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장: 대전회의
니바스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제 막 시야가 회복된 찰나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 회복된 시야로 처음 눈에 담게 된 것이 그 여자였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어??’
한데,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눈을 한번 비볐다.
그러고 다시 보니 더 확실해졌다.
확실히 이상했다.
“여, 여자 아니었어? 내 눈이 잘못됐나? 분명 여자였는데……?”
모습을 드러낸 자가 남자였던 것이다.
비록 외모가 제법 곱상하고 피부 또한 시체처럼 창백한 것은 같다지만, 이자는 분명 남자였다.
아무리 니바스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지만, 성별 구분마저 못 할 만큼은 아니었다.
“네가 뵌 분은 뱀파이어 퀸 카밀라 님이시다.”
“그럼 당신은……?”
“나는 뱀파이어 테페슈. 그분의 심복이다. 그리고 귀찮게 됐지만, 카밀라 님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너를 관리할 예정이기도 하다.”
“나를 관리해? 하면 앞으로 내가 머물 곳이 여기란 말인가? 지금 이 휑한 곳?”
지금 니바스가 정신을 차린 이곳.
웬 방 안이기는 한데, 너무 휑했다.
뭐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방금까지 니바스가 누워 있던 침상 하나가 다였다.
그리고 휑한 것 이전에 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니, 그보다…… 여기, 으으, 여기 너무 추운데?”
테페슈라는 놈을 눈에 담기 직전 느꼈던 몸의 시림.
이 시림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단순한 느낌을 넘어 정말로 뼛골까지 시렸다.
시리다 못해 아예 온몸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 어디지? 어디, 으으으, 어딘데 이렇게 추운 거야?”
“극지대. 너희 인간들은 북방 극지대라 부르는 곳이다.”
“뭐……? 뭐라고???”
“북방 극지대라고 했다.”
순간 니바스는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의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북방 극지대라니, 이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다고! 이건 약속이 틀리잖아!! 으으, 북방 극지대라니? 이런 미친, 크으으, 곳에서 나더러 어떻게 지내라는 거야??”
“미쳐? 이 정도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이군.”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니바스의 사정일 뿐이었다.
테페슈라는 놈은 불만 따위 눈곱만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듣는 척이라고 해 주기는커녕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와락.
“헛!!”
파앗.
갑자기 니바스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자리를 박찼다.
니바스를 끌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덕분에 니바스는 직면할 수 있었다.
그가 처한 진정한 현실을.
휘이잉~ 샤악~ 샤아악~!
딱딱딱딱.
베일 듯한 칼바람과 살을 에는 추위였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니바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정말 죽겠구나 싶은 것들이기도 했다.
니바스는 저도 모르게 딱딱거리며 부딪치는 이빨 소리와 함께 이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는 중이었다.
“……!!!”
어디 그뿐인가?
곳곳에 거대한 몬스터들까지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밀라, 테페슈 같이 피처럼 새빨간 눈을 지닌, 아주아주 광폭해 보이는 괴물들이 말이다.
이건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 환경과 정반대의 개념만을 모아 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이, 이, 거, 건, 야, 약소, 기…….”
“약속? 내가 카밀라 님께 받은 명령은 네가 죽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떠한 지침도 받지 못했다. 당연히 약속 같은 것도 들은 바 없지.”
“마, 말도 아, 아, 안…….”
“얼른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난 내가 관리하는 것들이 퍼질러져 있는 꼴은 절대 두고 보지 않으니.”
니바스 앞에 훤하게 펼쳐졌다.
언제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것 없는 그런 끔찍한 고생길이.
* * *
“레나 쪽이 아주 시끌벅적하다지?”
슈라우드의 1왕자 크리스토퍼.
그가 자신의 심복인 클리앙 나로움에게 물었다.
입가에 한껏 미소를 그린 채로.
“예, 왕자님. 세력 내부적으로 혼란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점점 더 커지는 중이고 말이지요.”
“그래야지. 2왕자라는 세력의 주요 깃발 중 하나가 꺾이게 생겼는데, 당연히 그래야 하고말고. 심지어 외부 견제도 아니고 남매가 저들끼리 싸워서 그런 거라면 더더욱.”
얼마 전부터 슈라우드 정계가 시끄러워졌다.
레나와 2왕자 드로튼의 문제 때문이었다.
둘도 없던 이들의 관계가 극도로 소원해졌다.
