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장: 증명이 필요한 순간
“일부러 남는 쪽을 선택한 건가요, 케인 경?”
레나가 물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케인 타리우드를 향한 질문이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남아야 했고, 제가 가장 적합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제국군은 슈라우드에서 퇴각했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 크리스토퍼 1왕자와 나로움 후작도 제국으로 넘어갔다.
다만 이 과정에서 뒤에 남아 시간을 끌어 줄 희생양이 필요했고, 이 일을 케인이 맡았다.
사실상 버려진다고 봐도 좋은 자리에 케인이 자원한 것이다.
“그날 저를 그냥 보내 준 것처럼요?”
“그건…….”
케인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분전했다.
그리하여 1왕자가 제국으로 넘어갈 시간을 벌어 주었다.
물론 압도적인 전력 차로 인해 그리 길지는 못했다.
하지만 제국과 1왕자 측에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신 케인은 사로잡혀 이렇듯 레나를 마주하고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사실 경이 자원한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어요. 후작령에 남겨질 누님에 대한 걱정 때문 아닌가요?”
“…….”
몰락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유일한 가족인 누나 손에서 큰 케인이었다.
그러던 중 누나가 나로움 후작가 방계의 며느리로 들어가게 됐고, 이때부터 케인도 후작가의 사람이 된 것이다.
한데 이번 일로 후작가가 몰락했고, 후작은 직계들만 챙겨 제국으로 넘어가 버렸다.
당연히 케인의 누나는 남겨진, 아니 사실상 버려진 상황.
평생을 모셔 온 주군이라고 하여 케인이 후작을 맘 편히 따라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케인 경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던 저예요. 그래서 늘 경이 안타깝기도 했고요. 맞지 않는 옷에 힘겨워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으니까.”
케인의 개인적 성향은 크리스토퍼나 나로움 후작가와 맞지 않았다.
얕은수나 부리는 쪽과는 상극이랄까?
적어도 레나의 판단에 따르면 그러했다.
케인 또한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과거 아카데미에서나 지금이나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런 말, 경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내심 기껍답니다. 경에 대한 그간의 안타까움을 해소할 기회가 찾아온 셈이니까.”
따라서 레나에게는 이 상황이 기회이기도 했다.
10년도 더 넘게 눈여겨봐 오던 인재를 그녀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
“경의 누님은 제가 특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누님의 자제들 역시 앞으로도 귀족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게 될 테고요. 또, 경만 동의한다면 다 같이 왕도 내 저택에서 머물게 해 드릴 생각이에요.”
“……정말이십니까?”
“제가 경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당연히 없었다.
1왕자가 몰락한 이상 케인의 커리어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케인에게 차기 국왕인 레나가 농담 따먹기나 하고 앉았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지난번 일이 있다 해도 전 결국 역적의 일원입니다. 왕녀님의 적이 도주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돕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런 건 아무런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제가 경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니까.”
“하지만…….”
“이성적인 걸 그리 따질 요량이었으면, 애초에 저를 보내 주지도 말았어야죠. 오늘은 저도 그때의 케인 경처럼 감정적으로 밀고 나갈 생각이랍니다. 저뿐만 아니라 라이도 그러길 원하고요.”
“라이라면, 라인하트 경 말씀입니까?”
끄덕.
“맞아요, 케인 경이 빚을 졌다던 그 라이. 경이 뒤에 남았다는 걸 안 순간, 라이가 모든 속도를 늦췄어요.”
사실 케인이 데리고 남은 전력은 억지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다.
머릿수만 따지면 그래도 4,000가량 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일반 병사에 불과했다.
기사를 비롯한 핵심 전력은 전부 1왕자를 따라간 것이다.
따라서 라이오넬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강행돌파 후 추격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그러지 않았다.
강행돌파 대신 전군의 속도를 늦췄다.
그러고는 뒤에 남은 병력을 최소한의 피로 제압하는 데에 주력했다.
“왜 그렇게까지……?”
