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장: 재회
“볼티너의 반응은?”
로만 제국의 황제 아이단.
그가 막 볼티너 2왕자와의 통신을 끝내고 들어왔을 카일 이반에게 물었다.
“예상대로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릇된 정보를 전해 준 본인의 잘못을 지적하니 금세 잠잠해졌습니다.”
볼티너 왕자는 카운테스 성 공방전에서 대패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본거지인 보토 후작 성으로 물러나고 있는 상태였다.
믿었던 제국의 지원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이 테네시아 왕국으로 은밀히 파견한 비콰이어 브레스 백작.
그가 목표물인 용병 라트를 사살하기는커녕 되려 본인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런 뒤 재개된 라트의 활약과 함께 볼티너 왕자 군 진영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단, 볼티너가 이에 대해 깊이 따지고 들 자격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주지만 않았어도 이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을 터.
용병 라트의 실력은 볼티너 측의 추정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비록 피어오른 흙먼지로 인해 과정이 가려졌지만, 어쨌든 결과는 명확했다.
라트라는 놈은 소드마스터 이상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야 이 결과는 말이 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인 비콰이어 브레스가 이리도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손해가 막심하군.”
“…….”
더욱이 제국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소드마스터 하나를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아무리 제국이라 하나 이는 결코 작은 피해라고 볼 수 없었다.
여타 왕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제국에게 역시 뼈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뿜어져 나오는 아이단의 차가운 분노가 이를 방증했다.
“그들을 다시 보내도록.”
이는 비단 감정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국의 실질적인 추가 개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들을 다시 말입니까?”
“어차피 안드리 카운테스 하나 잡는 것으로 그들이 범한 실수를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어. 이번 일까지 맡아서 처리하고 나면 얼추 셈이 맞겠지.”
“예, 알겠습니다.”
“그들에게 확실히 전해. 그 어떤 경우에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마이바크에 이어서 테네시아의 일까지 틀어지고 나면 내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을 듯하니.”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아이단의 분노는 확실히 가볍지 않았다.
이에 명령을 받는 카일 이반의 목소리 또한 한층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라트라는 놈은? 정체는 아직인가?”
“송구합니다, 폐하. 너무 뜬금없이 튀어나온지라 추적에 다소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것대로 진행하되, 추가로 전해. 이번에 가능하면 그 라트라는 놈을 사로잡아 오라고. 뒷조사보다 당사자에게 캐내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겠지.”
이렇듯 황제와 로만 제국은 점점 더 깊게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라트의 진정한 정체가 품은 어떤 확고한 의지에 말이다.
* * *
지난 카운테스 성 앞에서의 전투 이후로 석 달여가 흘렀다.
그리고 이 석 달 만에 테네시아 왕국 두 왕자의 입장은 정반대가 된 상태였다.
크레이그 1왕자의 군대가 볼티너 2왕자의 본거지인 후이그 보토 후작 성을 둘러싼 형국.
즉, 공수는 물론이고 전황의 유불리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병력 현황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전투 종료 직후 1,000여 명까지 떨어졌던 크레이그 군의 병력은 어느새 5,000여 명까지 불어나 있었다.
기사는 무려 110명에 달했다.
볼티너 군의 패퇴에 더해 대대적인 선전이 제대로 먹혀든 덕분이었다.
볼티너가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내용의 선전.
비록 그 외세가 어디인지까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중립을 유지하던 귀족들의 상당수가 크레이그 왕자에게 가담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 또한 점점 더 불어나는 중이었다.
반면, 볼티너 군의 병력은 크레이그 군의 채 절반이 되지 못했다.
대략 2,3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마저도 반 이상이 새로운 징집병들이었다.
사실상 훈련이 전혀 안 된 농민들에게 무기만 쥐여 준 꼴이라고 보면 됐다.
이렇듯 병력의 양과 질 모두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
이제 공식적으로 남은 것은 볼티너를 처단하는 일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정리해 놓고 신호 드리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나? 흠, 아무래도 그대 혼자 들여보내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만약 예상치 못한 상황이 해도 차라리 저 혼자인 편이 낫습니다. 저 혼자라면 어떤 경우에도 몸을 뺄 수 있으니까요.”
