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장: 썬더 그라운드
“그렇게 바람의 정령 샤테이어가 현현했습니다. 그리고 분지에 불던 칼바람이 산들바람으로 바뀌더군요.”
카를로스에게서 빼앗은 바람의 정령석을 아인한드라가 섭취했다.
그리하여 이름을 지닌 바람의 정령 샤테이어를 소환했다.
그렇게 현현한 샤테이어의 권능은 굉장했다.
북방 극지대의 칼바람마저 잠재워 버렸다.
물론 좁은 분지에 한정된 효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대의 자연에 간섭하는 일이었다.
굉장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 것이다.
이제는 솔직히 나도 아인한드라와 승부를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덕분에 분지 내에서는 좀 살 만해졌습니다. 이제 겨울바람 일족도 그곳에 안정적으로 정착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국에서 소식 듣고 많이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에요. 그리고 앙기리스 왕국과 자카럼 상단 쪽도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요구에 그대로 따르는 모양새에요. 팔려 간 엘프들을 데려오느라 돈을 물 쓰듯 쓰고 있다네요.”
나는 그렇게 북방 극지대에서의 일을 마치고 왕국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잠시 왕궁에 들렀다.
레나에게 그간의 일을 상세하게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정계 진출을 금지당했다 해도, 짧은 방문 정도는 딱히 문제 될 것 없었다.
하여 오랜만에 방문한 1왕녀 궁에서 레나, 그리고 유모 줄리아까지 함께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보다 이번에 새로 얻은 뱀파이어 수하가 카밀라라고 했나요?”
“예, 왕녀님. 그렇지 않아도 왕녀님께 소개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제가 부르면 제 등 뒤에 갑자기 나타날 테니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카밀라.”
스으으.
내 부름에 카밀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북방 극지대에서 그녀만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내 어둠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라면 본질적인 부패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덕분이었다.
“인사드려, 카밀라. 내 주군이신 비아트릭스 셀레스티나 슈라우드 제1 왕녀님이시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녀님. 카밀라라고 합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한데, 카밀라의 첫인사에 대한 레나의 반응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어쩐지 다소 떨떠름해 보이는 반응이랄까?
“그…… 리고 이분은 왕녀님의 유모이신 줄리아 르완님.”
“처음 뵙겠습니다. 카밀라라고 합니다.”
끄덕.
“…….”
줄리아의 반응은 한층 더했다.
가벼운 목례로만 인사를 받은 채 카밀라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는 줄리아였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지니는 의미는 명확했다.
떨떠름함을 넘어선 불편함, 그리고 짙어져 가는 불만이었다.
잠시 후.
“라이 경.”
줄리아의 시선이 카밀라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대신 그대로 나를 향했다.
“예, 유모님.”
“그러니까 이 카밀라라는 여성이 백작님께서 거두신 새로운 수하라는 건가요? 앞으로 하루 종일 붙어 다닐 최측근 수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저렇게 피부는 투명하리만치 하얗고, 이목구비는 자기주장이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면서, 몸매까지 시원시원한 저런 여성과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예정이라는 거로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이 경께서?”
“그렇기는 한데…….”
더불어 이 시선에는 또 다른 의미까지 부가돼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질책이었다.
“라이 경,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라이 경은 우리 왕녀님께 아주 대놓고, 공개적으로, 빼도 박도 못 하게 고백하셨다는 사실을.”
“당연히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런가요? 그런데 짧은 소견 탓일까요? 제 눈에는 아무래도 잊으신 것으로 비친답니다. 저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을 하루 종일 옆에 붙여두신다고 하니 말이지요.”
“오해십니다. 카밀라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예요. 유모님께서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어떤 의미의 질책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나, 이는 명백한 오해였다.
카밀라는 그냥 뱀파이어일 뿐이었다.
더구나 근원이 내 어둠이기까지 했다.
차라리 자식 같은 의미라면 모를까, 나에게 이성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는 극도로 요원한 것이다.
“단순히 오해로 치부하기에는 ‘여성’인 뱀파이어인 것을요? 뱀파이어라고 해서 성별 구별이 안 되는 건 아니니까요.”
“…….”
“그런 면에서 왕녀님의 유모인 제 눈에 카밀라 양은 뱀파이어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보인답니다. 그것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여성’ 뱀파이어.”
소용없었다.
줄리아는 줄기차게 ‘여성’만을 강조할 뿐이었다.
이에 따라 시선에 담긴 질책의 의미 역시 점점 더 강해졌고 말이다.
“그만해, 줄리아. 라이가 곤란해하잖아.”
다행히 레나가 나서 주었다.
강해져 가는 추궁을 적절하게 끊어 준 것이다.
8년 전, 황도 아카데미로 가는 길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흐음, 어쩐지 제 눈에는 라이 경이 조금 더 곤란해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라이 경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 옆에서도 절대 잊지 않으시겠지요. 왕도에 왕녀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그만하면 됐어, 줄리아. 라이가 알아서 잘할 거야.”
