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장: 악연의 대면
“왕녀님, 소식 들어왔습니다. 방금 후작령 상공에 그리핀의 포효가 울려 퍼졌답니다.”
사네가 돌아왔다.
그리고 소식을 전했다.
레나가 보유한 최고의 수단이 올린 성과에 관한 소식이었다.
“이거야, 끄집어내는 데에 군대까지도 필요 없는 이유.”
“…….”
이에 3왕자 길리언마저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는 반박할 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상황이 약간은 고맙기도 해.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쐐기를 박을까 고민 중이었거든.”
이번 일 전까지 분명 레나가 계승 경쟁에서 확연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슈라우드의 모든 귀족이 분명하게 인지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이 완벽하게 굳어졌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레나가 무려 소드마스터 둘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왕녀라는 족쇄가 여전히 레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한 마지막 한 방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이것 때문에 연극이라도 벌여야 하나 싶었는데, 때마침 두 사람이 먼저 움직여 주더라고.”
이런 시점에 두 왕자가 알아서 일을 벌여 주었다.
둘로서는 역전을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겠으나, 레나 입장에서는 가소로운 앙탈 정도에 불과했다.
그만큼 힘의 격차가 절대적이었다.
“덕분에 이번 일 끝나고 나면 왕국 내에 더 이상 의심하는 귀족은 남아 있지 않을 거야. 그래서 여기까지는 나름 좋게 봐줄 수 있어.”
이번 사태를 통해 모두에게 증명하게 됐다.
벌어진 격차의 절대성에 대해서.
그렇기에 더는 흔들리는 귀족도 없을 터였다.
사실상 계승 구도를 완벽히 굳힌 것이다.
따라서 아주 약간은 고맙다는 마음도 품었던 레나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했어야지. 그냥 금전적인 손해에서 그쳤으면 어느 정도 배려를 하면서 끝낼 수도 있었을 거잖아. 어떤 경우에도 내 사람들 목숨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어.”
하지만 그 약간의 고마움은 한순간에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
레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 순간, 즉 아티팩트 사건이 터진 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이었다.
두 왕자의 반항이 깔끔하게 제압된 이 시점, 레나의 고개는 자연스레 한 사람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바이퍼 백작? 아직도 내가 하는 말이 어쨌다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나요?”
사건의 강력한 용의자, 바이퍼 백작에게로.
아니, 레나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범인은 그와 바이퍼 가문이 확실하다고.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곧 확보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것이…….”
“물론 여전히 모른다 해도 상관없어요. 소로나 영지 소식이 들려오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
* * *
슈라우드 동남부에 위치한 소로나 자작령.
이 자작령의 영주성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다 해서 12명밖에 안 되는 소규모 인원.
그마저도 로브 차림의 둘의 제외하고는 전부 상인으로 보이는 이들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성의 경비병들도 이렇다 할 관심을 주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의 주인인 소로나 자작은 바이퍼 백작의 사촌입니다. 그래서 일개 자작령치고는 기사의 수가 많은 편이지요. 자작이 왕도에 머물면서 셋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현재 영주성을 지키는 기사 수는 무려 여섯이나 됩니다.”
“그렇군요.”
“정말 두 분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두 분께서 마탑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고의 실력자들이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호위도 없이 기사들을 상대하는 일인데…….”
“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세요. 정리되고 나면 신호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경비병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대화 내용이 불순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임무에 심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 분명한 그런 내용인 것이다.
물론 이미 많이 늦은 뒤였지만.
“남작님께서 그러시다면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두 분의 무운을 빕니다, 루아트 남작님, 센트럼 마법사님.”
그렇게 나머지 인원들을 뒤로 한 채 두 명의 마법사만이 앞으로 나섰다.
얼핏 보기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고작 마법사 둘이서 호위도 없이 전투에 나서는 꼴이었으니까.
그러나 앞으로 나서는 두 명의 마법사, 센트럼과 베로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무심하리만치 가벼운 발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제야 두 사람에게 목적을 묻는 경비병들.
이에 곧장 답변을 주었다.
