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장: 강자의 억지(2)
슈라우드 왕도의 상단 거리.
왕국 내 모든 재화가 몰려드는 이곳은 왕국 경제를 떠받드는 한 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만큼 왕국 주요 상단의 본점들이 이곳에 밀집해 있는 것 역시 당연했다.
쿠광! 콰직! 콰장창!!
그런데 지금 이 상단 거리 일대에 커다란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소 막대한 물자가 드나들며 유발되는 자연스러운 시끄러움과는 결이 달랐다.
무언가 깨지고 박살 나는 소리였으니까.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단, 이 소리가 밀집한 상단들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체 중에서 5개 상단에 한정된 소리였다.
그리고 이 5개 상단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상단들이 슈라우드 왕국의 왕자들을 뒷배로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각각 크리스토퍼 1왕자와 길리언 3왕자 말이다.
“누구긴? 보나파우스 상단의 주인인 투라인 보나파우스 남작 아닙니까?”
상단주의 정체가 읊어진 보나파우스 상단이 대표적이었다.
1왕자와 나로움 후작가를 뒷배로 둔 대표적인 동부의 상단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뻔히 아는 놈이 이런 짓을 벌여? 네놈 정체를 밝혀라!”
“나 말입니까?”
“그래, 네놈. 감히 이런 미친 짓을 벌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이런 거대 상단이 지금 난리통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일단의 병력이 원인이었다.
잘 훈련된 이 병력에 의해 상단 경비원들이 눈 깜박할 사이에 쓸려 나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상단주 집무실까지 점거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현재 보나파우스 상단주가 포박당한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였다.
“왜, 막상 이런 짓을 벌이고 나니 겁이라도 나는 것이냐? 그런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이 줄을 풀어라. 하면 내 특별히 목숨만은…….”
“다이너 브란부르크.”
“엉?”
“그리핀 군단의 부군단장 다이너 브란부르크입니다.”
“다이너 브란부르크라면…… 그 소드마스터 에릭스 브란부르크 백작의 아들 말이…… 오?”
“으음, 이거 어딜 가나 아버지 그늘에 갇혀 있으니, 원. 서러워서라도 얼른 소드마스터가 되든가 해야지.”
‘감히’ 보나파우스 상단주를 무릎 꿇리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다이너였다.
그렇기에 ‘감히’라는 단어는 삭제되어야만 했다.
소드마스터 에릭스 브란부르크의 독자이자, 소드마스터 라이오넬 라인하트의 매제이기도 한 그라면 꼭 못 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런 소드마스터의 아들이자 매제 취급을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다이너였지만, 어쨌든.
“아니, 대체 경 정도 되는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오? 지금 경의 이런 무분별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거요?”
“그럴 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아는 사람이면 더더욱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오? 최근 상황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것은 알겠으나, 그렇다고 왕궁 내부 사정은 고려도 않고 이러면 자칫 내전의 빌미가 될 수도 있소. 하니, 당장 이것을 풀고…….”
“왕궁 내부 사정이 깊게 고려된 행동이니, 그에 대해서는 남작이 걱정해 줄 필요 없습니다.”
“……?”
“설마 내가 이런 일을 명령도 없이 벌이겠습니까? 다 위에서 명령받고 하는 겁니다. 비단 보나파우스 상단에만 이러는 것도 아니고.”
그때였다.
병사 하나가 다이너에게 보고를 해왔다.
“다이너 경, 상단들 전부 점거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다. 잡아들인 상단주 숫자는?”
“여기 보나파우스 상단주를 포함해서 총 넷입니다. 그레이어드 상단과 드로파 상단, 케시우스 상단의 상단주는 잡아들였습니다. 다만, 나로드 상단의 상단주는 예상대로 자리에 없었습니다. 직원들 말로도 현재 동부에 있을 거라고 합니다.”
상단 거리에서 소동을 벌인 목적이 모두 달성됐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보나파우스 상단주에게도 확실히 전해졌다.
상황은 그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이.