“이유는 간단해요. 라이도 저처럼 케인 경과의 인연을 단순히 계산적인 관계에서 끝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거.”
“…….”
잠시 말문을 잃는 케인이었다.
“그러니까 케인 경.”
레나는 그런 케인에게 한 가지 제안이자 부탁을 건넸다.
케인을 향하는 눈빛에 그녀의 진심을 가득 담아.
“내 사람이 돼 주지 않겠어요?”
함께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레나, 그리고 라이오넬을 비롯한 그녀의 사람들 모두와.
…….
그 뒤로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다.
이 시간 동안 레나와 진솔한 대화를 마친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케인 경.”
꾸벅.
그러고는 인사만을 남긴 채 레나의 궁을 떠나갔다.
아직 가타부타 답을 주지 않은 채로 말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왕녀님.”
“사네 말처럼 됐으면 좋겠네요.”
어찌 보면 당장은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기사가 주군을 바꾸는 일이었다.
심지어 새로운 주군이 되고자 하는 이는 이전 주군의 정적이기까지 했다.
케인의 개인적인 마음뿐 아니라 세간의 시선 역시 곱지 못할 터.
결정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우리가 1왕자를 그냥 보내 줌으로써 타리우드 경도 짐을 많이 덜었을 테니까요.”
단, 그렇다고 해서 레나가 마냥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았다.
결정에 따를 케인의 부담감을 최소화해 주고 있었다.
그 시작은 크리스토퍼와 나로움 후작을 그냥 보내 준 것부터였다.
주지했다시피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추격 가능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케인이 지게 될 마음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함이었다.
실상이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그의 희생이 1왕자와 후작을 살린 셈이었다.
즉, 케인은 스스로를 내던지면서까지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달성한 것이다.
적어도 전향의 명분만큼은 확실하게 쌓았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기는 했다.
제국과는 이미 척을 질 대로 진 상황이기에 1왕자의 생존 여부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는 점, 뒤에 남은 병력은 어차피 슈라우드 동부군이라는 점 등이 그것.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케인 그 자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지시하신 대로 아카데미 임시교수직 하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총장도 타리우드 경이 온다고 하니 함박웃음을 짓더군요.”
“아카데미가 배출한 천재 중 한 명이니까요. 라이만 아니었다면 유일한 천재로 불렸을 게 분명하기도 하고. 어쨌든 수고했어요, 사네.”
아카데미 또한 이 부담감 최소화의 일환이었다.
아무리 명분이 있다 한들 마음의 결정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
아카데미 교수직은 이 시간을 벌어다 줄 예정이었다.
익숙한 아카데미 생활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질 테고 말이다.
이렇듯 명분 쌓기부터 시간 벌기까지, 케인이라는 최상의 인재 확보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에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제국이 병력 소집을 마무리 지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국경에 배치됐던 소드마스터들도 대거 자리를 비웠다고 합니다.”
제국은 슈라우드에 전면전을 선포해 왔다.
당연하게도 이는 단순한 선언에서 그치지 않았다.
엄청난 병력의 이동을 수반했다.
물경 38만의 병력이 집결했으며, 슈라우드로의 출병을 앞둔 상황이었다.
슈라우드의 운명이 바람 앞 촛불과도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고 여타 왕국의 움직임은 아직 포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박살 날 거라고 여길 테니까. 솔직히 반대 입장이면 저 역시 그랬을 거고.”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책임자들이 대거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대륙 전역의 왕국들은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비치기는커녕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움츠러들었다.
자칫 제국의 눈 밖에 나기라도 했다가는 그 뒷감당이 불가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왕국들의 눈에 슈라우드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직 한 번, 한 번은 더 증명해야만 해요. 우리 힘만으로, 제국도 결코 무적은 아니라는 걸.”
그래서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번 더 증명해 내야만 했다.
꼭 지난번처럼 전멸시키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국의 38만 대군 앞에서 당당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여 줘야만 했다.
