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135화 (136/200)

77장: 악연의 대면(2)

“크으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카르사노가 신음과 함께 씹어 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신음과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현재 그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처지였다.

그것도 베로카를 향해서 말이다.

즉, 오랜 악연에게 완벽하게 그리고 굴욕적으로 제압당한 상태인 것이다.

“뭐 하는 짓? 우리가 왜 이러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요?”

“……나는 바이퍼 백작가의 다음 대 가주다. 네가 무슨 생각을 가졌든 물증도 없이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는 것을 모르나?”

“물증부터 입에 담는 걸 보니 그래도 찔리긴 하는 모양이군요.”

“말 돌리지 말고 어서 이거나 풀어라. 아니면 바이퍼 백작가의 이름을 걸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원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물론, 결국 제압당하고 말리라는 사실은 예상한 바였다.

5서클의 베로카에 4서클 마스터 센트럼을 상대하는 일이었으니까.

전투 승리에 대한 기대 같은 건 쥐똥만큼도 품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렇게 빠르게, 시간조차 제대로 끌지 못해 보고 당하는 제압은 계산에 들어 있지 않았다.

우선 일차로 카르사노가 나서서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바이퍼 백작가는 1왕자 세력의 핵심축 중 하나였다.

그리고 카르사노는 그런 바이퍼 백작가의 정통 후계자였다.

내전이라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결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끌고 난 뒤에는 최대한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계획이었다.

밖에서 병력이 시간을 끄는 동안 안에서는 바이퍼 백작가의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준비해 두었다.

이거면 전투에 들어가더라도 시간을 약간은 더 끌 수 있을 터.

그때쯤이면 아티팩트를 밖으로 빼돌릴 수 있으리라는 것이 카르사노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계획과 현실은 달랐다.

센트럼과 베로카의 진입 직후부터 펼쳐진 현실은 모든 계산을 헝클어뜨렸다.

진입 직후, 베로카가 입으로 건네온 대화는 첫마디가 다였다.

여기 있었냐는 첫마디 말이다.

그 뒤는 곧바로 마력의 대화를 건네왔다.

카르사노가 채 입을 열어 볼 새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베로카의 마력에 제압당해 버렸으니까.

무슨 특별한 마법이 아니었다.

그냥 마력이었다.

압도적인 양의 마력으로 카르사노를 완전히 묶어 버린 것이다.

백작가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카르사노가 제압되는 것을 목격하자마자 곧장 마법진을 발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짧은 틈에 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베로카의 마력이었다.

그것이 핵을 파고들어 작동 직전의 마법진에 순간적으로 제동을 걸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마법진에 연결돼 있던 마법사들 또한 덜컥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막간의 틈을 놓치지 않은 센트럼의 뇌전이 상황을 깔끔하게 종결지었고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사기적인 수준의 마력 양과 컨트롤 능력이었다.

“아직도 바이퍼 백작가라는 이름이 먹힐 거라고 착각하는군요.”

“착각? 감히 대바이퍼의 이름에? 역시 출신이 출신이라 그런지 귀족으로서의 개념이 턱없이 모자라구나.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라. 넌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이고 있는 거다.”

“글쎄요, 돌이킬 수 없는 짓이라면 그 잘난 바이퍼 가문에서 먼저 벌인 것 같은데? 당신네 바이퍼 가문은 감히 마탑이 출하한 아티팩트에 손을 댔어요. 그것도 장남에 후계자라는 자가 직접. 이게 고작 백작가의 이름값만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모함하지 마라. 내가 아티팩트에 손을 댔다는 증거라도 있나?”

“내가 이 타이밍에 어떻게 여길 찾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다 알고 있으니 찾아왔다는 사실 정도는 당신도 충분히 짐작 가능할 텐데?”

그랬다.

분명 카르사노도 의구심을 품은 부분이었다.

지금 이 타이밍은 빨라도 너무 빨랐으니까.

“추적 마법을 걸어 뒀어요. 보아하니 지금 저곳 지하에서 열심히 옮기는 중이군요.”

베로카가 카르사노의 뒤편으로 잠시 시선을 보냈다.

정확히 영주성의 지하창고가 위치한 곳이었다.

“……??”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요. 당신은 제대로 해제한 게 맞으니까. 단지, 내가 출하 전날 개별 아티팩트에 따로 추적 마법을 걸어 뒀을 뿐이지. 내 고유 패턴으로.”

