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131화 (132/200)

75장: 급발진

“루아트 남작님, 오늘도 검수하러 가시나 봐요?”

“네.”

마탑 직원의 물음에 루아트라는 성을 가지게 된 베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의 물음처럼 베로카는 현재 출하 직전의 아티팩트를 검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또, ‘오늘도’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이게 한두 번도 아니었다.

실제로 아티팩트 출하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검수에 나서는 베로카였다.

“남작님 정도 되는 분이 하실 필요 없는 일인데,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아티팩트는 마탑 총수입의 7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아티팩트 검수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으며, 출하 전날에는 반드시 시행하는 것이 마탑의 규칙이었다.

다만, 직원의 말마따나 이것을 베로카가 직접 할 필요는 없었다.

베로카는 심장에 고리를 무려 다섯 개나 형성한 5서클 마법사였다.

슈라우드 마탑 내에서도 베로카 포함 총 넷밖에 없는 엄청난 실력자인 것이다.

따라서 몇 가지를 제외하면 마탑 내 거의 모든 의무에서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베로카는 이 일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나서 왔다.

그리고 지금도 나서는 중이었다.

이 일에 그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은인을 넘어 삶의 이정표라고 해도 좋은 인물, 바로 라이오넬 라인하트가.

1년 전, 실크로 상단이 아티팩트 판매 대행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비율은 무려 25%.

이로 인해 기존 상단들의 비율이, 특히 절반을 차지하던 바이퍼 상단의 비율이 대폭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그 진통이 상당했었다.

하지만 이는 어차피 레나가 알 바 아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실크로 상단이 라이오넬의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 말이다.

하여 지난 1년간 실크로 상단에 배정되는 아티팩트를 직접 나서서 꼼꼼히 검수해 온 그녀였다.

“그럼 이만.”

“예, 오늘도 파이팅하십시오, 남작님.”

그렇게 직원을 뒤로한 베로카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이어 갔다.

얼른 가서 베로카 스스로 정한 그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얼마 가지 못해 이 걸음은 다시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고 말았다.

“쯧, 하녀 출신 따위가 제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기는.”

어떤 중얼거림 때문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인물의 낮은 중얼거림.

이것이 베로카의 발걸음을 재차 멈춰 세웠다.

당연히 앞선 마탑 직원의 그것과는 180도 다른 의미로.

“지금 뭐라고 했죠, 바이퍼 남작?”

이 중얼거림의 주인은 베로카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카르사노 바이퍼였기 때문이다.

카르사노 바이퍼.

바이퍼 백작가의 장남인 그는 베로카와 악연으로 얽혀 있었다.

라이오넬과 크리스토퍼 1왕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필연적인 악연이었다.

동시에 베로카에게 활활 타오르는 목표의식을 심어 준 인물이기도 했다.

과거 아카데미 하녀 시절, 베로카는 카르사노에게 심한 굴욕을 맛본 적이 있었다.

이에 베로카는 당시 그녀 대신 복수해 주려는 라이오넬에게 부탁했었다.

스스로 복수하게 해 달라고,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으니 꼭 그녀의 손으로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대략 10년 가까이 흐른 현재, 베로카는 여전히 이 목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녀의 열정과 천재성을 불사르는 중이었다.

“내가 뭐라고 했소, 루아트 남작?”

“방금 저에 대해 중얼거린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글쎄, 난 잘 모르겠구려. 딱히 기억나지 않아서.”

목표 달성을 위한 전제 조건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6서클을 달성하고 나면 유력 백작가라 하더라도 충분히 해볼 만했으니까.

그러나 이 말인즉슨 당장은 불충분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5서클 마법사가 귀한 존재이기는 해도 바이퍼 백작가와 견줄 만큼은 되지 못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기에는 아직 베로카의 힘이 모자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대의 경우가 성립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카르사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따지고 보면 현실적인 제약은 베로카보다 그에게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베로카가 힘이 모자란 것이라면, 그에게는 힘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사노는 현재 4서클 비기너의 경지였다.

