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장: 역공
“지내는 데에 불편함은 없나?”
“별채, 편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다시 한번 그대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라트, 그대의 활약 덕에 흐름을 우리 쪽으로 가져올 수 있었어.”
“용병입니다. 돈 받았습니다. 할 일 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세상에 그 어느 용병이 이리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해 준단 말인가? 이렇게 기사만 쏙쏙 골라서 처리해 주는 용병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대의 공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거야.”
크레이그 1왕자가 감사와 극찬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 감사와 극찬의 대상은 일개 용병이었다.
일국의 왕자가 일개 용병을 집무실로 직접 불러 치하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얼핏 특이해 보이는 상황.
그러나 실질은 그렇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모자랐다.
나 하나로 전황이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으니까.
크레이그 왕자가 바보도 아니고, 일국의 왕자씩이나 되는 이가 모를 리 만무했다.
그 또한 정세 판단이 마냥 느리거나 어둡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내가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한 첫날부터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곧장 단체 숙소가 아닌 별채를 제공했으며, 추가적인 보상도 약속했다.
이후로도 시간 날 때마다 불러 개인적인 관리를 이어 온 그였다.
이만하면 리더로서 기본적인 소양 정도는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
계승권 1위 왕자임에도 일개 용병에 이만큼 신경 쓰는 것을 본다면 말이다.
물론 그가 처한 사정만 놓고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나, 이 당연한 것조차 못하는 머저리가 존재했다.
슈라우드 왕궁에 서식하는 계승권 1위의 머저리.
그와 비교할 때 이 정도면 나름 합격점을 줄 만한 것이다.
“어쨌든 오늘 이렇게 쉬고 있는 그대를 부른 것은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야.”
“……?”
“그대도 알다시피 지난 보름 동안 잠잠하지 않았나? 볼티너 쪽이 쥐 죽은 듯 조용했으니까.”
내 본격적인 활약이 펼쳐졌던 일주일.
이 일주일이 지난 뒤로 나는 활약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나갈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있었으며, 이 기간이 벌써 보름째였다.
볼티너 왕자 군이 쥐 죽은 듯 잠잠했다.
그들은 공성을 벌이지도, 그렇다고 병력을 물리지도 않았다.
그저 현재 진영을 유지한 채 시간만 끌고 있을 뿐이었다.
공성 측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전투 또한 애매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볼티너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는 돼. 공성이 어려운 상황이라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병력을 물리는 결정이 쉽지도 않을 테니까. 이번만큼은 중립 포지션의 귀족들도 내 편에 가담할 가능성이 크니 말이야.”
최근 테네시아 정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간 중립을 취해 오던 귀족들의 흔들림이 감지되고 있었다.
크레이그 왕자에게 우호적인 쪽으로의 흔들림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볼티너 왕자에 대한 의혹에 있었다.
볼티너 왕자 세력 내에는 분명 소드마스터를 처리할 능력이 부재했다.
그런데 해냈다.
단번에 안드리 카운테스 후작과 카운테스 기사단을 날려 버린 것이다.
테네시아 왕국의 여타 소드마스터들이 개입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분명한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러한 합리적 의심이 귀족들을 흔드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고 할 수 있지. 여기서 한 번만 제대로 볼티너를 패퇴시킨다면, 그때는 귀족들도 확실히 우리 편에 서 줄 테니까.”
내전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자칫 나라 전체를 들어먹는 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번 한 번이 중요했다.
한 번만 더 볼티너 군에 타격을 입힌다면 저들도 결국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을 터.
하면 그때는 눈치만 보던 귀족들도 움직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다시 한번 볼티너 왕자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이번에는 우리가 공세를 취할 작정이야. 지난 보름 동안 준비도 마쳤고, 그간의 흐름으로 병력의 사기도 충분해. 남은 것은 라트 그대의 수락뿐이지. 혹시 야전 상황에서도 지금까지와 같은 역할을 맡아 줄 수 있겠나?”
