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장: 첫 번째 카드
“으으음…….”
슈라우드 서부를 지탱하는 중심축 그레이엄 후작가.
이런 후작가의 현 가주이자 길리엄 3왕자의 외할아버지인 샤코 그레이엄 후작은 현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와 서부의 힘으로는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에 봉착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카디즈의 해적들은?”
“이곳 보름 백작령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 이틀 안에는 도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카디즈 군도의 해적들이 문제였다.
물론 이 해상 강도들은 언제나 문제이기는 했다.
툭하면 배 타고 쳐들어와 노략질이나 해 대는데, 문제가 아닐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레이엄 후작가가 슈라우드 서부에 자리 잡은 이래 언제나 골칫거리로 작용해 온 해적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지금까지의 수많았던 그 어떤 문제들보다도 특별했다.
이번 노략질은 매년 이어져 온 단순한 노략질 정도로의 치부가 불가했다.
쳐들어온 해적들의 머릿수가 물경 1만 5천에 달했다.
이 정도면 단순 노략질이 아니라 전격적인 침략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상륙 뒤 해적들의 움직임도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처럼 해안가 노략질에서 그치지 않았다.
슈라우드 서부의 해안가를 초토화한 뒤 곧장 내륙으로 진격해 왔다.
특히 서부의 곡창지대나 상업중심지들이 그 타깃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영지가 벌써 다섯 군데나 털린 상황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이렇게 빼앗긴 약탈품들은 차곡차곡 쌓여 카디즈 군도로 이송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는 흉년이라는 악재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이런 악재의 와중에 전쟁이라 불러도 모자람 없는 수준의 노략질이 더해진 것이다.
자연스레 서부 전체가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어딘손 토르웨이는? 여전히 그자가 앞장서있나?”
“……그렇습니다, 각하.”
그렇다고 서부가 안일하게 대응했다거나 손을 놓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레이엄 후작은 즉각 서부 각 영지의 가용 병력을 끌어모았고, 그리하여 1만 1천의 방어군을 조직했다.
비록 수는 4천가량 적다 하나 이쪽은 반 이상이 영지의 정규군이었다.
또, 저들이 내륙까지 밀고 들어온 이상 전투는 해전이 아닌 육상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밀릴 양상은 결코 아니었다.
“하아, 어딘손 토르웨이, 그자가 문제야. 그자를 막을 수가 없으니…….”
그럼에도 서부군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해적왕 어딘손 토르웨이 때문이었다.
그는 해적 주제에 무려 소드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막돼먹은 실력자였다.
이런 그가 전투 때마다 선봉에서 서부군의 전열을 처참하리만치 휩쓸어 버리니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한 병력의 누적 피해도 상당했다.
연전연패의 과정에서 벌써 2,000에 달하는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대로면 결과가 눈에 훤했다.
서부의 몰락이라는 결과 말이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리핀 군단은? 어디쯤 왔다고 하나?”
그리고 후작은 가까스로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대책이란 바로 그리핀 군단.
현 슈라우드 왕국 최강의 군대였다.
이들이라면 지금 서부가 겪고 있는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럴 능력이 차고 넘치는 이들이었으니까.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최소 한 달은 걸린다고 합니다. 백작성까지 제때 도착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후우, 감내해야겠지. 우리의 선택이 그만큼 늦은 것이니…….”
사실 이 대책 마련에 가까스로라는 표현은 다소 어폐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렵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는 대책이었다.
그저 한마디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도와 달라는 한마디 말이다.
고작 이 한마디를 건네는 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물론, 누구라도 이해할 만한 지체이기는 했다.
고작 한마디일 뿐이지만, 이 한마디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것이 내포돼 있었다.
계승 경쟁에 대한 3왕자의 공개적인 포기 선언이자, 왕녀에 대한 서부의 완벽한 항복 선언이기도 했다.
이런 한마디가 쉬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 보니 늦어졌고, 안타깝게도 작금의 위태로움을 맞이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그리핀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낸다. 이곳마저 휩쓸리고 나면 그때는 정말 서부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리핀 군단에 연락을 넣게. 최대한 서둘러 달라고.”
이렇듯 서부의 위기는 한없이 고조되어 가는 중이었다.
톡톡히 효과를 발휘 중인 누군가의 카드와 함께.
* * *
“전부 모였나?”
“그렇습니다, 수령.”
“수령?”
“아! 죄, 죄송합…….”
스악~
서걱!
카디즈 해상 군도의 지배자 어딘손 토르웨이.
검을 휘두르는 그의 손속에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상이 그를 따르는 해적임에도 말이다.
툭!
데구르르~
오히려 더 잔혹했다.
일격에 목을 참수해 버린 그였다.
고작 말실수 한 번의 대가가 목숨인 것이다.
…….
순간 정적이 흐르는 막사 안.
이 분위기 속에서 어딘손의 시선이 돌아갔다.
방금 목이 잘린 해적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해적에게로였다.