“역시 매튜가 전해 준 정보대로네. 알겠어, 그럼 전부 이리로 끌고 와. 한 번에 왕궁으로 연행해 간다.”
“예, 다이너 경.”
여기에 다이너는 친히 쐐기까지 박아 주었다.
잡아들인 상단주들을 아예 왕궁으로 끌고 간다고 말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의지표명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왕궁이라니…….”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 위에서 명령받고 하는 일이라고.”
“그래도 이건 너무 무모하지 않소? 이건 마치…….”
* * *
“내전이라도 벌이자는 거냐??”
“내전이라…….”
“그럼 이게 무슨 뜻이지? 지금 네가 하는 짓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다. 이런 미친 짓을 벌이고도 조용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모르는 척해 봐야 소용없어. 넌 지금 내전을 유발하고 있는 거야.”
크리스토퍼가 레나에게 강력한 비난을 가해 왔다.
레나가 내린 명령에 대한 비난이었다.
실크로 상단을 건드린 다섯 개 상단의 상단주 체포 및 물품 전량 압수.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명령이었다.
크리스토퍼의 말마따나 이 정도면 내전을 불사한다는 의지표명으로 봐도 무방했다.
1왕자와 3왕자의 급소에 대놓고 칼을 휘두른 셈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척? 난 모르는 척한 적 없는데?”
“뭐야?”
“설마 오빠가 아는 걸 내가 모르려고? 당연히 알지, 이게 내전을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거. 그런데 내가 그런 걸 왜 걱정해야 해? 내가 내전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나?”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난 내전이 벌어지든 말든 상관없어. 어떻게 보면 벌어지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지. 복잡한 정치적 계산 같은 거 없이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럴 힘이야 당장에도 충분하고.”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상황이었다.
레나는 두 명의 소드마스터와 그리핀 군단을 쥐고 있었다.
굳이 중립 귀족들을 끌어들이니 마니 할 것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무력 대 무력으로 대화 성립 자체가 불가했으니까.
설령 1왕자와 3왕자가 완전히 힘을 합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쓸려 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만큼 압도적인 무력 차인 것이다.
“…….”
당연히 크리스토퍼라고 해서 이를 모르지 않았다.
단지 레나가 왕녀라는 한계에 취해 잠시 깜박하고 있던 것일 뿐.
한데, 지금 레나가 반문을 통해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것이 그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막 나가시는 겁니다. 누님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한들, 이건 왕국 자체를 완전히 분열시키는 행위에요.”
그렇게 크리스토퍼를 침묵시키고 나니 대타가 나섰다.
이번에는 3왕자 길리언이었다.
“오늘 누님이 벌이신 일에 상단들이 분명 타격을 받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이 상단들의 기반은 각각 서부와 동부에 있습니다. 단순히 상단주만 잡아들인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거, 누님이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버티기에 들어가겠다?”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희가 누님처럼 힘으로 대응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항복하지도 않을 겁니다. 각각 근거지에 틀어박히면 그만이에요.”
“억지로라도 끄집어내겠다면?”
“군대를 끌고 오셔야 할 겁니다. 그게 아니고는 어림도 없을 테니. 대신 그리되면 내전의 책임은 오로지 누님이 지게 되시겠지요.”
나름 그럴듯한 반박이었다.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을 갖췄다 해도 내전의 책임을 오로지 짊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자칫 반역자로 몰리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 1왕자, 3왕자가 아닌 왕국 전체를 상대해야 하고 말이다.
따라서 레나가 먼저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아니, 끄집어내는 데 군대까지도 필요 없어. 윗사람들부터 하나씩 잡아들이다 보면 결국에는 못 견디고 제 발로 나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잡아들일 죄목이야 이미 충분하고.”
“그건 누님의 희망 어린 바람일 뿐이지요. 저희가 내줄 리 있겠습니까? 성문 자체를 굳게 닫고 있을 겁니다. 강제로 뚫지 않는 한 성문이 열릴 일은…….”
“성문 안 뚫어. 닫힌 채로 그냥 둘 거야.”
