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장: 앙숙의 연합
이윽고 내 정체를 깨닫게 된 에치오.
그런 에치오를 데리고 곧장 왕궁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녀석에게 수습할 시간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하여 레나에게 소개를 마친 현재까지도 완전히 얼이 빠져 있는 에치오였다.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 같은데, 미리 좀 알려 주지 그랬어요?”
“입이 싼 녀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막 무거운 녀석은 아니라서 말이지요. 슈라우드까지 오는 동안 펍이나 여관에서 술 먹고 실수할 수도 있어 일부러 밝히지 않았습니다.”
“흐음, 그냥 놀리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물론 이런 반응을 아예 기대하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군요.”
정신 못 차리는 에치오는 그대로 둔 채 대화를 이어 갔다.
그리고 이 대화 상대에는 에릭스도 포함돼있었다.
“어쨌든 백작님, 이 녀석 교육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왕녀님 곁에 붙여 두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왕궁 정문 앞에서 밝혔듯 에치오의 새로운 직업이 왕녀 호위였다.
현재 레나의 호위는 에릭스가 전담 중인 상황.
따라서 에치오는 에릭스에게 부탁하는 것이 당연했다.
“감이 남다르다고?”
“예, 생존본능이 말도 안 되게 탁월한 녀석입니다. 생명의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예지에 가까운 수준으로 발달해 있어요.”
“특이한 녀석이군.”
“백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확실히 저도 처음 보는 종류의 재능이었습니다. 다만, 그 외의 것들이 평범하거나 혹은 평범 이하에요. 신경 좀 써 주셔야 할 겁니다.”
“재미있겠구나. 알겠다, 내가 한번 제대로 가르쳐 보마.”
이렇게 에치오의 앞날이 결정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릭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이 180도 달라질 터였다.
그 방향이야 당연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쪽일 테고 말이다.
단, 앞으로 입에서 단내가 끊이지 않으리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왕녀님께는 아까 말씀드린 타로쉬핸드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요, 라이. 걱정 마세요. 지금 데파이 경과 함께 있다고 했죠?”
“예, 다행히 같은 장인끼리는 통하는 게 많아 보였습니다. 몇 마디 나눠 보더니 갑자기 공동 작업에 들어가더군요. 어쩌다 보니 제 검까지 빼앗기고 왔습니다.”
데파이의 거처에 두고 나온 것은 타로쉬핸드만이 아니었다.
여정도 같이 두고 왔다.
여정이 이들의 공동 작업 대상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괴팍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장장이들이었다.
당연히 권유보다는 강탈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는 나로서도 기분 좋은 강탈일 수밖에 없었다.
이 대가들이 의기투합한다면 여정의 진정한 완성이 가능할지도 몰랐으니까.
“덕분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케어가 필요하긴 합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반감이 기본적으로 워낙 큰 상태라.”
“알겠어요. 타로쉬핸드는 제가 직접 케어할 테니, 라이가 일단 소개만 해 줘요. 드워프 부족이 새로 정착할 만한 곳을 알아보는 일도 마찬가지고요.”
“감사합니다, 왕녀님.”
이로써 멘토 배정이 마무리됐다.
에치오는 에릭스에게, 타로쉬핸드는 레나와 데파이에게.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덕분에 앞으로 내가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어 보였다.
“라이, 그럼 이제 이베리아 영지로 갈 생각인 것이냐?”
“예, 백작님. 그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으니까요. 가서 당분간은 군단장 일에 전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렇구나.”
“왜 그러세요? 어쩐지 표정이 떨떠름해 보이시는데.”
그런데 어째 다음 행선지를 묻는 에릭스의 표정이 애매했다.
뭐랄까, 개인적인 안도와 더불어 나를 향한 약간의 미안함을 품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애매하면서도 복합적인 감정이 그의 표정을 타고 전해져 왔다.
“별건 아니다. 그저 에일린이 궁금해하길래 대신 물은 것뿐이야.”
“혹시 에일린 그 녀석 목소리…… 많이 차갑던가요?”
“으음, 글쎄다.”
“……그랬군요.”
나도 알고 있었다.
군단장 자리를 오래 비워도 너무 오래 비웠다.
카르가디아 산맥 청소 작업을 끝낸 이후로 쭉 비웠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아무리 대리 체계가 잘 잡혀 있다 해도 군단장이 직접 처리해야 하는 부분은 존재하는 법.