“예, 예! 전부 모였습니다, 전하!”
“그렇군.”
시선을 받은 해적에게서는 어딘손이 원하는 답변이 나왔다.
정확히는 어떤 호칭이었다.
어딘손을 부르는 호칭.
그는 수령, 대장, 두목 따위의 천박한 호칭을 원치 않았다.
왜냐?
그는 카디즈 군도를 기반으로 하는 해상 토르웨이 왕국의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아직 카디즈 군도 내에서나 통용되는 개념이었다.
대륙에서는 토르웨이 왕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딘손 또한 일국의 국왕이 아닌 해적들의 수령 정도로 취급받을 뿐이었다.
아니, 당장 카디즈 군도 내에서조차 확립됐다고 보기 어려웠다.
방금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구는 해적의 머리통이 그 방증이었다.
“그럼 이제 보름 성 공략 회의를 시작해 볼까?”
어딘손을 비롯한 1만 5천여 해적들은 현재 보름 백작 성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해적들이 이러는 목적이야 한 가지뿐이었다.
성을 공략하고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약탈하는 것.
이런 지극히 말초적인 목적 말고는 존재가 불가하다고 봐도 좋았다.
“괜찮은 의견 있는 놈?”
“…….”
애초에 말초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놈들의 모임이었다.
괜찮은 의견 같은 게 나올 리 만무했다.
그저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강자인 어딘손의 명령에 따르기만 할 뿐.
“쯧, 하여간에 무식하고 생각 없는 놈들뿐이니.”
이런 점이 영 못마땅한 어딘손이었다.
이러니 대륙 것들이 죄다 무시하는 것 아니겠는가?
또, 심히 답답할 따름이었다.
말초적인 것이 아닌 원대한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그였기에 이 답답함은 한층 더할 수밖에 없었다.
어딘손이 해적들을 이끌고 이렇듯 내륙 깊숙이까지 진출한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존재했다.
이는 그가 일국의 국왕임을 고집하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바로 대륙의 인정이었다.
토르웨이가 카디즈 해상 군도를 영토로 하는 정식 왕국으로 인정받는 것 말이다.
이번 침략만 제대로 마무리 짓는다면 그 길이 열릴 터였다.
제국으로부터 은밀한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마다 토르웨이 왕국을 초청해 주기로.
그래서였다.
이런 이유로 어딘손은 그레이엄 후작의 모든 대화 요청을 단칼에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슈라우드 서부를 휩쓸었다.
미친 듯이 유린하고, 쉴 새 없이 약탈한 것이다.
그 덕에 현재 제국의 요구조건은 대부분 충족한 상태였다.
이제 이곳 보름 백작 성이 내륙에서의 마지막 타깃이 될 예정이었다.
“됐다. 네놈들에게 뭘 기대한 짐의 잘못이겠지. 그냥 네놈들이 하던 대로 해라.”
“그럼……?”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짐의 뒤나 따르라는 거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눈 깜박할 새에 끝나 있을 테니.”
“오오~!!”
역시나 단순하기 그지없는 놈들이었다.
이 막사 안에서 죽어 나간 동료 해적 같은 건 이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처음부터 동료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놈들이었으니까.
지금 이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승리에 뒤따를 무자비한 약탈, 그 잔혹한 쾌락에 대한 갈구뿐이었다.
“그다음에 할 일이 뭔지는 네놈들이 더 잘 알겠지?”
“오오오!!”
“그래, 이 잔인하고 무식한 놈들아. 잔인하게 깨부숴라. 무식하게 쓸어 담아. 네놈들의 그 저열한 천성을 있는 대로 발산하란 말이다.”
이런 놈들투성이인 카디즈 군도에서 십수 년을 군림해 온 어딘손이었다.
해적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으며, 그에 따라 이 무식한 것들을 다루는 데에도 통달한 상태였다.
“그 길은 짐이 열어 주마. 개새끼들처럼 졸졸 따라오기나 해라. 내일 우리는 보름 성을 짓밟는다.”
“우오오오~!!!”
이로써 황제의 카드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황제의 뜻이 슈라우드에 관철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확실한 준비를 말이다.
* * *
샤코 그레이엄 입장에서 올해 해적들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해적 주제에 1만 5천이나 되는 대병력이 모인 점, 이들이 해안가를 지나 내륙까지 진출한 점, 평소 무던히도 문명인 행세를 하던 어딘손이 대화 자체를 아예 끊어 버렸다는 점 등등 예년과 다른 이상한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이해 안 되는 것들 사이에서도 가장 이상한, 샤코를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 그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드극~ 드그그극~
투쿵!
“공성탑이 성벽에 붙었다!!”
드르르르륵~
쿠쾅!!
“젠장! 충차가 성문을 때리기 시작했어!!”
해적이 육지에서 공성전을 펼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 공성전에 공성 무기들까지 활용되고 있었다.