우우웅~
단, 말이 아닌 마법으로.
“어어……?”
구우웅!
베로카의 수인을 따라 한 곳에 응집되기 시작한 마력, 이것이 순식간에 하나의 마법으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경비병들에게는 무언가를 해볼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피, 피해!!”
무작정 바닥을 구르고 보는 것.
일단 살기 위해서라면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익스플로전.”
쿠과과광!!
그렇게 영주성 입구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강력한 폭발, 폭발과 함께 피어오른 흙먼지, 그 여파에 휘말려 쓰러진 경비병들, 그리고 가운데가 뻥 뚫려 버린 성문까지.
모두 단 한 방의 마법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저벅저벅.
반면, 이 사태의 장본인들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가로지를 뿐이었다.
본인들이 만들어 낸 아수라장 사이를 말이다.
“비상!”
“습격이다!”
센트럼과 베로카가 뻥 뚫린 문을 지나 성내 공터에 발을 들일 때쯤이었다.
영주성 전체에 비상이 걸리며 병력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는 곧장 센트럼과 베로카를 빙 둘러싸 버렸다.
마법사 둘이서 족히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병력에 포위당한 것이다.
“뭐 하는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이 포위망에는 당연히 기사들 또한 포함돼 있었다.
즉, 중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에게 완벽히 거리를 내준 상황.
마법사에게는 최악이라 부르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이퍼 백작가의 카르사노 바이퍼. 그자를 찾아왔습니다.”
“보아하니 마법사인 듯한데, 소속과 이름, 남작님을 뵙고자 하는 이유부터 대라. 아니면 험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탑의 일이니, 당신은 가서 카르사노 바이퍼만 불러오면 됩니다.”
그럼에도 베로카는 여전히 개의치 않았다.
간결하게 이쪽의 요구사항만을 읊는 그녀였다.
사실상 명령이라고 봐도 좋은 일방적인 요구사항을,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태연한 목소리로.
“건방진! 마탑 밖에서 이런 건방진 짓거리가 통할 거라고 보는가? 너희들은 현재 소로나 자작령을 습격한 상태다. 얼마든지 즉결처분도 가능해. 죽고 싶지 않거든 제대로 된 정체와 목적을 밝히고,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도 않았겠지요.”
“멍청한 년. 명색이 마법사란 년이 상황의 유불리조차 파악을 못 하는군. 좋다. 정 그리 벌을 받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 주마. 정체야 사지 두어 개쯤 잘라 내고 알아내면 그만이니.”
물론 상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기사에게서 역시 이렇다 할 위기의식은 엿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상황은 질질 끄는 것 없이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쳐라.”
두두두두.
파앗.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1열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20명의 병력이었으며, 개중에는 기사도 둘 끼어 있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일이니만큼 아예 시간 자체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훤했다.
슈아악~!
그렇지 않아도 열 걸음이나 될까 싶은 가까운 거리였다.
이런 거리에서 짓쳐 드니 도달은 순식간이었다.
기사들의 검은 벌써 허공을 반쯤 가르는 중이었다.
슈슈슉~!
병사들의 창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이를 이용해 센트럼과 베로카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된 캐스팅 시간 같은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이대로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파지지지직!
그 순간이었다.
공터에 갑자기 뇌전이 일었다.
대낮임에도 선명하게 시야에 잡힐 만큼 강렬한 뇌전이었다.
우뚝.
그 직후였다.
모든 움직임이 일거에 중단됐다.
달려들며 베고 찌르던 20개의 움직임 전부가,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후두두둑.
그러고는 우수수 쓰러졌다.
기사고 병사고 예외는 없었다.
20명 전원이 그대로 바닥에 몸을 누이고 만 것이다.
지직, 지직, 지지직.
부들부들.
비단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뇌전의 힘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바닥에 몸을 누인 채로도 쉼 없이 경련하는 1열의 병력이었다.
“뭐, 뭐야??”
처음 정체를 묻던 기사가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기사일 테니까.
“이게 무슨……?”
