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장: 비밀무기
대지가 가로막고 바람이 잘라 냈다.
그럼에도 어둠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압박했다.
그 안에 실린 진중한 무게, 음습한 탐욕, 그리고 공명하는 감정들로.
“크으으.”
“무슨…….”
어둠은 대지와 바람의 주인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동시에 그들의 힘을 게걸스레 탐했으며,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까지 흘려보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신음과 당혹을 끌어내고 있었다.
‘으음.’
다만, 어둠의 주인인 나 역시 여유롭지는 못했다.
분명 내가 이 녀석의 주인인 것은 맞았다.
그러나 이 녀석은 제 주인이라고 해서 순종적으로 굴 놈이 못 됐다.
되려 제 주인조차도 기회만 되면 날름 집어삼키려 하는 놈이었다.
살짝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역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 터.
나 또한 막대한 정신력 소모를 대가로 의지를 가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즉, 충돌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내 손해 또한 누적되는 상황인 것이다.
정신적인 면만 놓고 보자면 그 정도는 상대들보다 몇 곱절 더 컸고 말이다.
드드드~
쉬아악~
쿠구구구구~!
그래도 이 정도 대가는 얼마든지 감수할 만했다.
한 번에 무려 두 명의 정령 소드마스터와 호각세를 펼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감수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고 봐야 했다.
콰과과광!!
결국, 팽팽하던 세 원소의 격돌은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그저 커다란 폭음과 충격파만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원소의 주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이렇다 할 타격은 입히지 못한 채 서너 발씩 뒤로 물러난 것이 전부였다.
“방심하지 않길 잘했군. 브루노 자네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솔직히 어려웠겠어.”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저 힘과 맞서는 것이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군요.”
“대단한 힘이야. 확실히 폐하께서 신신당부하실 만해.”
격돌의 여파가 잦아든 뒤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대신 긴장감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나에 대한 경계심을 잔뜩 끌어 올린 그랑데와 브루노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저 힘을 벌써 끌어냈다는 건 그만큼 놈도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하긴, 그런 뜻도 되겠지.”
단, 긴장감과 경계심에서 끝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위기의식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어둠의 유형화가 이들에게는 오히려 그 근거로 작용하고 있었다.
“어떠냐, 라이오넬? 네놈이 기껏 준비해 둔 최후의 수가 이리 허무하게 막힌 기분이. 이제 좀 초조해지나?”
“최후의 수? 초조?”
“허세 부려 봤자 소용없다. 네놈 밑천은 이미 드러났어. 네놈은 무슨 수를 써도 각하와 나를 넘어서지 못해.”
“피차일반 아니오? 어차피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이들이 어둠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신음을 흘리거나 당혹의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을 터.
어둠이 발산하는 힘은 이들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며, 이들 역시 나와 호각을 유지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했다.
“네놈과 우리의 처지가 같다고 보나? 우리를 받치고 있는 건 제국군이다. 네놈을 이렇게 묶어 두기만 해도 우리로서는 급할 게 없어.”
하나, 딛고 서 있는 배경에 차이가 있었다.
무적이라 불리는 로만 제국군과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슈라우드 왕국군.
이 배경의 차이로 인한 유불리는 분명히, 그것도 상당히 커다랗게 존재했다.
더구나 보유한 마스터 급 실력자 숫자 역시 제국이 둘이나 앞서기까지 한 상황.
브루노의 자신감은 이런 차이들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름 명확한 근거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음,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당신의 말에는 동의해 줄 수가 없겠군요.”
문제는 이 자신감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그러했다.
내 기준에서 이것은 완전히 헛다리에 지나지 않았다.
“왜, 또 무슨 숨겨 둔 힘이라도 있다고 할 작정이냐?”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쯧쯧쯧, 끝까지 허세는. 그 검은 힘마저 통하지 않은 마당에 네놈에게 숨겨 둔 힘은 무슨…….”