물론, 레나 또한 먼저 군대를 일으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 이것이 길리언의 반박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군대를 일으킬 필요 자체가 전무했다.
이미 그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최고의 수단을 보유한 상태였으니까.
“무슨……?”
“잊었어? 우리한테 누가 있는지? 먹잇감 사냥하듯 공중에서 하나씩 낚아채 오면 그만이야. 지금쯤이면 슬슬 보고 올라올 때가 됐지 싶은데…….”
* * *
“후우, 운이 좋았어.”
누라스 실로프 남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가 중얼거린 바처럼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마침 왕도를 떠나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원인은 조금 전 마법 통신으로 들어온 급보에 있었다.
나로움 후작가 직속 상단인 나로드 상단이 왕도에서 탈탈 털렸다는 소식이었다.
원래라면 이것은 누라스가 안도할 만한 소식과 거리가 멀었다.
상단주가 본인 상단이 털렸다는데 안도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쯧, 왕녀를 너무 무르게 봤어.”
그러나 지금은 그래도 될 만했다.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했다.
단순히 왕도가 털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실크로 상단에 수작을 걸었던 대형 상단의 상단주들이 죄다 끌려가 버렸다.
그리고 이 명단에는 당연히 누라스 또한 포함돼 있었다.
단지, 그가 일 처리를 위해 나로움 후작령에 머물던 것이 천운으로 작용했을 뿐이었다.
“일단 불행 중 다행이기는 한데……. 하아, 골치 아프네, 골치 아파.”
어쨌든 이 천운 덕분에 누라스와 나로드 상단은 최악을 면할 수 있었다.
누라스는 구속을 피했고, 상단은 위기 상황 속에서 리더를 잃지 않았다.
물론 험난한 가시밭길은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굉장히 골치가 아픈 누라스였다.
하지만 당장은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봐야 했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있을 나머지 4개 상단과 상단주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들은 지금쯤 누라스와 나로드 상단을 부러워하고 있을 터였다.
“카오오오~!!”
그런데 이 부러움이 질투로 화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하늘로부터 매우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어떤 포효였다.
비록 누라스가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나,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그런 포효.
동시에 슈라우드 동부의 끝인 이곳 나로움 후작령에 결코 울려 퍼져서는 안 되는 그런 포효이기도 했다.
콰과과광~!!
“콜록, 콜록. 뭐, 뭐야? 콜록.”
비단 포효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굉음, 그리고 굉음 직후 피어오른 흙먼지도 함께였다.
누라스의 집무실 지붕 한쪽이 무너져내리며 유발된 굉음과 흙먼지였다.
“누라스 실로프 남작?”
“콜록, 콜록. 당신이 어떻게 여기……?”
“나로드 상단의 상단주 누라스 실로프 남작 맞소?”
“그, 그게…….”
“날 알아보는 거 보니 맞네.”
그랬다.
누라스는 알고 있었다.
포효, 굉음, 흙먼지 뒤로 등장한 한 사내의 정체를.
명색이 상단주씩이나 돼서 이 사내, 라이오넬 라인하트를 몰라본다면 그건 직무유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럼 내가 여기 왜 왔는지도 짐작하겠군.”
이 또한 그랬다.
짐작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그 문제로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던 참이니까.
또, 그렇기에 기겁할 수밖에 없는 누라스였다.
“그럼 갑시다.”
이건 납치였다.
납치는 분명 납치인데, 적진 한복판에 떡하니 들어와서 대놓고 해 버리는 그런 납치.
일반적인 형태의 납치와는 그 방식이 사뭇 다른 것이다.
“자, 잠깐만…….”
어쨌든 누라스는 지금 납치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방식이 일반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하여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고자 했다.
그리핀의 포효가 울려 퍼진 직후부터 후작령 전체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끌다 보면 어쩌면…….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러니 좀 과격해도 이해하시오.”
퍼걱!
“케겍!!”
거기까지였다.
누라스의 의식이 인지하는 순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