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152화 (153/200)

90장: 예정된 수순

“나를 역적으로 선포했다고요?”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전국에서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르지 않을 시 왕자님께 가담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덧붙였다는군요.”

“계집 따위가 감히 누구에게…….”

나로움 후작이 새로운 소식을 들고 왔다.

지난 왕궁 사태의 뒤처리에 관한 소식이었다.

뒤처리는 결국 예정된 수순대로 흘러갔다.

크리스토퍼에 대한 역적 선포, 그리고 역적 진압을 위한 전국 소집령.

왕궁 전복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이는 당연한 대가라고 볼 수 있었다.

“후우, 그래서 우리 쪽은요?”

“곧바로 맞대응에 나설 겁니다. 모든 것이 왕자님을 끌어내리기 위한 왕녀의 음모라고 말이지요. 다만…….”

“먹히지 않으리라는 겁니까?”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왕자님. 상황이 상황인지라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애초에 계승권 경쟁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던 레나였다.

더욱이 지난 곡물 파동을 통해서 완벽한 굳히기에 들어간 상황.

그런 레나가 이와 같은 사태를 일으킨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귀족들도 바보가 아닐진대 크리스토퍼 측의 주장에 동조할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오브리가 국왕의 존재가 주효했다.

국왕의 행동은 크리스토퍼가 그를 확보했을 때와 180도 달랐다.

그는 더 이상 무기력하게 앉아 있기만 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전면에 나섰고, 그럼으로써 본인의 입으로 직접 선포했다.

크리스토퍼가 슈라우드의 역적이라고 말이다.

사실상 명분 싸움은 이걸로 끝이었다.

국왕이 크리스토퍼를 죄인이라 단정 지어 버린 이상, 이쪽에서 뭘 어떻게 해 볼 여지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럼 결국 이대로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모이는 병력은요? 저쪽에 얼마나 모일 것 같답니까?”

“동부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소집 중이니만큼 5만가량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으으음, 우리 병력이 고작 8천밖에 안 되는데…….”

“비단 병력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저쪽의 실력자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왕자님도 전해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 카디즈 군도에서 그리핀 군단의 부군단장인 다이너 브란부르크가 소드마스터에 올랐다는 소식 말입니다.”

당연히 들었다.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슈라우드에 또 다른 천재가 탄생했다고 대륙 전체가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드마스터에 오르자마자 해적왕 어딘손 토르웨이마저 꺾어 버린 상황.

대륙 전체가 들썩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에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토퍼였다.

“더구나 그자만이 아닙니다. 집무실에 나타난 그 카밀라라는 괴상한 여자. 정체불명의 그 여자도 제국의 소드마스터에게 우위를 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왕녀 쪽에 실력 있는 소드마스터가 하나 더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겁니다.”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카밀라라는 존재 또한 심각한 문젯거리였다.

그 여자가 소드마스터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기술의 사특함과 요사스러움으로 인해 정확한 판단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결과적으로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힘으로 눌렸다.

이는 곧 그 여자가 소드마스터 이상 가는 힘을 지녔다는 의미.

어떤 존재이든 크리스토퍼 측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리라는 점은 어차피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마탑입니다. 더 이상 내전이 아니게 된 만큼 그쪽도 간과해서는 안 되지요. 어쩌면 대마법사 막시무스 슈러그혼이 직접 참전할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그와 왕녀의 우호적인 관계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마지막으로 슈라우드 마탑.

이번에는 마탑의 마법사들도 계산에 넣어야만 했다.

왕국의 적과 싸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마탑이라 하더라도 이건 경우가 다른 것이다.

“하아아, 그것들이 있었군요. 아카데미 출신 두 연놈과 그 스승.”

센트럼과 베로카의 힘은 얼마 전 바이퍼 백작가의 몰락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었다.

이들 단둘에게 영지 하나와 바이퍼 백작가의 마법 부대가 일거에 쓸려 나갔다.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고작 제자들의 힘이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스승이자 6서클 대마법사인 막시무스 슈러그혼은?

크리스토퍼와 동부 입장에서는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는 부분인 것이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겠군요.”

여기까지 온 이상 이다음 수순 역시 정해져 있었다.

외세, 즉 로만 제국의 개입.

끄덕.

“예,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대가를 내주고서라도.”

물론 지금까지 제국이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국은 그간 줄기차게 슈라우드 내부의 일에 개입해 왔다.

나아가 이번 사태는 사실상 제국이 다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슈라우드 왕궁 전복을 위해 소드마스터를 무려 셋이나 보내온 제국이었으니까.

다만, 이는 전부 비공식적인 것들이었다.

지금껏 제국이 드러내 놓고 슈라우드 내정에 개입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비공식적으로 간섭해 왔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카일 이반과 통신을 하고 온 참입니다.”

“카일 이반과요? 그래서 뭐랍니까? 설마 제국이 이제 와 발을 뺀다거나 하지는 않았겠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 이상의 개입을 위해서는 제국에도 명시적인 근거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명시적인 근거라면?”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제국의 공식적인 파병을 바란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내놓으라는 거지요.”

하나, 이제는 비공식적인 개입만으로 해결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

대규모 전쟁이 예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쪽으로 완벽히 기울어져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이.

이런 상황이니만큼 유의미한 개입을 위해서는 제국도 공식적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공식적인 개입이란 결국 제국군의 정식 파병뿐인 것이다.

“카일 이반 그자가 말을 빙빙 돌리기는 했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대충 알겠더군요. 제국은 이베리아 영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베리아 영지라…….”

대신 제국은 크리스토퍼에게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영지의 할양이 바로 그것이었다.

왕국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거절함이 옳았다.

