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장: 라이오넬의 사람들
브루노 다스는 이번 일의 성공을 자신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유일한 불안 요소가 현재 왕도에 부재했다.
왕도는커녕 슈라우드 왕국 자체를 벗어나 있는 상황이었다.
카디즈 군도로 원정을 떠난 라이오넬 라인하트 말이다.
아무리 그가 그리핀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그래서 당장 미친 듯이 날아온다 해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의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더욱이 이번 일에 투입된 소드마스터가 브루노 본인을 포함해 무려 셋이나 됐다.
비록 슈라우드 왕궁 내에 소드마스터 둘이 있다지만, 이쪽이 수적으로 우세할 뿐 아니라, 얼마든지 각개격파가 가능했다.
실제로 근위기사단장 카이트 쉬르더는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태였다.
즉, 벌써 소드마스터 둘 중 하나가 완전히 무력화된 상황.
거사는 이미 절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사실상 한 가지뿐이었다.
셀레스티나 1왕녀를 확보하는 것.
이번 거사에서 오브리가 국왕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바로 왕녀였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국왕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왕녀 확보 시 라이오넬 라인하트와 그리핀 군단을 손도 안 대고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 브루노가 직접 나섰다.
각자 맡은 임무 때문에 소드마스터 중 브루노 혼자 나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 때처럼 근위기사들이 떼로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에릭스 브란부르크 하나만 신경 쓰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브루노는 대지의 정령력이라는 반칙과도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힘이라면 에릭스를 상대하며 연약한 왕녀 하나 붙잡아 두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터.
드드드드!
브루노는 분명 그리 생각했다.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왕녀와 그 일행이 일제히 반대로 뛰는 광경을 보며 헛웃음 지은 것도 그래서였다.
“글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왕녀님? 그렇게는 안 된다고.”
왕녀가 무슨 계획을 짜 두었든 그것은 어차피 안 될 일이었다.
브루노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전부 부질없는 짓거리에 불과했다.
“그런가요? 그런데 어쩌죠? 나는 여전히 될 것 같은데.”
한데, 왕녀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딱히 당황하지 않는 그녀였다.
화르르륵~
그리고 이런 반응의 이유가 곧바로 드러났다.
단, 왕녀로부터가 아니었다.
왕녀가 아닌 왕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 브루노의 정면에 서 있는 인물로부터였다.
“설마……?”
에릭스 브란부르크 백작.
슈라우드의 세 번째 소드마스터인 그가 화염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더니 이내 그것을 쏘아 냈다.
솟아오른 대지가 막아 버린 통로를 향해.
“모두 숙여!”
콰과과광!!
“다시 뛰어!”
다다다다.
시의적절한 왕녀의 지시에 따라 일행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폭발의 순간 고개를 숙였다 다시 일어나서는 뜀박질을 재개했다.
솟아오른 대지 한가운데에 새로이 뻥 뚫린 통로를 통해.
“그렇게는…….”
이에 브루노는 재차 정령력을 끌어 올렸다.
화르륵~
스악~!
“이런……!”
하지만 그것을 왕녀 일행을 향해 쓰지는 못했다.
대신 날아드는 화염을 방어하는 데에 썼다.
화르륵~
슈아악~!
단발이 아니었다.
화염은 채찍의 형태로 쉬지 않고 날아들었다.
끔찍한 화상에 노출될 각오가 아니라면 방어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왕녀 일행의 발걸음 소리는 한없이 멀어져만 갔고 말이다.
“제길!”
지이잉!
콰가가각!!
결국, 브루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는 왕녀를 놓쳤다는 사실을.
하여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었다.
왕녀를 놓치게 만든 장본인, 에릭스 브란부르크와.
“언제 정령석을 섭취한 거지? 들은 바 없었는데.”
“밝혀야 할 이유가 있소? 당신은 결코 왕녀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드드드드!
화르르륵!
콰가가각!!
“허,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나? 천만에. 왕녀는 어차피 궁을 빠져나가지 못해. 나로움 후작가의 병력이 이미 왕궁 점령을 시작했을 거거든.”
“…….”
“당장 내 손에 얌전히 잡힐 기회를 상실한 것뿐이다. 브란부르크 백작, 당신이 빨리 붙어 주지 않는 이상, 왕녀는 결국 끌려오게 되어 있어. 이미 한번 기회를 놓쳤으니만큼 아주 거칠게.”
“글쎄, 그건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난 일단 당신에게 집중할 것이니, 괜한 수 쓰지 마시오. 내 정신력이 흐트러지는 일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쿠과과광!!
그렇게 브루노 다스와 에릭스 브란부르크, 각국의 백작이자 소드마스터이며 동시에 정령력 보유자이기도 한 이들의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화려하게 비산하는 화염과 대지, 그리고 오러의 파편 속에서.
* * *
브루노 다스를 보자마자 레나는 직감했다.
국왕 확보는 이미 글렀으며, 이를 전제로 세운 1안 역시 물 건너갔다는 사실을.
분명 크리스토퍼의 호위들과 함께 집무실 쪽에 있다던 브루노였다.
이런 그가 집무실 상황을 내버려 둔 채 레나를 잡으러 올 리 만무했다.
아무리 레나가 중요하다 하나 국왕을 능가한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니까.
브루노가 끌고 온 기사들의 행색 또한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갑옷 이곳저곳에 튀어 있는 선혈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베어 내며 자연스레 튄 것들이지.
따라서 곧장 차선책인 2안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이 2안의 첫 번째 단계는 탈출이었다.