그리 나쁜 성장 속도는 아니었다.

그가 마법 연구보다 마탑 밖에서 백작가 후계 역할에 주력했던 점을 고려하면 말이다.

오히려 약간 빠른 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교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베로카였다.

4서클 비기너 정도로는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운 상대인 것이다.

즉, 베로카와 비교할 때 카르사노가 가진 것이라고는 가문의 후광뿐이었다.

따라서 그 또한 대놓고 베로카를 모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칫 마법결투라도 벌어졌다가는 분명 뼈도 추리지 못하게 될 터.

아예 빌미 자체를 줘서는 안 되는 약자의 입장인 것이다.

“혹시 요즘 환청 같은 걸 들으시오? 만약 그렇다면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을 거요. 내가 아는 사람 중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환청에 강박증까지 얻게 된 경우도 있거든.”

대신 이런 식의 비꼬기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어찌 됐든 베로카에게 명확한 빌미만 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가요? 이거 참 우연의 일치네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마침 그 반대의 경우가 있어서 말이죠.”

단,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그 반대의 경우가 한층 더 강렬하다는 점 역시도.

“하녀 출신 따위에게 형편없이 밀리는 바람에 평소에는 꼬리 말고 슬슬 피해 다니기만 하는 귀족이 있답니다. 제 주제를 깨닫고 기죽어 다니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뭐……?”

“그런데 한 번씩 깨달았던 제 주제를 망각하게 되는 날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갑자기 미쳐서는 자기보다 까마득히 윗줄인 강자에게 시비를 걸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좀 걱정이랍니다. 멋모르고 미쳐 날뛰다 비참한 꼴을 겪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하는 뭐 그런 걱정.”

“…….”

이래서였다.

그간 베로카와 카르사노의 마주침이 극히 드물었던 이유.

또, 어쩌다 마주친다 해도 특별한 상황 조성 없이 잔잔하게 지나갔던 이유.

결국, 카르사노는 철저한 약자에 불과했다.

약자인 그는 강자인 베로카의 신랄한 언변에 그 어떤 반박도,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껏 베로카를 슬슬 피해온 카르사노였다.

충돌 시 지금과도 같은 흐름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 기고만장하겠지. 그 기분, 지금 많이 즐겨 두시오. 머지않아 후회할 날이 올 테니.”

그런데, 그랬던 카르사노가 오늘 갑자기 급발진했다.

평소처럼 못 본 척 스쳐 지나가면 될 것을 괜히 한번 시비를 걸어 온 그였다.

다소 뜬금없는 급발진인 것이다.

“흐음,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어떻게 봐도 그런 날은 오기 힘들 것 같은데.”

단, 과정이 뜬금없다 해도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강자와 약자의 구도는 그대로였으니까.

더구나 외부 상황마저도 점점 더 베로카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권이 1왕녀 쪽으로 점차 굳어져 가는 중이었다.

이대로면 카르사노가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날은 결코 오지 못할 터였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훽!

그래도 오늘만큼은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세우려 노력하는 카르사노였다.

끝내 두고 보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그러고는 곧장 몸을 돌려 휑하니 떠나 버리는 그였다.

절레절레.

베로카는 멀어져 가는 카르사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뜬금없이 이기지도 못할 시비를 걸더니, 잔뜩 얻어맞기만 하고 도망친 셈이었다.

베로카의 눈에는 참 대책 없는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해서 그냥 신경을 껐다.

과거의 굴욕을 제대로 갚아 주는 것은 어차피 차후의 일.

당장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의무에 전념할 때였다.

그렇게 최종 검수를 위해 다시금 걸음을 옮기는 베로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런 방해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셨군요, 루아트 남작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요, 지라트.”

목적지에는 베로카를 맞이해 주는 이가 있었다.

지라트라는 이름을 가진 실크로 상단의 아티팩트 담당자였다.

검수 과정을 여러 차례 함께 한 만큼 베로카와도 꽤 친분이 쌓인 상태였다.

