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장: 애완견과 겁쟁이
“그래, 안다 알아. 에휴, 위험한 용병 일하다가 편히 좀 살자고 다 버리고 왔더니 말년에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브로든이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나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냥 팔자려니 생각하세요. 혹은 첫사랑한테 지으신 죄를 제자 잘못 둔 것으로 대신 푸는 중이라 생각하시면…….”
“어쭈, 소드마스터라 이거냐? 슈라우드의 영웅쯤 되면 스승의 아픈 과거를 함부로 떠들고 다녀도 되는 거야? 앙?”
“에이, 말씀은 바로 하셔야죠. 술만 드시면 지겹도록 떠드시는 분이 누군데요? 왕녀님과 저, 사네 모두 귀에 인이 박였습니다. 어디 저희뿐이겠어요? 솔직히 저기 뒤에 있는 생도들 전부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어떻게 내기라도 할까요?”
“흠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어쨌든 생도들 위험할 일은 없다는 거잖아. 일단 그거면 됐다. 벌써 다 오기도 했고.”
그렇게 브로든과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이내 눈앞에 두게 되었다.
슈라우드 왕궁 정문이었다.
그곳에 버티고 선 왕도 수비군, 그리고 이번 사태의 원흉들까지.
“왕녀님 예상대로네요. 둘입니다.”
“둘이라……. 후우, 역시 쉽지 않겠어.”
“그럴 겁니다. 더구나 하나는 제가 아는 그자이기도 하고요. 그럼 준비하고 계세요. 타로쉬핸드, 너도.”
정문 도달 직후,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정문 성벽 위에서 어떤 인물 하나가 말을 걸어 왔다.
“왔군, 라이오넬 라인하트?”
“어? 이게 누구야?”
아주 익숙한 인물이었다.
다만, 정말 오랜만에 마주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약간은 반가운 감정마저 일 지경이었다.
“오랜만이네, 르로이 선배.”
그는 바로 르로이 발터우스.
북부 발터우스 자작가의 장남이자 사네의 이복형이었다.
사네를 무던히도 괴롭히던 그 모지리 말이다.
“네놈의 그 위아래 없는 말버릇은 여전하구나.”
“그래? 우리 꽤 친한 거 아니었어? 아카데미 시절에는 내가 말 놨어도 딱히 지적한 적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거야 네, 네놈이……, 큼큼.”
분명 모지리인 데다 미운 짓만 골라 하던 놈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밉지 않던 놈이기도 했다.
뭔가 일을 꾸미기는 하는데 그것들이 꼭 한끝씩 엉성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곤 했다.
이러니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그래서였다.
이렇게 재회하니 은근한 반가움마저 이는 것은.
아카데미 1년 차 이후 르로이와는 한 번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르로이가 나에게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를 죽어라 피해 온 그였다.
“어쨌든 그 오만방자함이 네놈의 명줄을 앞당겼다. 넌 오늘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해.”
“내가?”
“그래, 네놈.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다.”
그런데 오늘은 브로든이 자진해서 내 앞에 섰다.
단순히 서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태도 또한 용감하고 자신만만했다.
당당하게 나를 죽이겠다는 선언까지 하고 있었다.
“나를, 선배가? 그게 되겠어?”
“흥,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거다. 네놈은 여기 계신 이분들의 손에 처단되고야 말 테니.”
물론 이 용기가 르로이 본인으로부터 비롯됐을 리 만무했다.
원래부터 가문의 위세에나 기대던 인간이었다.
그럴 깜냥 자체가 안 됐다.
당연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르로이가 기대는 것은 그의 옆에 서 있는 사태의 원흉들이었다.
“아, 저 로만 제국의 개들?”
“무, 무슨!!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무슨 소리긴? 개를 개라고 부르는 것뿐인데. 소드마스터씩이나 돼서 이런 더러운 짓거리도 서슴지 않는 걸 보면 개 맞잖아.”
“미친놈! 감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그렇지 않소? 황제의 애완견, 브루노 다스 백작.”
* * *
“야.”
“예, 수령. 말씀만 하십시오. 다 쓸어버리겠…….”
스악~ 서걱!
툭.
데구르르.
“쯧.”
해적 놈들은 도무지 변하지를 않았다.
아무리 가르쳐 봤자 끝도 없이 멍청할 뿐이었다.