영지 자체가 지니는 곡창지대로서의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왕국이 무려 30년을 쏟은 곳이었다.

그런 곳을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이리 쉽게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일국의 1왕자라면 그래야만 했다.

“좋습니다. 내준다고 하세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왕자님.”

하지만 지금 크리스토퍼의 눈에 1왕자로서의 책임 같은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본인은 레나에게 빼앗겼다 여기는 1왕자로서의 권리.

오직 이것을 되찾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는 나로움 후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고 말이다.

“단, 분명히 전하세요. 이베리아 영지를 내주는 대신, 이번만큼은 제국에서도 확실한 전력을 보내와야 한다고요. 레나와 라이오넬, 그 연놈들을 처참하게 짓밟아 줄 수 있는 보다 확실한 전력을요.”

* * *

“이건 명백한 내정간섭이자 침략입니다. 당장 병력을 물리라는 것이 우리 슈라우드의 공식 입장이에요.”

―애석하지만 제국은 견해가 다릅니다, 왕녀님. 우리 제국은 슈라우드로의 파병을 내정간섭으로 보지 않습니다. 침략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지요.

“그럼, 무슨 의도라는 거죠?”

―대륙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차원이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륙의 질서와 평화 유지라……. 이 말을 이반 자작 입으로 들으니 감회가 참 새롭네요.”

―저런, 그러십니까? 이거 참 안타깝게 됐군요.

소집령에 따라 동부를 제외한 전역에서 5만의 대병이 모였다.

그리고 이제는 나로움 영지를 향한 출병만을 앞둔 시점이었다.

한데, 이 시점에 제국이 대놓고 끼어들었다.

크리스토퍼에 대한 지원을 공표하며 대규모 병력을 슈라우드로 출병시킨 것이다.

레나는 현재 카일 이반과의 통신을 통해 이 점에 대해 공식 항의 중이었다.

이는 명백한 내정간섭이고 침략이라고 말이다.

―다만, 우리 제국 역시 왕녀님의 견해가 슈라우드 공식 입장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국이 인정하는 슈라우드 왕국의 정식 후계자는 어디까지나 적장자인 크리스토퍼 1왕자님뿐이신지라.

물론 항의 같은 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런 1왕자님께서 대륙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제국은 이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슈라우드의 국왕이신 아바마마께서 직접 1왕자를 역적으로 선포하셨어요. 그런데도 시시비비를 가려야겠다는 건가요?”

―그 선포, 오브리가 국왕 전하의 자발적 의지가 확실한지요? 제국은 그 선포 자체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계승 서열 1순위인 1왕자님을 제치고 말석인 왕녀님께서 계승을 앞둔 것부터가 지나치게 비정상적이다 보니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제국의 공식 입장은 확실히 전달받았어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할 듯하군요.”

어차피 무언가를 기대하고 시작한 대화가 아니었다.

그저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을 뿐.

하여 레나도 굳이 시간을 더 끌지 않았다.

―뭐, 왕녀님께서 그러시다면야. 아, 혹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건 비공식적인 제 개인 의견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말하세요.”

―지금이라도 폐하께 무릎 꿇고 자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왕녀님과 라이오넬 경에 대한 폐하의 분노가 가볍지는 않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워낙에 관대하신 분. 두 분께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받아 주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게 다인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다만 흘려듣지 말고 꼭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왕국도 살고, 왕녀님께서도 사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테니 말입니다.

“충고 잘 들었어요. 그럼 나도 조만간 그에 대한 답을 꼭 주도록 하죠.”

―예. 기쁜 마음으로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녀님.

이렇게 각국의 공식 입장이 오간 통신이 종료됐다.

그리고 이로써 슈라우드와 로만 제국의 전쟁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역시나 완전히 노골적으로 나오네요.”

“이미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하죠. 단지, 이제 정말로 제국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고 생각하니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요.”

“왕녀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 두렵기까지 하니까요.”

“라이가요? 라이가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현실성이 없는 것 같은데…….”

“저도 사람입니다, 왕녀님.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대가 무려 그 제국인 것을요.”

제국은 황제 직속 6개 군단 3만 병력을 슈라우드로 출병시켰다.

이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비록 우리 쪽 병력이 수적으로 더 많기는 하나, 상대는 무려 황제 직속 군단.

기본적인 훈련도 및 전투력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마저도 핵심은 아니었다.

핵심은 이 황제 직속 군단을 이끌고 슈라우드로 향하는 제국군 지휘부에 있었다.

지휘부의 면면이 아예 기함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안에 포함된 소드마스터의 숫자가 무려 여섯이나 됐다.

더구나 이 중 정령석을 섭취한 이들이 적어도 셋은 존재했다.

지난 황제 즉위식 경연에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자들이니만큼, 이는 틀림없는 사실.

어쩌면 이보다 더 존재할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6서클 대마법사 하나까지.

이쯤 되면 왕국 세 개쯤은 가볍게 찜쪄먹을 수 있는 전력이라고 봐야 했다.

“분명 감당이 버거운 수준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 우리가 해 온 그간의 준비를 믿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동시에 그만큼 자신도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결코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을 자신이.”

“그래요, 무조건 그래야죠. 다 같이 준비해 온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럼에도 우리는 주눅 들지 않았다.

나와 레나는 물론이고, 우리 사람들 모두 충분히 해볼 만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만큼 모두가 함께 오랜 시간을 공들여 준비해 온 일인 것이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할 생각인가요?”

“예. 지금 출발해야 늦지 않게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준비 마친 뒤에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라이, 부디 무운을 빌어요.”

“염려 마십시오, 왕녀님. 제국 놈들에게 기필코 한 방 제대로 먹여 주고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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