“지라트도 잘 지냈나요? 상단 일 때문에 많이 바쁘죠?”

“장사꾼이 바쁘지 않으면 쓰겠습니까? 저는 바쁠수록 오히려 더 즐겁습니다. 다만…… 몸만 바쁘면 좋겠는데, 요즘 상단 사정이 좋지 못하다 보니 덩달아 마음도 바빠져서 문제입니다.”

“상단이요? 무슨 일 있나요?”

“소식 못 들으셨나 보군요. 최근 1왕자와 3왕자 측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대로는 왕녀님께 안 되겠다 싶은지 공개적으로 손을 잡아 버렸지 뭡니까? 그러고는 저희 상단에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가해 오고 있습니다. 이놈들이 글쎄…….”

덕분에 베로카는 마탑 내에 있으면서도 나름 최신 소식을 접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한 소식을 접하게 됐다.

실크로 상단이 수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상단은 현재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공격당하는 중이며, 아쉽게도 적절한 대응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뿌리가 얕은 신생 상단의 한계라는 것이 지라트의 한탄 섞인 부연설명이었다.

‘그래서였던 건가?’

뜬금없던 카르사노의 시비 또한 여기에 기인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본인들의 수가 먹혀든다 싶으니 괜한 자신감이 차 오른 것이다.

물론 무모한 시비는 결국 그 자신감과 정반대의 결과로 마무리되었지만.

“어쨌든 아티팩트 판매만큼은 절대 차질이 생기면 안 됩니다. 여기에까지 문제 생기면 그때는 정말 상단 전체가 휘청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일단 검수는 평소보다 더 철저하게 해 놓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역시 남작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검수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걱정한 적 없습니다. 남작님께서 어떤 분이신데, 제가 걱정 같은 걸 하겠습니까?”

이리하여 베로카는 본격적인 검수 작업에 들어갔다.

지라트에게 언급한 대로 평소보다 훨씬 더 꼼꼼하고 철저하게,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그리고 다음 날, 모든 과정을 거친 아티팩트는 아무 문제 없이 출하를 마쳤으며, 이내 지라트가 이끄는 실크로 상단과 함께 무사히 마탑을 떠나갔다.

* * *

―아티팩트를 전량 강탈당했습니다.

마법 통신구를 타고 매튜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 목소리는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또, 행수 지라트 포함 운송 인력 전원…… 사망했습니다. 명백한 살인멸구의 의도로 보입니다.

“……미안해, 매튜.”

보고를 받는 레나 또한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깊게 얽혀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왕녀님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미리 언질까지 주지 않으셨습니까?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이 사태는 누구 하나의 잘못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레나는 매튜에게 이 사태의 가능성을 예고했었다.

그리고 매튜는 이에 맞춰 아티팩트 운송 및 호송 인원의 양과 질을 대폭 강화했다.

이런 나름의 대비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참사인 것이다.

“그래도 미안해. 어떤 핑계를 대든 결국 이건 내 책임이니까.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최우선으로 진행해 줘. 비용은 전액 내가 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전부 최상의 예우를 갖춰서.”

―하지만 이건…….

“그렇게 해 줘, 매튜.”

―……예, 알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지난번에 얘기한 건?”

안타까운 사태였다.

또, 이대로라면 그저 안타깝기만 한 사태로 종결될 터였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편이 당했다면 상대에게는 그 배로 대갚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으니까.

―집계 중입니다. 사흘 내로 마무리 예정입니다.

“좋아. 터럭 하나 빼먹지 말고 전부 집계해. 적절한 과장도 잊지 말고.”

지금까지 당해 줄 만큼 당해 왔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에 대한 답을 줄 차례였다.

지난번 1왕자와 3왕자에게 예고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번 아티팩트 건 말인데, 실크로 상단은 따로 움직일 필요 없어.”

―그럼……?

“이건 목숨값이잖아, 고작 금전적 보상 같은 걸로 끝내면 안 되지. 그에 걸맞게 다른 쪽에서 움직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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