해서 어딘손 토르웨이는 입 아프게 말로 하지 않았다.
그냥 칼로 했다.
“야.”
“예, 예! 전하.”
그럼 이렇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즉각적이면서도 강력하게.
“쓸어버려.”
“클클클, 알겠습니다, 전하.”
망각도 수준급이었다.
옆에서 방금 죽어 간 놈은 이미 해적들 머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저 지금부터 펼쳐질 살육에 대한 광기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
“죄다 쓸어버리랍신다!!”
“크크크, 그거야 쉽지.”
“전부 찢어 버리자고. 물고기들도 슈라우드 놈들 살결이 그리울 거야.”
“우오오오~!!”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슈라우드 군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는 해적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멍청함과 단순함 덕분이었다.
어딘손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다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어딘손은 절대 당당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됐다.
1만 5천이나 되는 해적들을 끌고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가 처참히 깨지고 돌아온 그였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추태란 추태는 전부 내보이기까지 했다.
라이오넬과 채 몇 합 나눠 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린 점,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군도까지 다이렉트로 줄행랑을 친 점, 군도에 돌아와서 역시 어딘가에 대가리를 처박고 꼭꼭 숨어 버린 점 등 차마 한 집단의 리더이자 소드마스터라고는 보기 어려운 추태의 연속이었다.
이런 그가 지금은 다시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그것도 라이오넬의 부재가 확실시된 직후에 말이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딘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당당했다.
그래도 됐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적들이란 애초부터 그런 비열한 종자들이었으니까.
물론 눈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추태에 대한 질책의 눈초리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나, 그것을 어딘손 앞에서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해적은 전무했다.
무엇보다 시원하게 칼질 몇 번 해 주면 금세 씻은 듯 사라질 눈총들이기도 했다.
지이이잉!
스악~! 슈악~! 슈아악~!
서걱! 서걱! 촤라락~!
어딘손의 오러 블레이드에 슈라우드 병사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우효오오오~!”
“다 찢어 버려!!”
그러자 자연스레 해적들의 광기가 치솟아 올랐다.
해적들에게는 이거면 되는 것이다.
이 단순무식한 놈들에게 이 이상은 사치에 불과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광기에 물든 해적들은 말 그대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반대로 슈라우드 군은 이 넘쳐흐르는 광기에 무참히 휩쓸려 갔다.
푸슈슉!
“케겍……!”
“커흑!!”
단, 한 군데만큼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 한 군데에서는 방금 막 해적 둘이 창질 한 방에 떨어져 나간 참이었다.
“고작 해적들 따위에 밀리지 마라! 밀리는 놈은 전투 끝나고 나와 개별 면담일 줄 알아!”
“에라이! 천인장씩이나 돼서 그렇게 사기 떨어뜨리는 소리나 늘어놓을 거유?”
“레몬드 대장이랑 면담은 무슨! 차라리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돌고 말지.”
“그러게나 말이야. 어휴, 어쩌다 저런 양반을 상관으로 둬서는.”
푸슉! 푸슉! 퍼걱!
“켁!”
“크헥!”
“케켁!”
비단 대장이라 불리는 놈만이 아니었다.
그 뒤를 따르는 부하들의 창질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일격일살.
평범한 해적들은 이들의 창끝을 막기는커녕 피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이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하여간에 저들 천인장 말은 개똥으로 알아 처먹어요.”
“우우우~!”
“성격 더러운 천인장은 각성하라.”
“저러니 아직도 결혼을 못 했지.”
“어디 결혼만 못 했어? 여자 손도 제대로 못 잡아 봤잖아.”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푸슉! 서걱! 슈아악~! 푸슈슉!
심지어 창질에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창은 일부에 불과했다.
롱소드는 물론이거니와 단검, 손도끼, 화살 등등 온갖 무기란 무기는 다 썼다.
단순히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용도 또한 수준급이었다.
창질과 마찬가지로 모든 무기가 일격일살에 가까웠다.
“호오~”
그리하여 이들은 전체적인 전황과 정반대의 광경을 연출해 나갔다.
역으로 해적들을 무참히 휩쓸어 나가는 것이다.
마치 사냥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로.
“저놈들인 모양이군, 라이오넬 라인하트의 그리핀 군단인가 뭔가 하는 것들이.”
다만, 이것이 꼭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저들의 활약이 어딘손의 관심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반 해적들을 상대로 날고 긴다고 해 봤자였다.
