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장: 역사의 한 페이지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전장 한복판에 휘몰아치는 태풍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미쳤다는 말조차 어쩌면 특권이라고 볼 수 있었다.
르로이가 슈라우드 군이기에 내뱉을 수 있는 일종의 감탄사였으니까.
제국군은 지금 이마저도 내뱉을 수 없는 처지였다.
“피, 피해야…….”
“X발! 저걸 어떻게 피해!!”
“으아아아…….”
콰과과과~!!
그들을 덮치고 있는 것이 거대한 자연재해였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재해 앞에서 평범한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날뛰다가 휘말리거나 혹은 망연자실 바라보기만 하다가 휘말리거나.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휘말려 올라가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노도 경!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아…….”
“노도 경! 아, 안 돼! 으아아아……!”
쿠과과과~!!
휘말림에 있어 기사인지 병사인지 역시 큰 차이는 없었다.
기사가 조금 더 버텨 본다뿐이지 어차피 휘말려 올라간다는 결론은 매한가지였다.
“진짜 미쳤다, 미쳤어.”
더욱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결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하여 제국군 전체를 패닉에 빠뜨려 버렸다.
특히 경로마저 제멋대로인 태풍의 진행 방향이 주효했다.
언제 어떻게 접근해 올지 모르니 다들 한 발짝이라도 더 멀어지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것이다.
이로 인해 제국군은 결국 통제 불능의 아비규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뭐 하냐, 빌어먹을 부하들아! 깡그리 다 쓸어버리지 않고!”
“오우! 쪼잔한 대장!”
“오우! 모태 솔로 대장!”
“오우! 독거노인!”
“쓸데없는 사족은 좀 빼라, 이 빌어먹을 것들아!”
이런 탐스러운 먹잇감을 그리핀 군단이 가만둘 리 만무했다.
보이는 대로 싹 다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핀 군단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5만의 슈라우드 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르코스 후작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장에는 일방적인 학살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 엘프, 저 엘프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수습할 수 있어!”
물론, 제국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곧장 이 상황의 핵심을 노렸다.
기사나 마법사 중 여유 되는 인원들이 일제히 그 엘프에게 달려든 것이다.
엘프는 전장 한복판에서 태풍을 불러일으켰고, 또 조종까지 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이렇다 할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누구라도 무방비 상태로 보는 것이 당연했다.
하여 질서나 계획 없이 다소 중구난방으로 달려드는 제국군이었다.
샤라락~
“무슨……!”
그러나 이는 커다란 패착이었다.
엘프는 전혀 무방비 상태가 아니었다.
무방비는커녕 바람과도 같은 표홀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그러면서 난무하는 오러와 마법 사이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샤악~ 샤아악~!
“크윽!”
“커헉!”
더욱이 그냥 빠져나가기만 하지도 않았다.
중구난방으로 달려드는 이들에게 한 줄기 바람까지 선물해 주었다.
받은 자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사신의 칼날을 말이다.
그렇게 제국군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하……, 이게 말이 돼?”
여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생생하게 눈에 담은 르로이였다.
그는 도저히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에펜시아 대륙의 상식상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륙을 지배하는 무적의 로만 제국군이었다.
한데, 그런 제국군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전투 시작 전 라이오넬이 선언했던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처절하고 처참하게.
“하아…….”
두근, 두근.
르로이는 확신했다.
라이오넬 본인과 그 측근들을 제외한다면, 대륙의 누구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라고.
따라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대륙 역사에 길이 남을 찬란한 기적.
후세의 입에 대대손손 오르내릴 그런 영광스러운 기적 말이다.
즉, 르로이는 지금 역사의 한 페이지에 우뚝 서 있는 셈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꽈악!
그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그의 가슴 속에서도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검이라도 꽉 쥐지 않으면 터져 버릴 것만 같이 뜨겁게 요동치는 무언가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지금 이 순간, 르로이에게 계산이나 계획 따위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내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들임에도 그러했다.
거짓말처럼 아예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무언가뿐.
“하아아…….”
이 터질 듯한 무언가를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무슨 방법을 취해야만 했다.
그리고 르로이는 그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우우우웅~
해서 르로이는 자신의 본능을 따랐다.
꽉 쥔 그의 검으로 오러를 밀어 넣었다.
어떠한 계산도 없이,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하아아아!!”
그러고는 곧장 요동치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르로이 자신의 손으로 이 위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서.
* * *
드러난 전력만 봤을 때 제국군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기본적인 베이스가 최정예 황제 직속 군단인 데다 마스터 급 실력자의 숫자도 둘이나 더 많았다.
도저히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조건인 것이다.
그런 만큼 자연스레 고정관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지만 않으면 결국 자신들이 승리한다는 안일함이랄까?
이에 따라 실제 지극히 정석적이고 안정적인 전략을 들고나온 제국이었다.
“…….”
그리고 이 덕에 일이 한층 더 쉬워졌다.
정석적이고 안정적인 전략은 분명 단단했으며, 그만큼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졌다.
역전을 노릴 만한 변수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제국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하니 전체가 다 흔들리는 중이었다.
흔들리는 정도를 넘어 와장창 무너지는 중이라고 봐야 했다.
역전의 실마리 같은 건 터럭만큼도 존재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랑데와 브루노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수밖에 없었다.
“…….”
나 또한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 이유는 두 사람과 정반대였다.
조금 전 밝혔던 그대로인 것이다.
나로서는 급할 게 없었다.
저들의 당황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오히려 좋았다.
그럴수록 제국군은 더더욱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테니까.
하여 가벼운 미소만을 입에 건 채 조용히 기다려 주는 중이었다.