문지방 닳도록 레나를 찾아가던 드로튼이 갑자기 발걸음을 뚝 끊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루머가 정계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퍼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소상하게.
이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크리스토퍼와 클리앙 사이에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 것으로 보여?”
“왕녀님이 이대로 수수방관하기만 한다면 여태껏 모은 세력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갈 겁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레나는 그간 북부의 라인하트 영지, 남부의 이베리아 영지를 중심으로 주변 귀족들을 규합해 왔다.
동부와 서부 구도에서 소외된 기타 세력들에게 자신을 어필해 온 것이다.
한데, 지금 이대로라면 어렵사리 끌어모은 이들이 죄다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흥, 떨거지들은 아무리 끌어모아 봤자 결국 떨거지에 불과한 것이지. 레나 그것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저가 뭐라도 된다는 듯 날뛴 것이고 말이야.”
빈약한 연결고리의 한계였다.
레나의 세력을 묶는 끈은 기본적으로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동부나 서부처럼 이 끈이 영지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사태가 지금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세력 자체의 와해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고 말이다.
“물론 그간 왕녀님의 행보상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내서라도 흔들리는 세력을 붙잡아 두겠지요.”
그렇다 해도 코어가 단단한 레나였다.
따라서 현 사태가 진짜 붕괴로까지 번질 확률은 매우 낮았다.
또, 크리스토퍼의 폄하와 달리 그간 레나가 보인 수완은 가짜가 아니었다.
이대로 손 놓고 가만히 앉았을 리 만무했다.
“대신, 당분간 확장은 어려울 게 분명합니다.”
“남부의 올란도 카디프 백작?”
“예, 그뿐만 아니라 중부의 그레이 레안드로 백작도 있습니다. 잃을 것 많은 백작들이 내부적으로 불안한 세력과 함께하려 할 리 없지요. 자연스레 왕녀님은 지금까지 그래 오셨던 것처럼 중앙 정계에서 외톨이로 지내게 되실 겁니다.”
단, 세력 확장과 중앙 정치 차원에서의 타격은 막지 못할 터였다.
그간 레나는 중앙 정계에서 홀로 고군분투해 왔다.
세력 내에 대전회의 참석 자격을 지닌 이가 레나 말고 없었기 때문이다.
대전회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이 필요했다.
백작 이상 작위 보유자이거나 장관급 관직을 역임 중이어야 했다.
혹은 국왕을 비롯한 대신들에게 참여를 허락받은 이여야 했다.
하나, 레나의 세력은 여태까지 작위가 죄다 자작 이하뿐이었다.
하급 귀족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온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그간 레나가 중앙 정계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1왕자 대 3왕자 구도를 교묘하게 이용해 온 덕분이었다.
즉, 세력이 아닌 오로지 레나 개인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게 홀로 몇 년간 고군분투해 왔고, 드디어 고생의 값진 결실을 보려던 참이었다.
30년간 이어져 온 이베리아 전쟁으로 인해 대귀족이 부재한 남부였다.
그런 남부의 유력 귀족 중 하나인 올란도 카디프 백작이 드디어 레나의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올란도 카디프가 넘어온다면 사실상 남부를 석권하는 셈이었다.
남은 귀족들이야 대세에 따라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테니 말이다.
맺히려던 결실은 비단 남부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중부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그레이 레안드로 백작이 그 증거였다.
그를 시작으로 중부에서의 본격적인 영향력 확대도 가능했을 터였다.
이번 문제로 심각하게 흔들리지만 않았다면 그리되고도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레나가 다시 드로튼과 손잡을 가능성은?”
“지금까지 왕녀님의 침묵도 그렇고, 제가 2왕자님과 다시 대화해 본 내용도 그렇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왕녀님은 진심으로 왕좌를 노리고 계신 것 같더군요.”
“허, 기껏해야 왕녀 따위가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이거야 원,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이제 와 설령 다시 잡는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습니다. 이미 왕녀님의 진심을 모두가 알아 버린 상황이니 말입니다.”
클리앙의 작품이었다.
그는 레나와 2왕자의 소문을 퍼뜨리며 그 안에 레나의 진심도 섞어 넣었다.
이로 인해 모두가 레나의 야심을 접하게 된 상황이었다.
“왕녀님의 헛된 꿈이 알려진 이상, 2왕자와의 연계는 더 이상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겁니다. 유력 귀족들이 언제 또 깨질지 모르는 세력의 손을 잡을 리 만무하지요.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아, 클리앙. 이번이 기회야. 제 주제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는 계집의 콧대를 제대로 짓뭉개 줄 기회. 그러니까 실수 없이 확실하게 깔아뭉개자고.”
