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장: 이정표
달칵.
“진정하시죠, 황자님. 애타게 찾으시는 밖의 누구 들어왔으니까.”
“스트라우스 백작!!”
그래플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 또한 얼굴을 가린 상태에서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3황자 니바스가 곧바로 그래플을 알아보았다.
알아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의심까지 보내왔다.
“서, 설마? 설마 마이바크 왕국이 나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껏 구해 드리러 온 사람한테 그러면 괜히 꽁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물론 오해였다.
우리는 오히려 니바스를 구하러 온 쪽이었으니까.
“……지금 상황이 이런데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지금 상황이 어떻단 말입니까? 제 눈에는 아무래도 제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황자님을 구해 드린 상황으로 보이는데.”
그래플이 눈빛으로 암살자를 가리켰다.
그는 현재 침대 옆 바닥에 납작 짓눌린 채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태였다.
원인은 당연히 내 중력이었다.
밖에서 인력으로 놈을 멈춰 세운 뒤 중력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비단 지금만이 아니었다.
그간 니바스의 체내에 쌓여 가던 독도 처리해 주었다.
카밀라의 피를 극소량 투입하여 들어오는 독소를 전부 잡아먹어 버린 것이다.
니바스가 여태껏 팔팔하게 숨을 쉬는 것은 전부 우리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 보자…….”
뒤적뒤적.
눈빛으로 가리키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래플은 직접 암살자에게 다가가 그의 품을 뒤적였다.
“여기 있네.”
그러더니 이내 암살자의 품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한 장의 인피면구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암살자의 얼굴에 씌웠다.
“아아…….”
이에 니바스가 탄식을 터뜨렸다.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암살자의 얼굴이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제이든 스미스 남작.”
암살자의 정체는 제이든 스미스였다.
정확히는 그간 제이든 스미스의 행세를 해 온 누군가라고 해야겠지만.
그리고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상 한 가지뿐이었다.
“황자님을 노린 흉수가 누군지는 굳이 더 알아볼 필요도 없겠군요.”
마이바크행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바로 제이든 스미스로 분한 이 암살자였다.
애초에 니바스의 썬더 그라운드 관광에는 황제의 목적이 짙게 배어 있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암살 시도가 누구의 수작인지 역시 너무 뻔했다.
“아, 아냐. 이건 나와 형님 폐하를 이간질하려고 너희가 꾸민 계략일 수도…….”
“꿈 깨시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이득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이미 손발 다 잘린 황자님을 황제와 이간질한다고 해서 제국이 눈 하나 깜짝이나 하겠습니까?”
애써 현실을 부정해 보려 하는 니바스였으나, 소용없었다.
상식적으로 이런 짓을 벌임으로써 마이바크 왕국이 득 볼 것은 전무했다.
되려 제국에게 미운털이나 박히는 꼴이었다.
“…….”
반면, 제국과 황제는 아니었다.
대충 떠올려 봐도 이 수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막대했다.
바보가 아니고야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도 끝까지 부정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특별히 뭘 하시라는 게 아닙니다. 제발 아무런 문제 없이 제국에 복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터럭만큼의 상처 하나 없이 완벽히 무탈한 상태로. 제가 황자님께 바라는 건 딱 그거 하나입니다.”
이것이 마이바크 왕국의 입장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니바스를 무사 귀환시켜야 했다.
니바스가 마이바크 왕국 국경 내에서 다친다거나 잠적한다거나 하는 불상사만큼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그래야 제국에게 그 어떤 꼬투리도 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죽고 싶어 환장한 놈도 아니고, 나더러 죽을 걸 빤히 알면서 이렇게 제국으로 복귀하라고?”
단, 이는 현실을 직시한 니바스에게는 미친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 그를 살려 둘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 아무 대책도 없이 제국으로 가라?
그냥 죽으러 가라는 얘기였다.
“그럼, 다른 방법 있습니까? 여기서 잠적하는 꼴을 우리 왕국이 두고 볼 리도 없지만, 또 한다고 해서 제대로 살아갈 수나 있겠습니까? 제국의 추적 같은 거 다 차치하더라도, 평생 황족으로만 살아온 황자님이, 아무런 기반도 없이?”
“그,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더러 사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라는 건 너무…….”
그렇다고 니바스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그였다.
여기서 그가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래플과 마이바크 왕국의 자비뿐.
그래플의 한마디에 바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흐음.”
“부탁하오, 백작. 나 좀 살려 주시오. 살려만 준다면 내가 백작과 마이바크 왕국이 시키는 건 뭐든 다 하겠소. 정말이오. 정말 뭐든 다 할 테니, 제국으로 돌려보내지만 말아 주시오. 제발.”
단순히 꼬리를 내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살랑살랑 흔들어도 모자란 입장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흔들기 시작한 니바스였다.
“흠…….”
이에 그래플은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를 내비쳤다.
연신 턱을 쓰다듬으며 한 번씩 인상도 찌푸리는 그였다.
그러자 니바스는 점점 더 비굴해져만 갔고 말이다.
그렇게 대략 1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좋습니다. 살려 드리지요.”
닫혀 있던 그래플의 입이 열렸다.
니바스가 원하는 방향의 답변과 함께.
“대신 일단 제국으로 돌아가십시오.”
단, 정반대로 니바스가 기겁할 수밖에 없는 방안도 같이.
* * *
“라이오넬 경은 요즘 어떻게 지낸다던 가요? 무슨 은퇴라도 한 사람처럼 이렇다 할 소식이 없던데.”