“아……!”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이윽고 침묵이 깨져 나갔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브루노의 탄식으로부터였다.
“저 엘프 설마??”
“기억하는 모양이군요. 하긴, 아무리 먼 거리라 해도 아인한드라를 몰라본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브루노가 아인한드라를 기억해 냈다.
황태자의 근위기사였던 그 역시 노예경매장에서 아인한드라를 본 적 있는 것이다.
거리가 다소 멀긴 해도 소드마스터인 브루노 정도면 충분히 식별 가능할뿐더러, 아인한드라는 한번 보면 잊는 게 더 어려운 얼굴이기도 했다.
“그때 하이엘프를 탈출시킨 것이 네놈이었구나.”
끄덕.
“라이오넬 네놈, 설마 처음부터 우리 제국과 적대할 생각이었던 것이냐?”
“부정은 않지요.”
“감히!”
브루노가 오늘 처음으로 정답을 얘기했다.
10년도 더 전인 회귀 직후부터였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은.
그리고 오늘 이렇게 지난 시간의 결과물을 유감없이 선보이는 중이었다.
쿠콰과과과~!!
“백작,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발끈하려는 브루노를 그랑데가 만류했다.
그의 말마따나 두 사람은 지금 내 불순한 의도나 따지고 앉았을 때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그럴 여유 자체가 없었다.
나와 말씨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태풍은 휘몰아치고 있었다.
오로지 제국군을 향해서만.
“으음, 알겠습니다.”
브루노 또한 당연히 이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듯 브루노가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랑데가 곧장 움직임에 나섰다.
품속에서 웬 물건 하나를 꺼내더니 지체 없이 버튼을 누르는 그였다.
달칵.
우우웅~
버튼을 누르자마자 마력이 반응하는 것으로 봐서는 아티팩트였다.
그리고 그 용도 역시 금세 밝혀졌다.
“퇴각하라! 전군 퇴각하라!!”
뿌우우~
나로움 평원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국군의 퇴각을 알리는 나팔 소리였다.
결국은 인정한 것이다.
본인들의 완패임을.
또,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사실 역시도.
“백작.”
“……예, 각하.”
그런 뒤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끄덕이는 두 사람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가지를 준비하는 신호였다.
“분명 말했을 텐데요?”
이 한 가지가 무언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이들이 주고받는 눈빛만으로도 그 의미를 캐치 가능할 정도였다.
“난 당신들 곱게 보내 줄 생각 없다고.”
본인들 역시 몸을 빼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후속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랑데가 직접 전군 퇴각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줄 생각이 없었다.
되려 본격적인 전투 시작 전 이들에게 읊었던 경고를 그대로 이행할 작정이었다.
콰아아아~!
다시금 어둠을 유형화시켰다.
이미 소모된 정신력이 만만치 않기는 했다.
그래도 아직은 충분히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전장은 제국군이 뿜어내는 패닉의 소용돌이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어둠을 끌어 올리는 데에 있어 이보다 완벽한 조건은 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쉬아악~
드드드~
그랑데와 브루노도 이에 반응해 힘을 끌어 올렸다.
다만, 앞서와는 그 기세에 있어 차이가 컸다.
중심 자체를 뒤로 쭉 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 다 소극적인 방어에 치중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파앗!
해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짓쳐 들었다.
그러고는 여정을 내리그었다.
둘 모두를 범위에 담은 어둠과 함께.
쿠구구구!
하지만 이것이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그랑데와 브루노는 억지로 버티지 않았다.
찍어 누르는 어둠의 힘을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며 천천히 물러나는 두 사람이었다.
“크으읍, 각하.”
끄덕.
파바밧.
동시에 이들은 체계적인 후퇴 방법까지 실행했다.
한쪽이 많은 비중을 감당하며 잠깐 버티는 사이 나머지 한쪽이 크게 물러난다.
그런 뒤 다시 크게 물러난 쪽이 감당 비중을 늘리면 버티던 쪽이 물러나는 방식이었다.
급조한 것이겠으나 상당히 유효한 방식이기도 했다.
내 어둠의 힘이 그 짧은 순간 상대를 단숨에 무력화시킬 만큼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대로라면 둘의 후퇴를 두 눈 뜨고 허용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쿠구구구!
그럼에도 나는 딱히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따라가며 연속해서 찍어 누를 뿐이었다.
둘이 내 영역 밖으로 순식간에 달아나는 상황만 발생하지 않도록.
“흐읍!”
파바밧.
그사이 그랑데와 브루노의 물러남은 반복됐고, 후퇴하는 제국군 본대 근처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이제 두어 번만 더 하면 제국군 본대 사이로 들어갈 수 있을 터.
그리고 이번에는 그랑데가 버티는 사이 브루노가 물러난 참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슈아아악~
검디검은 무언가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오고 있었다.
화살에 버금가는 속도로.
그 방향은 정확히 나를 향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저, 저건……!”
막간의 여유를 가지게 된 브루노도 이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자 눈을 부릅뜨며 경악하는 반응을 보이는 그였다.
아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슈아아~ 타악!
하지만 의미를 파악했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카밀라의 손에서 화살처럼 쏘아져 온 검디검은 무언가.
심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무언가가 이미 내 손에 들어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웅웅웅웅~
사아아아아!
심연은 탐욕스러운 녀석이었다.
녀석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나와의 공명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여정 위에 넘실거리던 어둠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 탐욕에 걸맞게 족히 몇 배는 증폭시킨 채로.
“각하! 위험…….”
“늦었어.”
쿠콰과과과과!!
그렇게 나로움 평원 위로 거대하고도 흉폭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번 전쟁, 나아가 슈라우드 왕위 계승의 진정한 마무리를 선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