“…….”
“물론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성벽이라는 장애물이 없으니 적들은 그대를 더 노골적으로 노릴 테지. 하지만 이 역공의 성패는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그대의 활약에 달려 있어.”
많이 따라잡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열세인 크레이그 왕자 군이었다.
특히 기사 전력이 그랬다.
여전히 10명 넘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추정됐다.
일반 병력 차이야 치솟아 오른 사기로 어떻게 극복한다 해도 기사는 그렇지 못했다.
승리를 위해서는 농성 때와 같은 나의 게릴라가 필수적이었다.
“대신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테네시아 왕국 1왕자의 이름을 걸고 최대한 맞춰 주겠다. 혹시 우리 테네시아의 귀족 작위와 영지는 어떤가? 나는 그대와의 인연을 이번 전쟁으로 한정 짓고 싶지 않거든. 이건 내 진심이야.”
동시에 영구 영입까지 시도하는 크레이그 왕자였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주인 없는 용병 실력자.
충분히 탐낼 만한 인재인 것이다.
“왕자님, 혼자 대화하고 싶습니다.”
“음? 아, 나와 독대하고 싶다는 뜻인가?”
끄덕.
“특별한 이유가 있나?”
“몰래 말할 것 있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단, 그 전에 크레이그 왕자가 알아 둬야만 할 사항이 있었다.
또, 중대하게 결정을 내려야 할 사항 역시도.
하여 그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안 됩니다, 왕자님. 독대는 곤란합니다.”
“괜찮아, 나라트. 라트라면 믿을 만하다.”
“아무리 그가 공적을 많이 세웠다 해도 과거를 알 수 없는 용병입니다. 물론 저도 용병 라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괜찮다니까. 애초에 날 해할 작정이었다면, 이런 공을 세울 이유조차 없었어. 라트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어차피 난 지금쯤 볼티너 손에 명을 달리한 상태였을 테니까. 또, 라트의 단검이면 얼마든지 암살 시도도 가능했을 테고. 안 그래?”
“그렇긴 해도…….”
“자, 그러니까 다들 잠시 밖으로 나가 있어. 라트가 맘 편히 털어놓을 수 있도록. 나라트, 너도. 어서.”
그렇게 밑의 사람들이 쫓겨나듯 밖으로 나갔다.
이제 집무실 안에는 나와 크레이그 왕자, 단 둘뿐이었다.
그래서였다.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제가 지금부터 왕자님께 드릴 요구는 평범하지 않을 겁니다.”
“라트, 그대……?”
그간 짧은 단어 위주로 어색하게 구사해 오던 언어.
우선 이것부터 곧장 제국어로 바꾸었다.
“눈앞의 물리적인 것이 아니니까요. 어쩌면 왕자님께 훨씬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동맹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둔 국가 간 동맹.”
“국가 간 동맹? 그것도 제국을 적으로 두는?”
“그렇습니다. 아, 그 전에 제 소개부터 정식으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용병 라트는 제 정체를 숨기고자 만든 가상의 인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정체.
적어도 크레이그 왕자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라트라는 가명을 쓸 이유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바의 달성을 위해서는 이쯤에서 진짜 정체를 밝혀야 했으니까.
사락.
해서 가면의 줄을 풀었다.
가면이 가리고 있던 얼굴의 나머지 반쪽마저 완전히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 진짜 정체에 대해.
“저는 슈라우드 왕국 그리핀 군단의 군단장, 라이오넬 라인하트입니다.”
“……!!!”
* * *
크레이그가 성벽 위에서 보기에 전황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좋았다.
계획한 대로 착착 흘러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기 면에서 우월한 아군의 일점 돌파가 적의 중앙을 제대로 허물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볼티너 군의 진영을 완벽하게 둘로 갈라 버릴 터였다.
물론 이런 흐름이 사기만으로 가능할 리 만무했다.