놀러 다닌 것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면 직무유기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사네마저 왕도로 상경한 지 벌써 1년이 다 돼 가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일전에 사네가 얘기했다시피 그 자리는 에일린이 이어받은 상태였다.
즉, 이베리아 영지부터 그리핀 군단까지 전부 에일린이 도맡고 있는 상황.
군단장 자리를 나 몰라라 해 온 내가 곱게 보일 리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 뭐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가서 네 원래 계획대로 군단장 일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래도 백작님이 그 녀석 시아버지이신데, 시아버지 말씀이면 좀 통할지도…….”
“흠흠. 웬만하면 나는 좀 빼 주려무나.”
이럴 때의 에일린은 정말로 무서웠다.
과거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다 죽을 뻔한 뒤로 확실히 체감한 바 있었다.
이는 비단 나만 아는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에릭스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내 도움 요청을 대놓고 회피해 버리는 에릭스의 어색한 눈빛이 그 방증이었다.
“그럼 선물은 어떻겠습니까? 선물이라도 전하면 온도가 조금은 올라가지 않을까요?”
“오라비란 녀석이 자기 동생을 시아비인 나보다도 몰라서야 쓰느냐? 어릴 때부터 사치라고는 담을 쌓고 살던 아이다. 괜히 화만 더 돋울 가능성이 커.”
“물론 그렇긴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손이 큰 녀석이지 않습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면 좀 통하지 않을까도 싶은데.”
“주변 사람에게 주는 선물? 주변 사람 누구?”
“에일린에게 먹힐 만한 주변 사람이라고 해 봐야 뻔하지 않습니까? 시아버지인 백작님과 남편인 다이너, 이렇게 딱 둘뿐인 것을요.”
“다이너와 나……??”
다만, 비책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래도 이거면 많이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런 용도로 쓰기 위해 구한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런 용도로 쓰기에는 물건의 가치가 지나치게 높았다.
“이번에 남부에서 구해 온 정령석들입니다. 각각 불의 정령석과 대지의 정령석이에요.”
“……!!!”
무려 정령석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어떻게든 얻지 못해 안달인 이 귀물을 고작 여동생 심기 달래는 데에 쓰고자 하는 것이다.
“이걸 드리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확실하게 약속해 주세요.”
그러나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 둘에게 주기 위해 구해 온 물건이었으니까.
어차피 주는 거 여동생 화를 누그러뜨리는 용도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일 터.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이보다 더 완벽한 쓰임새가 존재할 수 없었다.
하여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정령석을 내밀었다.
“이번만큼은 에일린에게 시아버지로서의 위엄을 제대로 보이셔야 합니다. 오빠 너무 무섭게 몰아붙이지 말라고, 오빠한테 그러는 거 아니라고.”
“…….”
“약속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에일린 화 푸는 것 좀 도와달라고 말이다.
* * *
자정에 가까운 깊은 밤, 슈라우드 왕국 3왕자 길리언 바이나프 슈라우드의 처소에는 손님이 한 명 찾아와 있는 상태였다.
이 손님은 3왕자 길리언을 향해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계속 무난하게 흘러가다 보면 결국 슈라우드에는 여왕이 즉위하고 말 겁니다. 단독으로는 왕녀님의 세력을 당해 내지 못한다는 거, 왕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이제는 저희와 왕자님이 공식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암묵적인 동조 정도로는 반전은커녕 상황 악화조차 막을 수 없습니다.”
“나로움 남작의 뜻은 잘 알겠소. 무언가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은 나 또한 느끼고 있던 바외다.”
손님의 정체는 클리앙 나로움.
크리스토퍼 1왕자의 심복이자 그의 정치적 기반인 나로움 후작가의 장남이었다.
그가 이 야심한 시각에 길리언 3왕자를 찾아와 세력 간 동맹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합한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지 않소? 자칫 누님에게 경각심만 심어 주는 꼴만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현재의 국면대로라면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세력의 근간을 공격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세력의 근간을 공격한다?”
“어느 세력이든 그 근간은 무력과 경제력에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타격을 입히는 겁니다.”
“으음, 그건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큰 듯한데? 특히 무력 면에서 우리는 아예 상대가 안 되지 않소?”
