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장: 실패한 계략이 남긴 것
타다다닷.
“또?”
나는 절레절레 고개 저을 수밖에 없었다.
멀어져 가는 브루노 다스 때문이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치는 그의 뒷모습이 절로 감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베리아 평원 대결전 직후의 일까지 따지면 벌써 두 번째 줄행랑이었다.
“으음,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지난번 것은 나름의 면죄부를 줄 수 있었다.
지난번 줄행랑은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그 상황의 주재자였던 내 허락을 받았던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한데, 이번 줄행랑은 완전히 달랐다.
상황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이었다.
형세가 불리해졌다 하나 아직 대결이 한창인 와중에, 그것도 동료를 내팽개치고 혼자 줄행랑친 것이다.
사태의 정확한 내막은 이러했다.
나는 집무실 소식이 전달된 그 시점을 놓치지 않았다.
브루노와 제국의 또 다른 소드마스터가 당황한 틈을 곧바로 치고 들어갔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브로든과 타로쉬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로든은 변칙 검술을 펼치고 들어갔으며, 타로쉬핸드는 철포를 발사했다.
오직 한 타깃, 제국의 또 다른 소드마스터를 노리고서.
정문 도달 전 미리 얘기를 맞춘 상황이니만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동시에.
여기에 추가적으로 내 어둠이 작용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에게 생긴 당황이라는 감정을 한층 더 증폭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세했던 틈을 순간적으로 커다랗게 벌려 놓았다.
이렇게 벌어진 틈을 내 검은 당연히 가만두지 않았고 말이다.
그리하여 소드마스터는 가슴에 깊숙한 검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이었다.
브루노 다스가 등을 보인 것은.
내 검이 소드마스터를 사실상 전투 불능에 빠지게 만든 그 순간, 브루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택을 내린 것이다.
동료를 내팽개쳐 둔 채 혼자 줄행랑치기로.
“라이, 저놈 전사가 맞기는 한 거냐?”
“그러게. 더러운 일들에 손을 너무 많이 담가서 그런가? 그렇다 해도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타로쉬핸드의 질문에 나도 딱히 뭐라 답해 줄 말이 없었다.
브루노 다스 정도면 대륙에서 못해도 15인 안에는 꼽힐 만한 실력자였다.
더욱이 제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기까지 했다.
그 정도 인물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참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뭐, 어쨌든 덕분에 정리는 빨리 끝나게 생겼으니까.”
물론 브루노의 도주가 우리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달아난 이상 이곳은 정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소극적으로 자리나 지킬 뿐이던 왕도 수비군.
검에 맞고 바닥에 쓰러진 채 연신 꿈틀거리는 이름 모를 제국의 소드마스터.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바짝 긴장한 1왕자의 병력.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르로이 발터우스까지.
그저 말 몇 마디로 이들을 무장해제시키기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자잘한 뒷정리야 이때를 위해 데리고 온 아카데미 생도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자, 그럼.”
그래서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불렀다.
당황해서 멍청하게 도망조차 치지 못하고 있는 그 이름을.
“르로이 선배.”
“…….”
“상황 파악은 대충 되지, 선배?”
“아…….”
“이런, 아직 안 되나 보네.”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르로이였다.
하여 왠지 이 밉지 않은 선배에게 후배로서 약간의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잘 들어. 집무실 상황은 종료됐어. 국왕 전하는 우리 쪽에서 확보했고, 1왕자는 아마 지금쯤 다급하게 궁을 빠져나가고 있을 거야. 추가 전령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선배와 이곳 병력은 버려진 거라고 봐야겠지? 여기 상황이야, 지금 선배가 보는 그대로고.”
“아아…….”
“자, 그럼 지금 선배가 해야 할 일은 뭐겠어? 깊지도 않은 충성심 억지로 쥐어짜다가 괜히 피 보지 말고 그냥 항복하는 거겠지?”
“그, 그게…….”
“뭐 해, 얼른 문 안 열고?”
잠시 후, 왕궁의 정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것으로 슈라우드 왕궁에서 벌어진 모든 상황이 종결되었다.
아이단 황제와 크리스토퍼 1왕자의 완벽한 실패라는 더할 나위 없는 결말로.
* * *
“여~ 다이너.”
어딘손 토르웨이는 인정했다.
지난 대회전은 어딘손과 해적들의 패배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명시적인 결과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지난 회전의 목적은 분명했다.
슈라우드 원정군의 궤멸.
아이단 황제야 그냥 카디즈 군도에 붙잡아 두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나, 어딘손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놈이 원인이었다.
그놈이 감히 국왕인 어딘손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치욕을 안겨 준 것이다.
하여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과 관련된 것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목적은 달성 실패였다.
슈라우드 원정군의 궤멸은커녕 이들에게 제대로 된 피해조차 입히지 못했다.
되려 호기롭게 달려든 군도의 해적들만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어딘손이 웬 잡놈에게 묶여 있는 사이, 그리핀 군단이 해적들을 완전히 갈아 버린 것이다.
내륙에서 입은 병력 손실과 이번 회전에서의 피해까지, 더는 대규모 병력 결집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래서였다.
어딘손이 전략을 수정한 것은.
그는 더 이상 정면대결을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게릴라를 선택했다.
소수 정예만으로 출항하려는 슈라우드 군을 지속적으로 건드리는 작전,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들의 회군을 저지하는 작전 말이다.
어딘손은 이를 통해 지난 패배를 만회할 생각이었다.
또 라이오넬과 다이너, 이 두 잡놈에게 처절한 쓴맛을 맛보게 해 줄 작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유효적절하게 먹혀들고 있었다.
소수 정예 해적들만을 데리고 습격해 들어가는 어딘손을 슈라우드 군은 어찌하지 못했다.