캐스팅 시간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메모라이즈 마법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아무리 메모라이즈 마법이라 해도 최소한 마력이 응집되는 절차는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숙지하는 일반적인 마법 상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당연히 이런 종류의 마법은 들어 본 적이 없을 터였다.
“계속하겠습니까?”
“…….”
“마지막으로 권고합니다. 가서 카르사노 바이퍼를 데리고 나오세요.”
* * *
“으으음.”
카르사노가 신음을 흘렸다.
창문에 쳐진 커튼 틈 사이로 바깥을 보며 흘리는 신음이었다.
바깥의 정황이 영 좋지 못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로나의 병력이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베로카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결국 응전을 택했다.
포위망을 풀지 않고 재차 제압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별 차이는 없었다.
촘촘했던 병력의 간격을 넓게 펼쳐 신중하게 들어갔지만 역시나 허사였다.
첫 번째 시도와 다를 바 없었다.
모두 뇌전에 지져져 쓰러진 채로 경련을 일으킬 뿐이었다.
“센트럼…….”
카르사노는 이 뇌전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 있었다.
센트럼이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과거 왕도 아카데미 재학 시절, 연말 동아리 경연에서 카르사노에게 굴욕을 안겨 주었던 바로 그 뇌전이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닝 슈팅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마법이었다.
비록 위력 면에서 나뭇잎이나 태우던 그때와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기는 하나, 어쨌든 그 독자 마법이 분명했다.
“젠장. 아티팩트는 어떻게 돼 가고 있지?”
카르사노가 수하에게 물었다.
실크로 상단의 상행을 전멸시키고 강탈해 온 아티팩트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것을 이곳 소로나 영지에 은밀하게 보관 중이던 것이다.
그리고 센트럼과 베로카의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곧바로 빼돌리라는 지시를 내린 참이었다.
“집사가 하인들을 총동원해서 뒷문으로 빼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인지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수하의 답변은 좋지 못했다.
첫 폭발음이 들린 지 이제 갓 15분이나 지났을까 싶은 시점이었다.
카르사노가 둘의 정체를 파악한 시점은 그보다 더 뒤였고 말이다.
시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알고…….”
카르사노는 아티팩트 유통 과정을 누구보다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문의 마법 부대를 이끌고 직접 나선 일이었다.
추적 마법 제거 같은 기본적인 사안을 놓칠 리 만무했다.
그 외의 과정도 전부 깔끔했으며, 적어도 그가 아는 선에서 실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용의자로 바이퍼 가문을 의심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빠를 수는 없었다.
그가 강탈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소로나 영지에 도착한 것이 어젯밤이었다.
그런데 고작 하루 만에 카르사노와 아티팩트의 위치를 특정해서 찾아온다?
강탈 전부터 의심했던 것이 아니고는 말이 되지 않는 추적 속도인 것이다.
“차라리 남작님만이라도 빠져나가심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의미가 없어. 아티팩트가 넘어가는 순간, 내가 여기 있고 없고는 저들에게 문제가 아니야. 왕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가문을 엮을 테니까. 어떻게든 아티팩트부터 빼돌려야 해.”
아티팩트가 저들 손에 넘어가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했다.
아니, 결국 넘어가더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절대로 안 됐다.
왕녀의 힘이 1왕자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위인 상황이었다.
여기에 자그마한 명분이라도 넘겨주었다가는 뒷감당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차적으로 내가 나서서 시간을 끈다. 명백한 증거도 없이 바이퍼 백작가의 장남인 나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을 거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빼돌릴 물품이 아티팩트라는 점이었다.
아티팩트는 목걸이나 반지 등의 장신구가 대부분이었다.
부피가 작고 가벼운 만큼 자작령 밖으로 빼내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을 터.
어떻게든 시간만 끌면 아직 희망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법진 준비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그때였다.
콰과광!!!
끝내 소로나 병력의 방어선이 무너지고야 말았다.
성문에 이어 또다시 뻥 뚫린 내문이 그 증거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마주하게 되었다.
“여기 있었군요, 카르사노 바이퍼.”
“…….”
벌써 10년에 가까운 악연의 얼굴을.
하필이면 최악 중의 최악의 장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