역시나 원인은 예상치 못한 변수의 개입에 있었다.

보통 개별 아티팩트에 추적 마법을 걸어 두지는 않는다.

아티팩트에 새겨진 마법 수식과 엉키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운반 상자 별로 걸어두는 것이 일반적인 아티팩트 운송 방법이었다.

한데, 베로카가 그 일반적인 방법을 깨뜨린 것이다.

출하 바로 전날, 굳이 고난도의 작업 과정을 거쳐 가면서 말이다.

무언가 낌새를 느꼈던 것이 아니고야 말이 되지 않았다.

“하긴, 따지고 보면 결국 당신 덕분이기는 하네요. 줄곧 나를 피해 오던 사람이 출하 전날 뜬금없이 걸어 준 시비 덕분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게 된 거니까.”

“……!!”

“물론 확신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그냥 혹시 모를 만약의 경우나 대비해 두자는 생각으로 추가 작업을 했던 건데, 어떻게 딱 들어맞았네요.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시비를 걸어 준 사람이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역시나 낌새를 느꼈다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로카가, 그것도 전날 카르사노가 걸었던 시비 덕분에.

그저 10년 가까이 억눌렸던 감정을 살짝 표출했던 것뿐이었다.

당연히 계획했던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저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치며 저도 모르게 읊조렸던 한마디가 다였다.

그런데 이 우연과 약간의 감정 표출이 섞이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도출되고 말았다.

대바이퍼 백작가의 후계자가 하녀 출신 따위에게 무릎 꿇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말이다.

“……모략이다. 이건 우리 가문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모략이야. 난 전혀 모르는 일이다.”

“역시 끝까지 발뺌하는군요.”

“발뺌? 웃기지 마라. 처음부터 우리 가문을 수렁에 빠뜨리려 음모를 꾸민 거였어. 우리 바이퍼 백작가와 크리스토퍼 왕자님은 절대 이 상황을 묵과하지 않을 거다.”

일단은 억지만이 살길이었다.

체면이고 뭐고 상관없었다.

무슨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상황을 모면해야만 했다.

“내가 이 상황을 대전에 낱낱이 고해서 왕녀와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놈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당연히 너희 두 연놈 역시…….”

후웅~

철썩!!

“……어?”

그런데 지금 카르사노의 모든 생각과 계획 따위를 일거에 덮어 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른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기억나? 내가 아카데미에서 주제도 모르고 눈을 치켜떴다는 이유로 당신에게 당했던 모욕. 당신은 그게 죽을죄라고도 했었는데.”

“너, 너…….”

“죽을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도 불만 없을 거라고도 했고. 그래서 지금 당신은 기분이 어떻지? 본인이 뱉은 말이 있으니 딱히 불만은 없으려나?”

“천한 년 따위가 감히!!”

베로카에 대한 카르사노의 인식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눈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역대급 재능을 지녔든 말든, 5서클에 올랐든 말든 그에게 베로카는 천하디천한 하녀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천한 것이 천인공노할 사고를 쳤다.

태생부터 고귀한 카르사노의 얼굴에 손을 댄 것이다.

그것도 일명 싸대기라 불리는 최악의 방식으로.

“죽여 버린다! 내가 반드시 천한 네년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고야 말 것이다! 그래서 오늘 네년이 저지른 이 참담한 짓거리의 대가를 수십, 수백 배로 받아 내고야 말 것이다!!”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30년가량을 거룩하고 고귀한 신분으로 살아온 카르사노로서는 미친 듯 분노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하여 이 분노를 한없이 짙은 증오와 원한의 말로 쏟아 내는 그였다.

비단 말뿐이 아니었다.

쏟아 내는 말보다 훨씬 더 깊고 단단한 의지 역시 다지고 또 다졌다.

이 더러운 죄악의 값을 톡톡히 치르게 만들겠다고 말이다.

“천한 네년만이 아니다. 천한 네년의 사지를 찢어서 네년 주인들의 입에 쑤셔 넣고 말 것이다!”

“아니, 못 해. 당신은 거기까지 갈 힘이 없거든.”

그러나 이 분노가 베로카에게는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분노하는 카르사노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고개 젓는 그녀였다.

어쩐지 가엾다는 듯한 눈빛까지 담은 채로.

“정확히는 오늘부로 없어진다고 해야겠지. 그토록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당신 가문은 물론이고, 당신 자신의 힘까지도.”