“으음…….”
“작고하신 카운테스 후작께서도 함께 진입한 기사들에 발이 묶이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만약의 경우 발생 시 전력 보존 측면에서도 제가 혼자 진입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다만, 비공식적으로는 한 가지가 더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 비공식적인 일은 그 성격만큼이나 은밀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알겠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하게. 무사히 나와야 해. 무사히 나와서 나와 테네시아 왕국이 그대에게 은혜 갚을 기회를 꼭 줘야만 해. 약속할 수 있겠나?”
“약속드리겠습니다. 몇 배로 받아 갈 작정이니 그때 가서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내 바람이야. 제발 좀 그래 주길 바라네.”
“예, 꼭 그리하지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크레이그 왕자와 그의 군대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야음을 틈타 홀로 외성 벽을 넘어섰다.
짙은 어둠 속에서 나 혼자 침투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런 뒤, 곧장 후이그 보토 후작의 대저택으로 향했다.
내가 찾는 존재들은 필시 그곳에 머물고 있을 터.
하여 망설임 없이 진입해 들어갔다.
저택에 들어선 뒤에는 굳이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초고서클의 경계 마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완벽한 잠입은 나라 해도 쉽지 않았다.
해서 차라리 대놓고 빠른 속도로 침투한 것이다.
경계병들이야 어차피 장애가 되지 못했고 말이다.
달칵.
그렇게 문까지 직접 열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찾는 이들이 전부 홀에 모여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저놈, 저놈이오!”
우선 볼티너 2왕자.
후이그 보토 후작으로 추정되는 노인 옆에 서 있는 그가 나에 대해 떠벌렸다.
그의 모든 것을 망친 장본인이 바로 나였다.
반가면을 쓴 채 등장한 나를 다른 사람도 아닌 볼트너가 몰라볼 리 만무했다.
“저놈이 반가면 라트라는 그 빌어먹을 용병이오!”
꼭 이르기라도 하듯 내 정체를 까발리는 볼티너.
이런 볼티너의 고자질을 받아 준 인물은 지금까지 볼티너 진영에서 본 적 없는 자였다.
“의외로군. 혼자 이곳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이 인물과 나의 시선이 정면으로 얽혀들었다.
단순한 외양만 가지고는 정체 추론이 불가했다.
이자 역시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이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는 똑같이 복면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당신들이오? 카운테스 후작과 그 기사단을 몰살시킨 흉수가?”
“글쎄, 딱히 대답해 줄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하긴, 굳이 그럴 필요 없긴 하지. 어떻게 돌아간 상황인지 대강 감은 잡혔으니까.”
“감이 잡혔다? 아무래도 잘못된 감을 잡은 듯하군. 진짜 감이 잡혔다면 이리 여유 부리고 서 있는 게 아니라, 당장 줄행랑치고 있었을 테니.”
“아니, 그 반대요. 제대로 잡았으니 이리 여유 부리고 서 있을 수 있는 거거든. 좀 빡빡하기는 해도 당신들까지는 계산 범위 내에 포함시켜 뒀으니까.”
분명 두 사람의 외양적인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전부 가려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확률적인 추측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정확한 파악이었다.
“두 사람 다 오랜만입니다. 크루젠 벤투스 후작, 그리고 스루지아넨 카이탄 백작.”
“……!!!”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어둠을 바탕으로 타인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였다.
이런 내가 나와 한 번씩 진하게 얽힌, 육체의 대화까지 나눈 이들을 몰라볼 리 없는 것이다.
특히나 이 둘은 나와의 얽힘으로 인해 상당한 낭패를 본 이들이었다.
우선 나와 대화를 주고받은 크루젠 벤투스 후작.
화염의 정령석을 섭취한 소드마스터였다.
나아가 황제 즉위식 경연에서 나와 대결을 펼쳤다가 가뿐하게 제압당한 인물이기도 했다.
내 정령력의 실체를 파악하려 덤벼들었다가 된통 당하기만 한 것이다.
그 옆에 있는 스루지아넨 카이탄 백작도 비슷했다.
이 인물 역시 나로 인해 적잖은 굴욕을 맛본 바 있었다.
그가 바로 이베리아 평원에서 유형화된 어둠에 제압당한 6서클 대마법사였다.