국왕이 넘어간 이상 왕궁은 저들의 차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적의 소굴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역전을 노려 볼 수 있었다.
“쉬르더 후작 각하와 근위기사단이 있음에도 집무실 상황이 지나치게 빨리 정리됐습니다. 아무래도 하인들의 출입구 또한 안전을 장담하지 못할 듯합니다.”
사네의 말대로였다.
상황상 2안의 탈출 경로인 하인 출입구 또한 안전 여부가 불확실했다.
저들의 제압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이 속도로 볼 때, 이후 본격적인 왕궁 장악 작업 역시 이미 시작됐을 터.
자칫 이곳마저 늦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수밖에.”
“예, 왕녀님.”
단, 이 외에 딱히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왕궁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
왕궁 정문, 국왕만이 아는 비밀통로, 왕족들이 아는 비밀통로, 하인들의 출입구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중 앞의 세 가지는 어차피 무용지물이었다.
정문이야 저들의 최우선 확보 대상일 테고, 국왕의 비밀통로는 1안과 함께 폐기되었다.
또, 왕족들의 비밀통로는 당연히 크리스토퍼 역시 알고 있었다.
출구 쪽에 미리 병력을 매복시켜 두기라도 했다면 중간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될 터.
결국, 남은 방법은 하인 출입구뿐이었다.
왕도 중심부로 연결되는 이곳은 시선이 많아 매복도 어려울 테니 말이다.
물론, 주지했다시피 이 또한 무조건 안전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왼쪽.”
이윽고 목적지 인근 갈림길에 도달했다.
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쭉 가면 머지않아 하인 출입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의 승부처를 코앞에 둔 셈이었다.
이곳을 통과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갈리게 될 테니 말이다.
“계속 갑니다.”
그렇다 해도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행동에 나선 참이었으니까.
하여 멈춤 없이 계속해서 발걸음을 이어 가는 레나였다.
“잠깐!”
아니, 이어 가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웬 다급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왕녀님, 잠깐!”
이에 레나는 들렸던 오른발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다.
다급한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에치오?”
에치오였다.
라이오넬이 남부 테네시아 왕국에서 데리고 온 그 용병 말이다.
현재는 레나의 정식 호위로 근무 중인 그가 레나와 일행 전체를 불러세운 것이다.
절레절레.
어딘지 심각하게 꺼림칙한 표정, 그리고 좌우로 젓는 고개와 함께.
여기에 어설프기 그지없는 슈라우드 어로 뱉어 내는 마지막 결정타까지.
“왕녀님, 감 안 좋다. 진짜 안 좋다.”
잠시 후.
저벅저벅저벅저벅.
레나 일행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빠르게 이어 가고 있었다.
단, 2분여 전의 걸음과는 두 가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조타수의 변화였다.
원래는 레나였지만, 이제는 모두가 에치오의 등만 바라본 채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또, 나아가는 방향과 목적지 역시 달라졌다.
갈림길에서 선택받은 방향은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었다.
그리고 이 방향의 끝에는 원래 생각지도 못했던 목적지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녀님,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일행 중 하나가 질문을 던져 왔다.
질문자는 비교적 근속기간이 짧은 편에 속하는 호위기사였다.
아무래도 믿음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 대놓고 정문으로 가는 게 정말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결정하는 것은 너무…….”
또, 절로 의구심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기사의 읊조림대로였다.
일행을 기다리는 목적지는 바로 정문이었다.
탁 트인, 그래서 은밀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심지어 경계마저 최상인 바로 그 왕궁 정문 말이다.
은밀한 탈출을 시도하는 와중에 이런 정문을 선택한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는 것이다.
특히, 그 결정 자체가 순전히 한 병사의 뜬금없는 감에 의존한 것이라면 더더욱.
“하니, 완전히 늦기 전에 차라리 지금이라도…….”
“아니요, 리넨 경. 여기서 망설여 봤자, 이도 저도 아닌 것밖에 안 됩니다. 에치오를 믿으세요. 그게 안 되겠으면 그 뒤의 라이를 믿고. 우리는 이대로 갑니다.”
단, 레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 결정과 실행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에치오의 그 감이란 것을 레나가 직접 경험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전해 들은 것이 다였다.
하지만 보증자가 보증자 나름이었다.
무려 라이가 보증한 사람이고 능력인 것이다.
의심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비단 레나만이 아니었다.
사네는 물론이고 줄리아와 클로렐라까지, 라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전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굳건한 눈빛으로 에치오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정문이다.”
그때, 에치오가 정문에 도달했음을 알려 왔다.
이윽고 오늘의 진정한 승부처라 할 수 있는 곳에 도달한 셈이었다.
정문 상황에 따라 레나와 일행, 세력, 나아가 슈라우드 전체의 향방이 결정될 터였다.
“그런데…….”
한데, 이상했다.
레나와 일행의 눈 앞에 펼쳐진 정문 상황 말이다.
이상해도 무언가 한참 이상했다.
“모두 쓰러져 있다?”
“……??”
그렇다고 이것이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잘 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정문을 지키던 병력이 죄다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즉, 경계가 가장 삼엄해야 할 정문에 오히려 무주공산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으라차차!”
퍼걱!!
“끄륵……!”
이내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원인이 밝혀졋다.
그리고 밝혀진 이 원인 덕에 레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호, 레나 왕녀? 그렇지 않아도 찾으러 들어가려던 참인데, 마침 알아서 나와 주는군.”
“타로쉬핸드!!”
이번 승부, 아직 끝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