그러기에는 기본적인 병력의 양에서부터 크레이그 군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요소가 따로 존재했다.
나아가 그 요소는 지금도 전장 한복판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 가는 중이었다.
카운테스 성의 새로운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반가면 용병 라트.
하지만 진짜 정체는 슈라우드 왕국을 넘어 대륙 차원의 떠오르는 신성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라는 강력한 존재가 전장을 휘젓고 있는 덕분이었다.
이에 크레이그는 잠시 사흘 전의 독대를 회상했다.
“아이단 황제의 수작이라…….”
“말씀드렸다시피 슈라우드와 바이젠 왕국 사이의 이베리아 대회전, 그리고 얼마 전 마이바크 왕국과 니바스 3황자 실종이라는 전례가 있으니까요. 안타깝지만 이번 안드리 카운테스 후작 각하의 전사 역시 황제가 품은 야욕의 연장 선상일 것이 분명합니다.”
“앞선 두 가지를 전부 라이오넬 그대가 꺾어 놓았고 말이지?”
“잠시 멈춰 둔 것일 뿐, 완전히 꺾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황제의 야욕에 대항할 힘이 필요한 것이지요. 마이바크 왕국의 왕세자께서는 이미 저희와 한배를 타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바는 왕자님께서도 이 연합에 동참해 주시는 겁니다. 어차피 내전에 제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쯤은 짐작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안드리 카운테스 후작의 죽음에 제국이 개입되어 있으리라는 추정.
이는 확률이 90% 이상 보장되는 추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타국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제국을 제외한 그 어느 곳도 이처럼 깔끔한 처리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제국이라는 점이 걸리는군. 제국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일뿐더러, 이 과정에서 귀족들의 중론을 모으는 것도 문제야. 완벽한 물증이 없는 이상 다들 중압감에 짓눌려 꼼짝도 하지 않으려 들 것이 분명해.”
“물론 당장 가시적인 무언가를 도모하지는 않을 겁니다. 대신 이번 기회를 통해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물증을 모아 볼 생각입니다. 제국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겸해서 말이지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인가?”
“일단 이번 전투에서 그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볼티너 왕자가 병력을 물리지 않고 버티는 것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짧은 회상을 마쳐 갈 때쯤이었다.
때마침 전장에 어떤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왕자님, 용병 라트가 웬 검사 하나에게 발이 묶인 듯합니다.”
라이오넬로부터 도출된 변화였다.
지금껏 원거리에서 단검을 투척하며 볼티너 측 기사들을 척살 및 견제해 온 그였다.
볼티너 측은 이런 라이오넬을 따라잡지 못해 속절없이 당해 왔고 말이다.
한데, 지금은 그랬던 라이오넬의 전략이 사실상 파훼된 상태였다.
함께 지켜보던 참모의 말마따나 갑자기 튀어나온 웬 검사 하나 때문이었다.
이 검사가 라이오넬의 움직임을 비슷한 속도로 따라잡아 버렸다.
즉, 줄곧 라이오넬이 유지해 오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군의 돌격 자체에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퇴각을 준비함이…….”
“아니, 기다린다. 라트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하지만 라트의 속도를 따라잡은 것을 보면 저 검사, 심상치가 않습니다. 오래 묶여 있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되면 적 기사단의 수적 우위를 극복할 방법이…….”
“괜찮으니 기다린다.”
그러나 다른 이도 아니고 라이오넬이었다.
화염의 소드마스터 크루젠 벤투스조차 경연에서 공개적으로 찍어 누른 바로 그 대륙의 신성 말이다.
걱정할 필요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단초가 제 발로 튀어나와 준 셈이니까.”
더구나 이는 라이오넬이 예고한 단초의 출현이기도 했다.
걱정은커녕 적극적으로 반겨야 할 상황인 것이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지금은 괜한 데 심력 낭비할 필요 없다. 라트를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