“물론 무력 면에서는 그렇지요. 저쪽에는 소드마스터가 무려 둘이나 있으니. 저도 이 부분은 직접 타격이 어렵다고 봅니다. 하지만 경제력은 다릅니다. 이 부분을 공격해 들어간다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경제력이라…….”
“왕자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왕녀님 세력을 경제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실크로 상단 말입니다. 이 상단, 역사가 짧은 만큼 기초적인 분야가 안정적이지 못합니다. 특히 곡물 거래처럼 기존 관계와 세력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클리앙의 말마따나 레나의 경제적 기반은 실크로 상단이 떠받치고 있었다.
라이오넬과 에릭스, 라인하트 영지, 이베리아 영지와 그리핀 군단 등이 세력의 주요 장기라면, 실크로 상단은 혈관으로서 이 장기들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중요성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
그리고 이 실크로 상단을 공격해 들어가자는 것이 클리앙의 제안이었다.
실크로 상단의 주요 기반은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광물 거래, 몬스터 부산물 거래, 썬더 실크 독점권, 아티팩트 판매 대행, 그리고 곡물을 포함한 기타 일반 거래 등.
이 중 앞의 것들은 외부에서 건드릴 만한 여지가 크지 않았다.
각각 라인하트 영지, 그리핀 군단, 마이바크 왕국, 마탑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되려 큰 화를 입기 십상인 것들이었다.
반면, 곡물을 포함한 기타 일반 거래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거래망으로 대변되는 상단의 역사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역이었다.
신생인 실크로 상단으로서는 구조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인 것이다.
“이 부분, 특히 곡물을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때마침 이상 기후 때문에 작황이 평년의 2/3 수준도 안 되지 않습니까? 지금이 바로 공격해 들어갈 최적기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면 구체적인 타깃은? 실크로 상단만을 노리는 것이오?”
“아닙니다. 실크로 상단은 물론이거니와 북부까지 타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북부까지? 어떻게?”
“방법은 간단합니다. 흉작을 핑계로 동부와 서부가 연합해서 타지역과의 곡물 거래를 중단하는 겁니다. 하면 중부와 남부는 괜찮겠지만, 북부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테지요.”
슈라우드 북부는 추운 날씨로 인해 자체적인 곡물 생산 기반이 취약했다.
하여 지금껏 타지역과의 거래를 통해 부족한 곡물을 충당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이 거래가 뚝 끊겨 버린다?
당연히 지독한 식량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더욱이 올해는 이상 기후 때문에 대륙 전체적으로 흉작인 상황.
레나 세력의 핵심인 남부 이베리아 영지 역시 넉넉지 못한 입장이었다.
당장은 그리핀 군단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수준에 불과했다.
따라서 세력 내 자체적인 생산량만으로 북부를 지원하는 일은 요원하다고 봐야 했다.
“그래도 괜찮겠소? 북부의 바르코스 후작에게 명백히 시비를 거는 일인데?”
“바르코스 후작이 겉으로야 중립을 표방한다지만, 왕녀님께 호의적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 않습니까? 지금 흐름을 돌려 놓지 않으면, 머지않아 공개적으로 왕녀님을 지지하고 나설 게 뻔합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한 선택을 강요해야 합니다.”
“곡물을 통해 그 방향을 우리 쪽으로 강제하겠다는 것이군.”
“바로 그겁니다. 마침 왕자님께는 핑곗거리도 적절하지 않습니까? 흉작으로 서부 해상 군도 해적들의 노략질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까요. 이걸 명분 삼아 곡물 거래 금지를 시행한다면 왕녀님도 어쩌지 못하실 겁니다. 물론, 저희 역시 제국을 통해 적절한 명분을 마련할 것이고요.”
“으음, 확실히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요. 실크로 상단을 흔드는 것으로 모자라 북부까지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입니다. 물론 위험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크리스토퍼 왕자님께서는 이미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길리언 3왕자 역시 적잖이 혹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마침표를 찍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저희 쪽의 바이퍼 가문에서 따로 준비 중인 것이 있습니다. 동·서부의 동시 압박에 더해 이 문제까지 터지면 실크로 상단은 뿌리째 휘청거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양 세력에게는 짭짤한 경제적 이득으로 돌아올 테고 말이지요.”
“음…….”
“이제 남은 것은 왕자님의 결단뿐입니다. 어떻게, 이 정도면 충분히 함께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