“헛소리하지 마라! 네년 따위가 뭐라고 우리 가문과 나를…….”

“당신과 당신 가문은 선을 넘었어.”

우우웅~

“그게 이유야. 내 손이 따귀에서 그치지 않는 이유. 개인적인 복수만 달성하고 끝내는 수준은 이미 지나친 지 오래거든.”

베로카가 손에 마력을 모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천천히 내밀었다.

“뭐, 뭘 하려는……?”

“말했잖아, 당신의 힘은 오늘부로 없어질 거라고.”

카르사노의 심장을 향해서.

“이 미친년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고나 있는…….”

“알아.”

스윽.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툭.

이윽고 그 손이 목적지에 닿았다.

심장이 자리한 카르사노의 왼쪽 가슴 위에.

“그, 그만둬! 하지 말란 말…….”

콰지지직!

“크아아아아악!!!”

이렇게 시작되었다.

카르사노 바이퍼라는 한 개인의 붕괴, 나아가 그가 속한 바이퍼 가문 전체의 붕괴가.

* * *

“바이퍼 백작이 쫓겨났다고?”

“예, 폐하. 라인하트가 신청한 영지전에 맞서지 못하고 항복했다 합니다.”

카일 이반이 아이단 황제에게 슈라우드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현재 보고 중인 내용은 얼마 전 라인하트로부터 영지전 신청을 받은 바이퍼 백작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의 결과는 금세 도출되었다.

바이퍼는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택했다.

무력으로는 처음부터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나마 명분으로 비벼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번 아티팩트 건이 들통나며 명분마저 라인하트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바이퍼에게 남은 선택지가 항복뿐이었던 것이다.

“바이퍼에 남은 것은?”

“수레 한 대에 실은 재산이 전부입니다. 그나마 장남의 마법 실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번에 서클이 망가지면서 폐인이 됐다고 합니다.”

에펜시아 대륙에는 관습이 한 가지 있었다.

영지전에서 항복한 귀족에게는 수레 하나를 내주는 것이었다.

그 안에 능력껏 현물을 실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나름 먹고살 길 정도는 마련해 주는 관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 말 그대로 먹고살 수 있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결국 없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이퍼 백작령은 에릭스 브란부르크 백작에게 수여된다고 합니다.”

“중부의 백작령이라……. 레나가 큰 걸 얻었군.”

“비단 백작령만이 아닙니다. 두 왕자로부터 금전적 보상은 물론이요, 향후 3년간 북부에 대한 곡물 무상 지원 약속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이번 사태를 일으킨 다섯 개 상단에 유효한 제재들을 가했습니다. 전부 실크로 상단에게 유리한 방향입니다.”

“레나라면 그 정도야 가뿐했겠지. 어차피 부차적인 것들에 불과하기도 하고. 누가 뭐라 해도 이번 일의 진짜 수확은 그녀에 대한 귀족들의 확신이니까.”

“이 정도면 구도는 완전히 굳어졌다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끄덕.

아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슈라우드의 왕위 경쟁은 사실상 종결된 셈이었다.

1왕자든 3왕자든 더는 레나에게 맞설 수 없었다.

설령 완전히 힘을 합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이 이번 사태를 통해 여실히 증명됐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레나의 완승으로.

“하면 이제……?”

하지만 이 종결은 어디까지나 내부적인 종결에 불과했다.

진짜 끝은 슈라우드 내부에 있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 이제 나설 때가 됐지.”

아이단, 그리고 제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제국이 허락하지 않는 한 끝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제국의 본격적인 간섭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카디즈 군도의 어딘손 토르웨이에게 연락해라. 본격적으로 움직이라고.”

시작은 슈라우드 서부의 골칫거리인 카디즈 해상 군도였다.

이곳의 해적왕인 어딘손 토르웨이가 아이단의 첫 번째 카드인 것이다.

“동시에 이쪽에서도 준비에 들어간다. 확실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카드들로.”

물론, 고작 이것이 다일 리 만무했다.

첫 번째는 어디까지나 첫 번째일 뿐, 마무리를 장식할 카드는 따로 있었다.

심지어 한 장도 아닌 여러 장으로.

“예, 폐하. 명을 받듭니다.”

이로써 슈라우드 왕위 계승 국면은 급속도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내부 권력 쟁투에서 왕국 자체의 운명을 건 일대 혈투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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