“난 내 힘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숨겨 둔 힘이 꼭 내 힘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근거부터가 글러 먹었다.
브루노와 그랑데 입장에서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다.
배경의 차이로 인한 유불리가 분명 존재하기는 했다.
단, 이들의 판단과는 정반대로.
“뭐?”
“내 힘 말고 내 사람들의 힘이거든. 그래서 나야말로 오히려 당신들보다 더 급할 게 없는 거고.”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유리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내 사람들의 힘은 제국이 추정하는 수준을 뛰어넘었으니까.
그들이 나 대신 알아서 전장을 휩쓸어 줄 터였다.
따라서 이 둘이 나에게 접근해 온 순간부터 내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전황이 굳어질 때까지 이들을 나에게 꽉 붙잡아 두는 것.
“이제 슬슬 보일 때가 됐지 싶은데. 아, 시작은 저쪽인가?”
“안개……?”
이 목표는 현재 차질없이 이행 중에 있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전장 한복판에 뜬금없이 피어오른 안개였다.
화창한 날씨와는 모순된 이 현상의 발생 장소는 카밀라와 두 소드마스터가 만난 곳.
“누가 쓸데없는 마법이라도 쓴 모양인데, 저게 어쨌다는 거지? 뭐, 저 안개가 소드마스터마저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냐?”
“당연히 안개는 못 하지. 죽이는 건 저 안개 안에 들어가 있는 녀석이 할 일이니까.”
안개는 미리 약속된 시그널이기도 했다.
카밀라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했다는 시그널 말이다.
저 안에서는 지금 누군가의 생과 사가 갈리고 있을 터였다.
단지 짙은 안개 때문에 먼 거리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
“궁지에 몰리면서 판단력도 같이 흐려진 건가? 저런 잡술 따위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이 때문인지 브루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내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마는 그였다.
샤아아아~
“소드마스터들의 감각이 고작 안개에 흔들릴 만큼…….”
“백작! 다스 백작!”
“각하?”
“저길 보게!”
콰아아아아~!!
“무, 무슨……!!”
하지만 그런 브루노조차도 현현한 두 번째 증거에 대해서는 비웃지 못했다.
반대로 경악했다.
그의 눈에도 똑똑히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장에 휘몰아치는 그 압도적인 위용과 파괴력이.
“샤테이어라고, 바람을 이끄는 바람입니다. 내 친구의 동반자이기도 하고. 어떻게, 저 녀석 정도면 믿을 만하겠어요?”
이번 전투를 종결지을 진정한 비밀무기의 등장이었다.
* * *
‘이거 맞아?’
르로이 발터우스는 고민했다.
이게 맞는 것인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된 그였다.
‘분명 타이밍을 재려고 했는데, 어째 분위기가…….’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적당한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가 임시로 속해 있는 그리핀 군단의 대열을 중도 이탈하기 위함이었다.
라이오넬과 전투밖에 모르는 이 미친놈들이 제국군의 정중앙을 돌파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친 짓도 이런 미친 짓거리가 따로 없었다.
이건 그냥 죽고 싶어 환장했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이 미친놈들과 달리 르로이는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었다.
또한, 제정신인 그는 살고 싶었다.
당장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그의 지상 명제였다.
해서 전투가 시작되거든 적당한 타이밍을 잡아 죽은 척 시체로 위장할 계획이었다.
이것만이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쁘지만은 않단 말이지?’
그런데 진격이 시작되고, 군단이 제국군과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시점부터였다.
그때부터 확고했던 르로이의 계산과 계획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충돌의 첫 양상부터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중앙에 포진한 제국의 기사단과 정면충돌하는 일이었다.
상식대로라면 거기서 이미 풍비박산 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르로이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갈려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밀어붙이는 그리핀 군단이었다.
‘저것들이 세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리핀 군단 내에 기사의 부재를 메워 줄 만한 전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히 메우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웬만한 기사단 따위는 가볍게 압도하는 전력이고 그런 존재들이었다.