* * *
대전회의가 시작되기 30분 전이었다.
레나는 궁에서 어떤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차라리 완전한 중립 노선을 취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카디프 백작은 제가 1왕자와 3왕자 사이에서 제대로 킹메이커 노릇을 했으면 한다는 건가요?”
남부의 유력 귀족인 올란도 카디프 백작이었다.
그가 찾아와 레나를 설득 중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면 세력 규모는 조금 줄어들지언정 지금의 혼란은 수습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간 레나는 다소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일단 중립 노선이기는 중립 노선이었다.
1왕자와 3왕자 사이에서 교묘하게 이득을 취해 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또 진정한 중립 노선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2왕자 드로튼을 내세우며 계승 경쟁을 펼쳐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중립 노선보다는 제3 세력의 길을 걷는다고 봐야 했다.
올란도는 지금 이 노선을 완전히 중립 쪽으로 확정 짓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렇네요. 그럴 거였다면 처음부터 편하게 그쪽 길을 걸어왔을 테니까요.”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제안이기는 했다.
드로튼과의 관계가 틀어진 상태에서는 어찌 보면 유일한 대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단,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식선에서였다.
그 상식이 레나의 마음에는 전혀 들지 않았고 말이다.
“혹시 제가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럴 리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정말 혹시나 해서…….”
“어떤 질문일지 대충 예상은 되네요. 뭐, 상관없답니다.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얼마든지 하셔도 좋아요.”
“예상되신다고 하니……,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 것입니까? 최근 정계에 떠돌고 있는 왕녀님의 진심에 관한 그 소문 말입니다.”
“제가 직접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괜한 헛소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소문이 워낙 흉흉하니…….”
“왜 헛소문이라고만 생각하시나요?”
“예??”
“왜 헛소문이라고만 생각하시느냐고요. 그게 정말 괜한 헛소문에 불과했다면, 제가 여태껏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었을까요?”
“왕녀님, 설마……?”
“지금 백작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맞답니다. 헛소문이 아니에요. 전 진심으로 슈라우드의 국왕 자리를 노리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깨 버렸다.
상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깨뜨려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왕녀님.”
물론 상식의 붕괴에 따른 반발은 상당했다.
“제가 지금 이 순간 왕녀님을 찾아온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안답니다. 마지막 시도 혹은 최후통첩 같은 것으로 보면 되겠지요.”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이리 잘 알고 계시는 분께서 그 후폭풍은 어찌 감당하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30분 후 펼쳐질 대전회의.
오늘 회의의 주요 안건 또한 이 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이 사태 수습의 마지막 기회였다.
여기서도 수습이 안 된다면 그 후폭풍은 감당 불가한 수준이 될 터였다.
“당장만 해도 보십시오. 중부의 그레이 레안드로 백작은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지 않습니까?”
“소문이 돌자마자 가장 먼저 발을 뺐으니까요.”
“저라고 해서 다를 것 같으십니까? 그나마 저는 남부 출신이기에, 아직은 왕녀님께서 남부의 이익을 대표해 주실 수 있다고 여기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겁니다. 한데, 자꾸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저도 더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막무가내요? 제가 왕이 되고자 하는 게 정말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이라 여기시나요?”
“그럼 아니란 말씀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여긴답니다. 충분히 계승권자로서의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지요. 오히려 자신감도 넘치는걸요? 저는 제가 1왕자나 3왕자를 얼마든지 제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허……, 왕녀님 정말…….”
기가 찬다는 반응을 대놓고 드러내는 올란도였다.
레나는 그런 올란도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주었고 말이다.
이로 인해 방 안에는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제가 더는 드릴 말씀이 없을 듯하군요. 또, 앞으로 이렇게 독대 드릴 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란도가 먼저 이 침묵을 깼다.
그러고는 결별 통보를 전해 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방을 나서려는 차디찬 걸음과 함께.
“카디프 백작.”
그렇게 금세 문까지 도달한 올란도였다.
그런 그를 레나가 잠시 붙들었다.
마지막 한마디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제 궁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답니다. 또, 방문하는 이의 과거를 따지지도 않을 것이고요.”
“……??”
“괜한 쑥스러움에 망설이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제 손을 다시 잡아야겠다 싶은 순간이 온다면 말이지요.”
여전히 입가에 걸어 둔 미소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