어차피 어딘손 앞에서는 똑같이 별 볼 일 없는 병사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휘이익~
하여 어딘손은 일말의 고민조차 품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날려 이들의 앞에 착지했다.
“…….”
그러자 천인장이라 불리던 놈이 어딘손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입이 뚝 하고 멈춰섰다.
그러더니 세모 눈을 한 채로 어딘손을 유심히 쳐다보는 놈이었다.
“너희들이 그리핀 군단인가?”
이에 어딘손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보고 싶던 놈들이었다.
워낙 소문이 자자하기도 했거니와, 어찌 보면 어딘손과는 깊게 얽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라이오넬이라는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기점으로 말이다.
“대그리핀 군단 빌어먹을 제2 천인대 놈들아!”
“오우!”
직접 보니 확실히 인정할 만했다.
소문대로 실력뿐만 아니라 군기 역시 차원이 달랐다.
감히 해적들과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무려 어딘손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흐트러진 놈이 없는 것이다.
모두가 그들 눈앞의 소드마스터를 향해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것이 그리핀 군단을 오늘 처음 마주하는 어딘손의 눈에도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전원.”
이 정도 군단이라면 마지막 불꽃을 태울 기회 정도는 줘도 되겠다 싶었다.
비록 해적이라고는 하나 어딘손 또한 일국의 왕을 추구하는 입장.
비열한 해적 놈들이 아니라 이런 제대로 된 군단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늘 품어 오던 것이었다.
하여 어딘손은 나름의 기회를 주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마지막 명령을 내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준 것이다.
이윽고 그 입이 열렸고, 곧장 명령이 튀어나왔다.
“튀어!!”
그 결연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향으로.
“오우!!”
빙글.
두두두두두.
대장의 명령만이 아니었다.
부하들의 반응 역시 그 대장과 똑같았다.
결연한 의지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모든 의지를 불태워서 명령을 이행했다.
냅다 튀기 시작한 것이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 나 이거야 원.”
어딘손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줄행랑을 이처럼 결연하게 치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더구나 저들이 등을 보인 상대도 문제였다.
도망쳐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상대가 현재 이 전장의 절대자였기 때문이다.
이건 공연히 절대자의 화만 돋우는 짓거리일 뿐이었다.
“역시 그 주인에 그 개새끼들이군. 사람 성질을 제대로 건드릴 줄 알아.”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 전장의 절대자, 어딘손은 제대로 약이 올랐다.
과거 그를 가지고 놀던 라이오넬까지 떠오르는 바람에 더더욱.
“좋아, 짐이 친히 죽여 주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어차피 저들이 필사적으로 뛰어 봤자 벼룩이었다.
어딘손의 가벼운 도약 한 번이면 따라잡고도 남았다.
스윽.
그가 발을 들었다.
바닥을 박차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려치려던 순간이었다.
파바바밧.
“……?”
스륵.
어딘손이 들었던 발을 다시 가만히 내려놓았다.
벌써 저만치 튀는 중인 그리핀 군단을 대신하여 그에게 접근해 오는 놈이 있었던 것이다.
후우우~ 투둥.
이내 그놈이 도착했다.
웬 근육덩어리 기사 한 놈이었다.
“넌 또 뭐지?”
“그리핀 군단의 부군단장 다이너 브란부르크.”
직책을 듣고 나니 이렇게 다급히 달려온 이유가 납득이 됐다.
아마도 제 부하들을 대신하여 희생하고자 찾아온 것일 터.
“그래, 그래도 용기는 가상하구나. 줄행랑이나 치는 부하들 한번 살려 보고자 이렇게 사지로 뛰어드는 걸 보면 말이야.”
“용기? 줄행랑? 그런 게 네 입에서 나와도 될 만한 단어들인가?”
그런데 어째 이놈도 제 부하들과 마찬가지였다.
반응이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드마스터를 앞에 두고 있음에도 말이다.
“……뭐라?”
“우리 군단장님 상대할 용기라고는 쥐뿔도 없어서 죽어라 내뺀 주제에 뭐? 용기가 가상해? 비겁한 해적 수장 나부랭이에게는 가당치도 않아.”
빠직.
“그리고 하나 더. 내가 사지로 뛰어들어? 천만의 말씀.”
“……?”
“여긴 네 사지가 될 거다, 겁쟁이 소드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