사들 사기라도 끌어 올릴 모양이외다.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거리이거늘, 쯧쯧.”
나로움 요새 상공에 그리핀이 떠오른 것이다.
그 위에 주인인 라이오넬을 태운 채로.
“하긴 절박하겠지. 이 대군 앞에서 저런 생쇼라도 안 하면 사기 자체가 남아나질 않을 테니.”
아마키데스는 이를 한바탕 연설이나 늘어놓으려 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아마키데스만이 아니었다.
제국군 전체의 반응이 대동소이했다.
다들 전투 전에 으레 있는 절차라 여기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으음…….”
단 한 사람, 브루노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브루노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라이오넬이라면 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지도 몰랐다.
그간 수차례 라이오넬을 겪어 온 브루노의 본능은 분명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설마 고작 말 한마디 하는 거 가지고 벌써부터 겁을 내는 거요, 다스 백작? 에헤이, 그러지 말라니까.”
단지 이 경종을 당장 밖으로 울릴 처지가 못 될 뿐이었다.
브루노를 제외하고는 누구 하나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없었다.
아마키데스는 얼씨구나 하며 브루노를 한층 더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거야 원, 이렇게까지 간이 쪼그라들어서는 무슨 전쟁을 하겠…….”
“카오오오오~!!”
쐐애애액!!
결국, 브루노의 본능이 맞았다.
그리핀이 사선으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온다!”
제국군 본진을 향해 일직선으로, 엄청난 속도를 뽐내며.
“라이오넬이 온다!!”
브루노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라이오넬과 함께 말이다.
* * *
“지휘부 쪽이다!”
제국군 진영에서 나온 외침대로였다.
나는 현재 제국군 진영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을 향해 강하하는 중이었다.
그곳은 바로 수뇌부와 마탑의 마법사 등 제국군 핵심 요인들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막아!”
“추락시켜!”
슈슈슈슉~
확실히 제국군은 제국군이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응이 빨랐다.
화살들이 허공을 가르며 카오를 향해 쏘아져 날아왔다.
또한, 그 방식 역시 깔끔했다.
빗나간 화살이 본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지 않도록 거리와 각도를 조절한 것이다.
사아아아~
하지만 이런 나름의 대응은 제국군이 원하던 효과를 내지 못했다.
화살이 카오에게 닿지 못한 것이다.
일제히 어떤 선을 넘지 못하고 공중에 우뚝 멈춰 섰다.
어둠의 영역이 만들어 낸 일정한 선이었다.
“어어?”
“떨어져……?”
푸슈슈슛!
“우리한테 떨어진다!!”
그러고는 일제히 수직으로 낙하했다.
아래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만 꺾고 있는 제국군의 머리 위로.
“흐엑!”
“커헉!”
“크아악!”
이로 인해 제국군 진영 한복판이 시끄러워졌다.
비명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쏟아져 내린 화살 비가 만들어 낸 고통과 죽음의 비명이었다.
“다 왔다. 준비해.”
그사이, 카오는 강하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벌써 지휘부를 코앞에 둔 상태였다.
우우우웅~
하지만 되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봐야 했다.
이곳이야말로 복마전이었다.
비록 군 통솔을 위해 여기저기 퍼져 있다 하나, 여전히 가장 많은 실력자가 몰려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준동하는 오러와 마력의 파동이 이를 방증했다.
슈아아아악!
그럼에도 카오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쏘아져 내려오던 속도 그대로 지휘부 쪽을 향해 쇄도했다.
따라서 정면충돌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아인.”
내가 등 뒤의 누군가를 부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랬다.
카오의 등에는 나 혼자 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엘프 친구 또한 함께였다.
“시작하마. 샤테이어.”
그리고 이 친구가 다시 자신의 친구를 불렀다.
하이엘프와 영혼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한 정령이었다.
콰아아아아~!!
그렇게 제국군 한복판에 바람을 이끄는 바람이 출현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강력한 폭풍과 함께.
“헛!”
“무슨……?”
휘몰아치는 폭풍에 의해 강제로 틈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벌어진 틈을 카오가 파고 들어갔다.
한 번 흔들리고 놓친 이상 카오의 속도는 따라잡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은 채로 1차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령관 각하를 보호하라!”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저들의 반응대로였다.
1차 목표 지점은 현 제국군 최고 수뇌부의 막사 인근이었다.
덕분에 답지 않게 허둥대는 제국군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다만, 이게 다는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훨씬 더 중요하고 또 성가신 것들 역시 눈에 담았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이잉!
그것은 바로 솟아오르는 오러 블레이드의 향연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세 개였으며,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접근 중인 것까지 더하면 무려 다섯 개의 오러 블레이드였다.
더구나 개중에는 총사령관으로 보이는 자의 오러 블레이드마저 섞여 있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은 한마디로 정리 가능했다.
만약 지금 여기서 총사령관을 노린다?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아인한드라와 함께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눈 깜박할 사이에 제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슈아아아악~
“어어?”
“지나가……?”
그래서였다.
그대로 지나쳤다.
처음부터 타깃은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 역시 1차 목표 지점에 지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고는 최종 목표 지점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날아갔다.
이 기습 작전의 진정한 타깃이 위치한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