“열심히 수련 중이라 그래. 황제 즉위식 경연에서 얻은 게 있는 모양이더라고.”
2왕자 드로튼이 레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담소를 나누며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현재는 대화 주제로 라이오넬의 근황이 오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한 번씩 왕궁에 와서 얼굴도 좀 비춰 주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러다 얼굴 다 까먹을 지경인데.”
“얼마 전에 왔었어. 라이 경 입장이 입장인지라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갔을 뿐이야.”
“그러니까요. 기껏 와 놓고 저한테는 인사도 없이 그냥 갔다니, 조금 섭섭할 뻔했지 뭡니까?”
“…….”
한데, 말에 뼈가 실려 있었다.
비단 라이오넬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앞서 드로튼이 물어 온 이런저런 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베리아 영지, 그리핀 군단, 라인하트 영지, 사네와 마검학연 출신 하급 관리들에 대해서까지 전부 물어 왔으며, 여기에도 하나같이 뼈가 실려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로튼?”
“꼭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궁금해서요. 제가 우리 세력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게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뭐, 자꾸만 이상한 헛소리들이 들려오기도 하고.”
레나는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그랬으며, 왜 그랬는지까지도.
클리앙 나로움의 행적을 이미 보고 받은 상태였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랬구나.”
그러나 레나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수작을 부렸는지는 이 시점에 중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드로튼 본인이 이미 수작에 흔들린 뒤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게 실제로 따져 보니까 어느 정도 헛소리를 늘어놓을 만하더군요. 지금도 봐요. 저는 우리 세력의 근황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부 누님을 통해 전해 듣는 것뿐이지.”
굳이 클리앙의 이간질이 아니었다 해도 언젠가 불거질 문제이기는 했다.
그만큼 레나의 세력은 급성장을 거듭했다.
이제는 좋든 싫든 그 노선을 분명히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저야 알죠, 그것들이 전부 오해라는 걸. 누님과 제 사이가 그런 자잘한 부분 때문에 흔들릴 리도 없고.”
레나와 드로튼의 관계는 정말 각별했다.
비단 친혈육이고 평소 사이좋은 남매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강력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덕분이었다.
그간 레나는 드로튼을 암묵적인 세력의 깃발로 사용해 왔다.
공식 계승 서열 2위라는 카드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것이다.
드로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레나를 1왕자나 3왕자의 외가처럼 활용했다.
레나를 배경 삼아 나름의 정치적 활동을 펼쳐 온 그였다.
“그런데 누님도 아시다시피 입방정 떨기 좋아하는 귀족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자꾸만 쓸데없는 억측을 늘어놓는단 말이죠.”
“억측을 늘어놓는다라…….”
“그래서 말인데요, 누님, 이제 귀족들의 오해를 확실히 풀어 줘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유력한 계승권자 중 하나로 인식됐으니만큼, 우리 세력에게도 명확한 이정표를 세워 줘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상황에 둘 사이가 틀어진다면?
일단 드로튼은 끝이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애초에 레나의 후광으로 계승권자 대우를 받는 그였으니까.
대신 레나 또한 적잖은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여자라는 한계를 보완해 주던 한 축이 바로 드로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마음을 굳히지 못한 귀족들이 발을 빼려 들 터.
성장세가 꺾이는 것은 물론이요, 모아 둔 세력이 흔들릴 가능성도 다분했다.
“또, 누님도 그간 여자 몸으로 혼자 살얼음판 같은 정계를 헤쳐 나가기 힘들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제 그 짐을 동생인 제게 좀 나눠 주세요. 라이오넬 경도 언제 정계 진출이 가능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동생인 제게 기대시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레나도 함부로 드로튼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일종의 족쇄라고도 볼 수 있었다.
또, 드로튼이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 만무했다.
그러니 이렇듯 자신 있게 요구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오넬 경도 남자예요. 세상 어떤 남자라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만 하면 당연히 지치는 법입니다. 가끔은 이베리아 영지로 가서 라이오넬 경과 데이트도 좀 즐기고 하세요. 여긴 제게 맡겨 두시고요. 그래야 라이오넬 경도 흔들리지 않…….”
“미안해, 로튼.”
“……예?”
“정말로 미안해.”
족쇄는 분명 족쇄였다.
하지만 레나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족쇄 아닌 것이 있기나 했던가?
지금껏 그녀의 걸음걸음마다 강력한 족쇄들이 발목을 잡아채 왔다.
그리고 레나는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극복해 왔다.
이번 족쇄도 마찬가지.
대차게 풀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누님? 미안하다니?”
“너는 내 하나밖에 없는, 그리고 둘도 없이 소중한 친동생인데……. 그런 동생의 소망을 꺾어야만 하는 이 상황이 누나로서 진심으로 안타깝고, 또 정말로 미안해.”
“누님, 대체…….”
물론, 이번 족쇄는 지금까지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훨씬 무겁고 강력했으며, 후폭풍 또한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친동생의 꿈을 철저히 짓밟는 일이었으니까.
동시에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정면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사실 라이 경과의 혼인 의사를 밝혔던 그 순간부터 내 의지는 이미 확고했어. 로튼, 나…….”
“누님!!!”
그러나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역경이고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그녀의 꿈, 그녀의 목표를 달성코자 한다면 말이다.
“나, 왕이 될 거야.”
그렇기에 대충 얼버무리거나 핑계 대지 않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녀의 확고한 의지이자, 앞으로 그녀의 세력이 따르게 될 확실한 이정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