즉, 해적들이 전문 공성 무기로 성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
경악하다 못해 헛웃음마저 나올 광경인 것이다.
“공성탑은 기사들이 달라붙어 부순다! 마법사들은 충차에 집중하라! 최대한 빠르게 떼어 내야 한다!!”
다만, 지금은 감정이나 표출하고 앉았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못 됐다.
당장 성이 함락의 위기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이 공성 무기들을 당장 성벽과 성문에서 떼 내야만 했다.
그렇지 못하면 재앙의 순간이 도래하고 말 터였다.
하여 샤코의 마음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패배의 과정에서 이미 몇 차례 겪어 본 바 있기에 더더욱.
구우웅~ 우우웅~
슈아악~! 화아악~!
샤코의 명령에 따라 오러와 마력이 일제히 쏘아져 나갔다.
목표물은 각각 공성탑과 충차.
집중된 오러와 마력의 힘은 강맹했다.
이만하면 아무리 철갑을 덧댔다 해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콰각! 콰가가각!!
단, 이 힘이 목표물에 적중했을 경우에만.
안타깝게도 쏘아져 나간 힘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중간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으음, 저놈들이…….”
카디즈 해적 측에도 익스퍼트 급의 실력자들은 존재했다.
비록 그 양과 질에서 서부군보다 열세라 하나 어쨌든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실제로 지금도 이들이 유효한 결과를 도출해 낸 참이었다.
공성 무기에 달라붙어 쇄도하는 오러와 마력을 막아 낸 것이다.
“재차 공격하라! 최대한 빨리 무력화시켜야 한다!!”
이에 샤코는 재차 공격 명령을 내렸고, 서부군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또다시 힘을 쏟아 냈다.
그러자 해적 측의 실력자들 역시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막아 냈다.
이렇듯 공성 무기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전투는 쉬지 않고 흘러갔다.
그 흐름 속에서 몇몇 공성탑들은 끝내 무너져 내렸으며, 또 몇몇은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였다.
쿠궁! 콰광! 쿠광!
반면, 충차는 그렇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쏟아 내는 마법 세례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성문에 대한 충격을 쉬지 않고 이어 갔다.
물론, 그렇다 해도 성문은 여전히 건재했다.
단단하게 버티고 서서 해적의 진입을 굳건하게 막아 내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있는 대로 보강 작업을 해 둔 것이 유효했다.
연속되는 충격에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내구도가 반 이상 남은 상태였다.
이만하면 충차의 공격에도 한참은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안 돼! 더 이상 충격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 오늘 놈의 목표는 성문이다! 모든 공격을 충차 쪽에 집중하라!!”
그럼에도 샤코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샤코만이 아니었다.
서부군 전원이 그러했다.
모두가 성문을 바라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이잉!
“어, 어딘손. 어딘손 토르웨이다!”
이내 이 초조함의 실체가 등장했다.
충차의 공격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던 성문 앞에, 광폭하게 빛나는 오러 블레이드를 앞세운 채로.
그러자 전장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미친 듯 환호하는 해적들과 아연실색하는 서부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오러 블레이드는 양쪽에 완벽히 정반대의 의미로 작용할 테니까.
지이이잉!!
스아아악~!
이윽고 그 의미가 실현되기 시작했다.
극대화된 어딘손의 오러 블레이드가 그대로 강하한 것이다.
아직은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성문을 향해.
쿠과과과광~!!!
그리하여 결국은 만들어 냈다.
성문의 붕괴라는 결과를 말이다.
나아가 해적들의 광기와 서부군의 탄식까지.
이제 남은 것은 이 광기와 탄식이 각각의 방향으로 짙어지는 일뿐이었다.
“성문을 막아라! 절대로 뚫려서는 안 된다!!”
샤코도 알았다.
이제 와 병력을 성문에 집중시킨다 해도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어딘손 토르웨이의 오러 블레이드에 그대로 쓸려 나갈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틀어막아야 했다.
그래야 항전을 하든 퇴각을 하든 뭐라도 해 볼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만큼 전황은 최악의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지이잉!
스가가각~!!
“안 돼!”
“커헉……!”
“크아악!!”
물론 이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기사들조차 그 흉험함 앞에서는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쓸려 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생긴 틈을 메운 것은 밀려오는 해적들의 광기였고 말이다.
“제기랄.”
“각하, 이대로는 전멸을 면치 못합니다. 퇴각하셔야 합니다.”
“……방법이 없는 것인가.”
이제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보름 성을 버리고 퇴각하는 것.
샤코도 알고, 부관도 알며, 서부군 전원이 아는 바였다.
단지, 그 선택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었다.
물러나는 과정에서 발생할 병력 손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곳을 내주면 서부 전체가 공황에 빠질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으니까.
“전군…….”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전멸이라는 결과가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입을 여는 샤코였다.
“전군 퇴각한다.”
그리고 이런 그의 명령에 곧바로 응답이 돌아왔다.
“카오오오~!!”
지상이 아닌 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