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장: 첫 번째 카드(2)
준비는 미리 하고 있었다.
카디즈 군도의 해적들이 내륙까지 밀고 들어온 이번 사태,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딘손 토르웨이가 선봉에 서서 깽판을 치고 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어딘손은 일국의 왕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선에서 직접 노략질 벌이는 것만큼은 자제하던 그였다.
적어도 카디즈 군도에 토르웨이 왕국이 들어섰음을 선포한 뒤로는 쭉 그래왔다.
한데, 지금은 이렇게 대놓고 일선에서 날뛰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 회귀 전에는 발생한 적 없는 일이었다.
흉작 때문에 해적의 노략질이 예년보다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렇게 내륙까지 밀고 들어온 적은 없었다.
당연히 어딘손이 일선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때는 샤코 그레이엄 후작과의 대화를 통해 원만하게 합의점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슈라우드와 카디즈 군도의 관계가 회귀 전과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지난 십 수년간 이어 오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던 상태였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단 하나, 슈라우드 내부의 사정이었을 뿐이다.
레나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계승권 경쟁에서 압승해 버린 반전의 내부 사정.
따라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나의 압승을 달갑지 않아 하는 누군가의 개입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카오오오~!!”
그래서 서부의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출병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뒤 서부의 지원 요청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3왕자와 서부의 입장 때문에 지원 요청이 지체됐고, 자연스레 그리핀 군단의 출발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서부는 오늘내일하고 있는 상황.
해서 먼저 왔다.
쐐애애액~
그러고는 곧바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이자 어딘지 많이 수상한 한 놈을 향해.
마침 그놈이 저 잡아 보라며 날뛰는 중이었기에 찾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보이는 그대로 내리꽂히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파앗.
지면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카오의 등을 박찼다.
그리하여 놈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
이윽고 그놈, 어딘손과 나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블레이드의 격돌.
쿠콰과과과광!!
엄청난 굉음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격돌지점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익스퍼트 급 미만은 전부 버티지 못하고 쓸려 나갈 수밖에 없을 만큼 강력한 충격파였다.
휘이잉~
“쿨럭, 쿨럭.”
“으으으…….”
“끄으응…….”
그렇게 굉음과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간 뒤, 주변은 자연스레 고통 어린 기침과 신음 따위로 채워졌다.
한데, 이 고통 어린 기침과 신음들은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소리의 출처였다.
출처가 전부 해적의 입뿐이었다.
슈라우드 서부군에게서 나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면 그냥 먼지로 인한 가벼운 잔기침 정도?
여기에는 충돌 지점 주변의 서부군은 기사들뿐이라는 점도 분명 작용했다.
날뛰는 어딘손을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막아서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툭툭.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멀찍이 물러나 먼지나 툭툭 털고 있는 어딘손에게 말이다.
그는 충돌의 여파를 조금도 감당하지 않았다.
감당은커녕 충돌 직후 그 힘을 타고 그대로 몸을 쭉 빼 버렸다.
애초에 감당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고 봐야 했다.
“흠, 확실히 묵직하긴 묵직하군.”
이것이 일대일 대결이었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대처라고 할 수 있었다.
낙하 속도까지 가미된 힘을 있는 그대로 감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아마 나라 해도 방금의 어딘손처럼 대응했을 터였다.
단, 이미 전제했다시피 이것이 순수한 일대일 대결이었다면.
현 상황은 일대일 대결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이곳은 전투 중인 병력으로 가득 찬 전장의 한 가운데였다.
검을 섞는 당사자가 나와 어딘손뿐이기는 해도 그 여파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주변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여파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흡수는 필수적이었다.
아군에게 피해를 줄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어딘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힘의 해소 없이 몸을 쭉 뺀 결과, 힘은 그의 뒤편에 있던 해적들이 고스란히 감당하게 됐다.
한눈에 보기에도 수십의 해적들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중이었으며, 개중에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 무식하리만치 묵직한 힘도 그렇고, 그리핀까지 타고 온 걸 보면 그대가 라이오넬 라인하트인가 보구나, 그 슈라우드의 영웅인지 뭔지 하는.”