그 뒤 아이단 황제와의 협상에서 레나의 강력한 카드로 활용되기도 했고 말이다.
나아가 이 과거들 때문일 터였다.
나와 얽힌 이 과거들로 인해 소드마스터에 6서클 대마법사씩이나 되는 인물들이 지금 여기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황제가 슈라우드와 바이젠 왕국의 균형유지를 위해 들인 노력이 얼마이며, 내 실력 파악을 위해 투자한 비용이 얼마이겠는가?
황제의 이러한 노력과 비용을 전부 물거품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두 사람이었다.
아마 일국의 핵심 전력들이 아니었다면 곧장 폐기되고도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대신 그때의 실수들을 이렇게라도 만회하고자 하는 것이다.
복면 아래에 정체를 숨기고 더러운 짓까지 서슴지 않아야 하는 음모의 중추로서.
추정이기는 하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정이었다.
“……뭐 하는 놈이지?”
“글쎄, 나도 딱히 대답해 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내가 아예 이름까지 정확하게 짚어 낸 뒤였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쯤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
그렇기에 차마 부정하지 못한 채 내 정체를 묻는 크루젠이었다.
“대신 약간의 힌트 정도는 드리지요.”
스르릉.
나는 여기에 말로서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서 단서를 주었다.
단, 어차피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 단서를 받은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크루젠이었기 때문이다.
“그 검……??”
그의 뇌리에는 깊게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정’의 치명적인 자태, 그리고 이 치명적인 검을 소유한 주인의 정체가.
“네놈 설마……!!”
파앗!
그래서였다.
금세 알아챌 것이 빤했기에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검을 빼 들자마자 곧장 크루젠을 향해 짓쳐 들었다.
지이잉!
어차피 서로의 힘은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하고 있는 상황.
따라서 괜한 탐색전 같은 것도 건너뛰었다.
초장부터 여정 위로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 올렸다.
무엇보다 현 상황은 나로서도 심히 빡빡한 조건이었다.
계산 범위 내라고는 하나, 어쨌든 소드마스터, 6서클 대마법사와 동시에 대결을 펼쳐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올 상황이랄까?
심지어 소드마스터도 그냥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정령석을 섭취한 화염의 소드마스터였다.
눈 한번 잘못 깜박였다가는 그대로 황천길이나 진배없었다.
지이잉!
크루젠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곧바로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 올렸다.
당연히 방심하는 기색 같은 것은 전무했다.
내 힘을 누구보다 진하게 겪어 본 그였다.
6서클 대마법사와 함께라 하여 그런 허술한 마음 따위를 품을 리 만무했다.
콰과과광!!
사아아~!
화르륵~!
시작부터 각각 어둠과 화염까지 동원했다.
나는 크루젠을 찍어 누르려 했고, 크루젠은 나를 불태우려 했다.
그렇게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충돌이 전개됐다.
쿠과과광!!
경연 때도 그랬지만, 이 승부가 단칼에 결정 나기는 어려웠다.
나와 크루젠의 격차가 그 정도로 압도적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부가 갈리는 데까지는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백작! 그놈이오. 라이오넬 라인하트!”
“예! 잠시만 붙잡아 주십시오. 오래 안 걸립니다.”
단, 외부적 요인이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리고 크루젠에게는 그것이 존재했다.
스루지아넨 카이탄.
크루젠 못지않게 나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6서클 대마법사.
그가 주문 영창에 들어간 것이다.
콰과광!!
“네가 무슨 계산을 했든 상관없다. 뭐가 됐든 어차피 통하지 않을 테니.”
슈아악~!
콰과과광!!
이에 크루젠이 나를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누가 봐도 확실한 승리 플랜이 갖춰진 상태였다.
이 플랜에 따르면 지금처럼 나를 붙잡아 두기만 해도 충분할 터.
더구나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터였다.
우우우웅~
6서클 대마법사답게 벌써 영창을 마무리 지어 가는 스루지아넨이었다.
마법의 종류는 알 수 없으나 이거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마법, 강력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맙다. 네 오만함 덕분에 실수 만회뿐 아니라, 폐하께 커다란 선물까지 안겨 드릴 수 있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