그리하면 라이오넬이 심어 둔 씨앗들이 표면 위로 싹을 틔울 터였다.
본격적인 역습은 그때부터 시작일 터.
그렇기에 이번 전쟁이 어쩌면 마지막 고비라고 볼 수 있었다.
꽈아악.
그래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레나였다.
“왕녀님.”
“아…….”
“해낼 겁니다. 라이오넬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왕녀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녀석이라면 무조건 증명해 낼 겁니다.”
스르륵.
“그래요. 라이오넬이라면, 그 사람이라면 분명히 해낼 거예요. 우리에게 꿈을 심어 준 그 사람이라면 어떤 역경이 있다 해도 반드시.”
잠시 흔들리던 레나의 눈에 염원과 믿음이 돌아왔다.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염원과 믿음의 빛이었다.
그러고는 이 빛 그대로를 실은 채 창밖으로 향했다.
지금 이 순간, 그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을 동쪽을 향해.
* * *
“정보에 따르면 병력 38만이 세 갈래로 길을 잡아 출병했다고 하네. 이 중 기사만 물경 2만에 달한다더군.”
“역시 많긴 많군요.”
바르코스 후작이 정보를 전해 왔다.
출병을 마친 제국군 관련 소식이었다.
“어디 많다 뿐인가? 마스터 급은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란 말이지. 소드마스터만 무려 9명일세. 이 중 정령석을 섭취한 것으로 알려진 이만 최소 셋 이상이고. 제국 놈들의 음흉함으로 볼 때 아마 그 이상일 거야. 여기에 6서클 대마법사 두 명까지 더하면, 마스터 급만 무려 11명이네.”
“…….”
슈라우드 군 최고 수뇌부가 모여 있는 나로움 요새 지휘통제실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총 병력 38만에 마스터 급만 11명.
현재 총 병력 10만의 슈라우드 군과 비교한다면 압도적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아, 그리고 크로아티 에르나르 백작과 광휘의 군단이 약간 늦게 도착할 걸세. 라투이드 왕국에서 곧장 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더군.”
심지어 11명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조금 늦게 도착하는 크로아티 에르나르까지 더하면 무려 12명이었다.
정말 답도 없는 수치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 선택을 해야 하네. 세 갈래로 쳐들어오는 제국군에 맞춰 우리도 군을 나눌 것인지, 아니면 동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중부의 트리스타 요새에서 일대 결전을 벌일 것인지 말이야.”
“병력 배치가 어떻게 돼 있다고 합니까?”
“중군인 본대 20만이 이곳 나로움 요새로, 좌군 11만이 누바크 백작성으로, 그리고 우군 7만이 리브나로 백작성으로 각각 길을 잡았어.”
“마스터 급은요?”
“두 백작성에 각각 소드마스터 두 명씩. 그리고 에르나르 백작은 아직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나머지는 전부 이곳 나로움 요새를 향하는 중이야. 라이오넬 자네를 노골적으로 노리는 게지.”
“그렇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설명을 끝낸 바르코스 후작이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내 의중을 물어 왔다.
비단 후작만이 아니었다.
슈라우드 군 최고 수뇌부 전체의 시선이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에게 일제히 묻는 것이다.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 갈 수 있겠느냐고.
“싸웁니다.”
하여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답을 주었다.
이들에게 내가 해 줄 답은 어차피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제국 놈들에게 단 한 치도 이 땅을 내주지 않은 채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는 것.
그리하여 단 한 치의 땅도 저들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
지금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만 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우리 슈라우드의 힘을 만방에 증명합니다. 대륙 전체가 뒤집힐 수 있게.”
지금이야말로 대륙의 역사를 가를 분기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분기점에서 슈라우드는 물론이거니와 에펜시아 대륙 전체의 미래가 결정될 터였다.
“그러자면 병력을 나눠야 할 텐데, 이곳으로 향하는 중군을 감당 가능하겠나?”
“가능합니다. 제가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