그럼에도 어딘손은 주변의 해적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시선을 오로지 나에게 고정한 채로 흥미롭다는 기색을 내비칠 뿐이었다.
“알고 있으니 따로 내 소개는 필요 없겠네. 당신은 어딘손 토르웨이겠지?”
하여 나 또한 이 시선과 흥미를 받아 주었다.
“당신? 지금 당신이라고 한 것인가?”
“그럼, 당신을 당신이라고 하는 것 말고 다른 적절한 호칭이 있나?”
“짐이 토르웨이 왕국의 국왕이라는 사실, 그대쯤 되는 귀족이 모를 리 없을 텐데?”
“국왕? 당신이 국왕이었어? 어째 내가 아는 국왕과는 개념이 많이 다른데?”
“뭐라?”
단, 그것이 호의는 아니었다.
호의로 받아 줄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당신을 국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륙의 국가가 있기는 하던가? 나는 없는 걸로 아는데. 그냥 해적 우두머리 아니면 잘 쳐줘서 해적왕 정도라면 모를까.”
“네놈…….”
“뭣보다 제 병력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는 국왕은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런 것도 국왕이라고 할 수 있나?”
국왕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다.
대륙의 인정이나 고귀한 혈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품마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일국의 지존으로 불릴 만한 요소를 무엇 하나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알량한 무력이 전부인데, 그마저도 내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테고 말이다.
“어린 나이에 제 주제보다 과분한 칼을 쥐어서 그런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군.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몰라.”
“아니,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지. 실제로 만나 보기도 했고. 단지 그게 당신은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을 뿐.”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어차피 당신에게는 역부족이겠지만.”
“오냐, 정 그리 죽는 게 소원이라면, 짐이 친히 네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물고기 밥으로 던져 주마.”
그나마 천성을 억지로 가리고 있던 가식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작 대화 몇 마디에 떨어져 나간 가식 아래로 그 저급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파앗!
이 적나라한 노출과 동시에 나를 향해 짓쳐 드는 어딘손이었다.
분노를 담은 강렬한 검격과 함께.
이렇게 잠시 중단됐던 격돌이 재개됐다.
콰캉! 카가각~! 콰쾅!!
강력한 공격을 연속적으로 퍼붓는 어딘손.
나는 이런 공격들을 차분하게 받아 나갔다.
그리하여 눈 깜박할 새에 수십 차례의 검격이 교환됐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에서 어딘손의 스타일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사라락~!
카강!!
‘정형화되지 않았군.’
특별히 강하다거나 혹은 빠르다거나 하는 쪽은 아니었다.
적당히 강하고 적당히 빨랐다.
또, 지금처럼 중간중간 변칙적인 수도 곧잘 섞어 왔다.
이렇게 보면 올라운더 스타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평범한 올라운더라고 보는 것도 좀 애매했다.
정형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해적이기에 갖는 특징이라고 보면 될 듯했다.
정리하면 올라운더이기는 한데 정육각형이 아닌 살짝 삐뚤삐뚤한 육각형의 올라운더랄까?
스아악~!
쿠과광!!!
물론 정육각형이든 삐뚤삐뚤한 육각형이든 딱히 중요치는 않았다.
어차피 내 입장에서는 둘 다 이도 저도 아닌 잡탕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이런 잡탕을 상대하는 방법은 오히려 간단했다.
내 스타일대로 찍어 눌러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그그극~
“…….”
수직으로 내려찍는 반격 한 방에 어딘손의 공세는 곧장 중단되었다.
단순한 중단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닥을 끌며 뒤로 쭉 밀려난 상태였다.
그러더니 가만히 서서 나를 이채 띤 눈으로 바라보는 그였다.
“당신 혹시 겁먹은 건가?”
그런 어딘손을 향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의심 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빼기만 하는 거지?”
처음부터 그랬다.
분명 내 도발에 분노하여 먼저 짓쳐 들었고, 그런 만큼 강력한 공격을 쏟아 내기는 했다.
하지만 이 공격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격 일격이 강력하기는 해도 치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접 검격을 교환하는 나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자가 처음부터 엉덩이를 반쯤 뺀 상태라는 것을.
“아니면, 아예 나랑 싸울 생각 자체가 없는 건가?”