“드워프의 철포 사이사이를 우리 일족이 메운다.”
슈슈슈슉~!
정령력이 깃든 화살과 단검 따위가 제국군을 신속하게 유린했고.
“엘프들이 엄호해 준다. 1열만 방어대형 취하고 나머지는 곧바로 장전해.”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발포!”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이어서 드워프의 철포가 제국군을 처참하게 찢어 놓았다.
잽과 스트레이트의 조화가 절묘하게 맞아 드는 것이다.
반면 초 근접전이 펼쳐질 때는 이 역할이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드워프의 방패와 도끼 따위가 적의 공격을 방어하면, 이 틈새로 엘프들의 날랜 공격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제국의 기사들은 이런 두 종족의 유기적인 합동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속절없이 밀려나며 그리핀 군단에 길을 내줄 뿐이었다.
‘거 참, 저 찾기도 힘든 엘프와 드워프는 대체 무슨 수로 구슬린 건지…….’
충돌 직전 군단의 중앙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종족들이었다.
이들이 그리핀 군단의 진격에 날개를 달아 주고 있었다.
설령 제국군이라 해도 일반 병사들은 처음부터 그리핀 군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단지 걸림돌이 되는 것은 제국의 기사단뿐이었는데, 이 문제를 이종족들이 깔끔하게 해결해 준 것이다.
덕분에 그리핀 군단은 거침없이 제국군의 정중앙을 파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파고들려는 거야? 진짜 이대로 끝까지 가로지르려고? 아무리 분위기가 좋다 해도 그건 좀 오버 아닌가?’
다만, 이놈의 미친 군단은 적당히라는 것을 몰랐다.
본대와의 호응 같은 건 염두에 두지조차 않았다.
그저 앞만 바라본 채 전진할 뿐이었다.
이러다 잘못하면 본대와 뚝 떨어져 적진 한가운데에 홀로 고립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이야 파죽지세라지만 상대는 제국이었다.
이 분위기가 꼭 끝까지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각을 잡아 봐야 하나? 지금이라도 떨어져 나가? 으음, 어떻게 해야…….’
이로 인해 갈팡질팡하게 되는 르로이였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도저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든 결정의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확실한 무언가가 절실한 타이밍이었다.
샤아아아~
“응?”
그때였다.
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군단의 중앙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최후미에 있는 르로이조차 또렷하게 감지할 만큼 선명한 바람이기도 했다.
콰아아아아~!
단순히 선명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강력한 것으로 나아갔다.
르로이가 느꼈다 싶은 순간 바람은 더 이상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돌풍이었다.
“어어??”
쿠콰과과과과~!!
아니, 강력함조차도 사뿐히 뛰어넘었다.
자연재해 앞에 강력함이니 뭐니 따위의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돌풍이라 느낀 순간 이미 돌풍도 아니게 된 것이다.
이제는 태풍이었다.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불과했다.
그저 선명한 바람이라고 느꼈던 것이 자연 재해급 태풍으로 발전하기까지의 시간은.
“말도 안 돼.”
르로이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어디 르로이뿐이겠는가?
이곳 나로움 평원에 있는 모두가 처음 접하는 광경일 터였다.
전장의 모든 이목이 쏠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이 이목은 자연스레 태풍의 근원지로까지 이어졌고 말이다.
“엘프…….”
그곳에는 한 엘프가 서 있었다.
천사를 빚어낸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름답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한 외양의 엘프였다.
하지만 르로이는 장담 가능했다.
지금 저 엘프를 보며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찬미하는 얼빠진 놈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지금 이 순간 외양 따위는 하등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저 엘프가 모두의 앞에 펼쳐진 자연재해의 주인이라는 점이었다.
“우, 움직인다.”
나아가 그가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제국의 본진 한가운데를 향해서.
본인이 탄생시킨 자연재해와 함께.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