치고 빠지는 어딘손을 따라잡을 방안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찌르면 찌르는 대로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물론, 다이너와 그리핀 군단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마음먹고 게릴라를 시작한 어딘손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다이너가 한계 이상의 힘을 내고 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소드 익스퍼트.
소드마스터의 힘과 속도를 앞지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연스레 이들의 도착 시점은 이미 습격지점이 초토화된 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누적되어 가는 것은 전체적인 병력과 물자 피해만이 아니었다.
개별적인 것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슈라우드 군에게 도사린 진정한 위험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의 누적에 비하면 전체적인 피해쯤은 신경 쓸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어떻게 몸은 좀 괜찮나?”
“…….”
“괜찮았으면 좋겠군. 말짱한 상태여야 한 점 한 점 포 떠질 때마다 그 고통도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테니.”
바로 다이너의 몸 상태였다.
다이너의 몸 상태는 현재 악화에 악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다 다이너가 쓰러지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고 봐야 했다.
슈라우드 측에 더는 어딘손에 대한 억제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친놈.”
“날 미치게 만든 장본인이 그리 말해 주니 듣기가 퍽 나쁘지 않아.”
수시로 이루어지는 어딘손의 게릴라.
어딘손은 이 과정에서 다이너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절대 빼먹지 않았다.
치고 나가기 전 마무리 절차로 반드시 다이너와 직접 충돌했다.
그럼으로써 다이너를 지속적으로 약화시켜 나갔다.
주지했다시피 다이너는 어디까지나 소드 익스퍼트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소드마스터인 어딘손에게 대항하려면 일격 일격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다.
즉, 충돌 시마다 상당한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 결과, 다이너의 현재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어딘손이 직접 속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나,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주륵.
가만히 서 있는 와중에도 입가로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내상이 심각한 수준까지 누적되었다는 방증이었다.
스윽.
“명색이 소드마스터에 자칭 국왕이라는 놈이 쪼잔하기는. 아주 그냥 밴댕이 소갈딱지가 따로 없어.”
별거 아니라는 듯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아무렇지 않게 닦아 내는 다이너.
더불어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입도 놀리는 그였다.
“아직도 입은 살아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여. 그 정도 입이면 신음도 참 찰지게 뱉을 수 있을 테니까. 어때, 기대되지 않나? 난 지금 흥분돼서 도저히 참기가 어려울 지경인데.”
하나, 그래 봤자였다.
어차피 허세에 지나지 않았다.
다이너의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툭 치는 것만으로도 억하고 죽을 수 있는 단계인 것이다.
정신력으로 어찌어찌 버티는 듯하지만, 그것도 정도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 이상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부터 시작할 작정이거든. 네놈을 포 뜨는 일 말이야.”
밑 작업은 이만하면 넘치도록 충분했다.
검격 서너 번이면 다이너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 터.
해서 더는 끌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딘손은 마음먹었다.
오늘 다이너 놈을 끌고 가기로.
그리하여 지옥을 선사해 주기로.
아주 천천히, 오래도록 지속될 처절하고도 끔찍한 지옥을 말이다.
“어디 해 보든가, 쪼잔한 변태 새끼야.”
“오냐, 짐이 친히 은혜를 베풀어 네놈 소원대로 해 주마.”
지이잉!
마음을 먹었으니 실행만 남은 상황.
어딘손은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짓쳐 들었다.
슈아악~!
복잡한 기교나 기술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단순하게 수직으로 내려찍을 뿐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지극히 단순한 내려 베기조차도 엄청난 기교고 끔찍한 기술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다이너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콰과광!
그랬다.
다이너는 이 단순한 일격조차 피하거나 흘리지 못했다.
제자리에서 온몸으로 받아 냈다.
현재 몸 상태로는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쿨럭, 쿨럭.”
물론 어찌어찌 버티기는 했다.
예의 그 오러와 정령력의 조합이었다.
검 위에 오러와 대지를 덧씌워 오러 블레이드를 견뎌 내는 방식.
이것으로 그간 어딘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온 다이너였다.
그러나 어딘손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 기적과도 같은 방식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슈아악~!
지체 없이 이격째를 펼쳐나갔다.
앞서와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수직 내려찍기.
쿠과광!
“커헉……! 쿨럭, 쿨럭, 우웨엑.”
이번에도 다이너는 가까스로 막아 냈다.
대신 그 반응만큼은 앞서보다 훨씬 다이내믹했다.
고통 어린 신음과 기침에 이어 상당한 토혈까지.
누가 봐도 딱 죽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었다.
슈아악~!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어딘손이 아니었다.
안쓰러움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품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희열과 쾌락이었다.
지난 치욕을 대갚음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희열과 쾌락.
지금 어딘손에게는 이것을 더더욱 즐기고 극대화할 생각뿐이었다.
그렇기에 곧바로 세 번째 내려찍기를 시행하는 그였다.
콰과과광!!
“그르륵…….”
막아는 냈다.
그러나 이제는 신음이나 기침조차 뱉어 내지 못하는 다이너였다.
들끓는 피 가래가 목구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피 가래만이 아니었다.
얼굴은 이미 시체처럼 완전히 창백해졌으며, 검을 쥔 손은 덜덜 떨리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검을 들어 올릴 수나 있을지 의심마저 들 지경이랄까?
슈아악~!
해서 어딘손은 확신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스윽.
부들부들.
그래도 검을 들어 올리기는 했다.
나아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방어 자세도 취하는 다이너였다.
어차피 어딘손 눈에는 다 부질없는 몸부림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끝내자.”
그렇게 네 번째이자 마지막 검격이 다이너의 머리를 향해 가차 없이 떨어져 내렸다.
쿠과과과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