“흥, 착각은 자유다.”
“그래? 그럼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면 알겠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짓쳐 들었다.
그리고 어딘손과는 달리 강력하면서도 치명적인 일격들을 쏟아 냈다.
스악~! 슈아악~!
콰쾅! 콰과광!!
“…….”
그그극~ 파밧.
그러자 어딘손은 이제 대놓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반격의 의지는 사실상 버려 둔 채로 방어와 회피만을 펼치는 그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회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사아아~
이에 나 또한 대응에 나섰다.
본격적인 정령력 활용에 들어간 것이다.
원래는 결정적인 순간의 한 방을 위해 아껴 둘 생각이었다.
하나, 이 흐름대로라면 결정적인 순간 자체가 나올 수 없을 터.
따라서 더는 아껴 둘 이유가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의 강제 창출을 위해서라도 오히려 적극 활용하는 편이 나았다.
구구구구.
쿠과과광!!
“……!!”
중력까지 실은 일격에 눈을 둥그렇게 뜬 어딘손.
예상을 웃도는 힘에 당황했는지 그의 대응이 살짝 늦어졌다.
뒤로 물러남에 있어 약간의 주춤함이 생긴 것이다.
파앗!!
내가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물러나는 어딘손을 쫓아 강하게 바닥을 박찼다.
동시에 다시 한번 정령력을 발휘했다.
화아악!
“헙……!”
이번에는 인력이었다.
다이렉트로 물러나는 어딘손을 순간적인 힘으로 잡아당겼다.
그리하여 움직임에 작은 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작은 틈이면 충분했다.
연신 물러나기만 하던 어딘손을 내 거리 안으로 들이는 데에는 말이다.
구구구구.
슈아아악~!
강제로 창출해 낸 결정적인 기회.
이 기회에 다시금 중력을 실었다.
그렇게 중력이 가미된 치명적인 검격이 어딘손을 향해 쏟아져 내려갔다.
이건 평범한 방법으로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받아 내는 방법뿐이었다.
대결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진심 어린 일격이 교환되는 순간인 것이다.
덥석!
“어어……??”
홱!
“히, 히익!”
서걱!!
그러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진심 어린 일격은 이번에도 교환되지 못했다.
파바바밧.
“하…….”
어딘손은 또다시 회피에 성공했고, 성공 직후 아예 뒤로 멀찍이 물러나 버렸다.
나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10m 이상 벌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딘손을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절로 흘러나오는 헛웃음과 함께.
“어이가 없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딘손이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이 상황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본인 대신 제 부하를 내 검의 먹잇감으로 던져 주었다.
한마디로 제 목숨 살리고자 부하를 희생양 삼은 것이다.
어딘손이 계속해서 물러나며 해적들 사이로 진입한 상태였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물론, 가능하다 해도 보통의 소드마스터들이라면 절대 쓰지 않을 방법이겠지만.
명예를 생각하면 이는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짓거리였으니까.
“이런 짓거리나 하면서 일국의 왕 대접을 받고 싶다고?”
“…….”
내 비꼼에도 어딘손은 묵묵부답이었다.
검을 섞기 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반응인 것이다.
더구나 이 반응은 단순히 입을 닫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빙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타다다닷~
그대로 내빼버리기까지 했다.
나를 피해서, 순식간에 성문 밖으로.
종국에는 완전히 전장을 이탈하여.
“하, 참나…….”
이렇게 끝이었다.
어딘손과의 대결은 이렇듯 어처구니없으리만치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본 나조차도 당황을 숨기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소드마스터 간 대결이라기에는 그 끝이 시정잡배의 주먹다짐만도 못했으니까.
“어딘손이 줄행랑쳤다!”
“해적왕이 내뺐어!”
대신 모든 것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비록 대결의 끝은 허무했으나, 이 끝이 초래할 결과는 정반대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알차고 창대할 예정이었다.
“해적들이 허둥댄다!”
“해적왕을 무찌른 소드마스터가 우리 편이야!”
“X발, 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X새끼들 죄다 쓸어버려!!”
“우오오오오~!!!”
새로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잔인하지만 달콤한 수확의 시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