“그렇겠지요? 라이 경께서 알아서 잘 처신하시겠지요? 똑똑한 분이시니까요. 또, 그런 만큼 잘 아시기도 할 테고요. 왕녀님 옆에서 왕녀님의 유모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본다는 사실 같은 것쯤은.”
“그럴 거야. 잘 알 거고, 잘할 거야. 믿어 줄리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이잖아.”
“…….”
착각이었다.
8년 전과 같지 않았다.
그때는 분명 적극적으로 줄리아를 만류하던 레나였다.
한데, 지금은 어째 느낌이 달랐다.
“다시 한번 반가워요, 카밀라.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럼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 봐도 좋아요.”
뭐라고 딱 집어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달랐다.
“……들어가, 카밀라.”
“예, 주인님.”
스으으.
내 명령에 따라 카밀라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레나의 궁 안에는 다시금 나와 레나, 줄리아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카밀라 등장 전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주인님?”
“흠흠…….”
줄리아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레나 또한 나서지 않았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의 먼 산을 응시할 뿐인 그녀였다.
이로 인해 어색한 침묵은 한층 더 길어지고 있었다.
줄리아가 보내오는 사납고 날카로운 눈초리와 함께.
똑똑똑.
그때였다.
식은땀 흐를 것만 같은 분위기를 깨뜨려 주는 변수가 등장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였다.
“왕녀님, 저 주시트입니다.”
“들어오세요.”
그렇게 허락을 받아 들어선 이의 이름은 주시트 첸코.
레나와 사네가 마검학연을 통해 수급한 젊은 인재였다.
두 사람의 지속적인 관심과 관리, 그리고 지도교수 브로든 프라우닉스의 지탱하에 마검학연은 인재의 산실로서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 음……. 제가 때를 잘못 맞춘 모양입니다. 조금 이따 다시 찾아올까요?”
인재는 인재였다.
눈치가 상당했다.
들어서자마자 방 안의 어색한 공기를 감지한 주시트였다.
이러니 졸업 직후부터 사네를 대신하여 레나를 직접 서포트하고 있는 것일 터.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무슨 일이죠?”
“왕녀님께서 예의주시하라고 당부하셨던 일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로만 제국 3황자가 마이바크 왕국으로 떠날 차비를 모두 마쳤고, 이틀 후 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들고 온 소식 또한 묵직했다.
당장 카밀라 건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그런 소식이었다.
향후 펼쳐질 대륙의 정세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레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이로써 나의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다.
마이바크 왕국.
제국에서 건네받은 두 번째 숙제를 해결하러 갈 차례였다.
* * *
“그대는 형님 폐하께 정확한 지침을 받았겠지, 스미스 남작?”
“예, 받았습니다.”
마이바크 왕국으로 향하는 마차 안.
로만 제국 3황자 프레드릭 대니얼 니바스 로만이 실무 책임자 제이든 스미스 남작에게 물었다.
이번 마이바크행에 대해 황제로부터 따로 지침을 받았느냐고.
“그럼 좀 알려 주게. 내가 썬더 그라운드에서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
언뜻 우스워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행렬은 니바스 3황자의 요청으로 꾸려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행렬의 목적이 니바스의 뜬금없는 썬더 그라운드 관광에 있는 것이다.
적어도 황제가 몇 달 전 즉위식에서 마이바크의 왕세자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그러했다.
한데, 일개 남작에게 지침 수령 여부를 묻는 것으로도 모자라, 받았으면 알려 달라고 부탁까지 건네는 니바스였다.
“전해 들으신 바가 어느 정도는 있지 않으십니까?”
“물론 있기야 있지. 썬더 그라운드에서 썬더 실크의 비밀을 파헤치라는 것과 뇌전의 정령석을 찾으라는 것.”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당연한 상황이었다.
개나 소나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렬의 진정한 주체와 목적 모두 대외적인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쯤은.
답은 너무나도 명료했다.
로만 제국의 현 황제 아이단.
그가 바라기에 꾸려진 행렬인 것이다.
“하지만 남작 그대도 알지 않나? 이것만으로는 너무 추상적이야. 그러니 내가 정확히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대가 좀 알려 주게.”
“흐음, 이거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에는 굉장히 민망한 내용입니다만…….”
“괜찮으니 말해 보게.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 아닌가?”
“정 그러시다면야. 아시다시피 복잡한 일들은 저를 비롯한 실무자들이 전부 도맡을 것입니다. 이때 황자님께서 해 주실 일은 간단합니다. 딱 하나뿐이지요.”
“어떤 일 말인가?”
“강짜를 부려 주시면 됩니다. 체면이고 뭐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주 제대로. 그렇게 해서 저와 실무진들이 썬더 그라운드에서 활동할 만한 시간과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강짜를 부려라.
한마디로 진상이 되라는 의미였다.
명색이 로만 제국의 3황자에게, 그것도 일개 남작 따위가.
“…….”
“아, 물론 제 뜻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폐하의 의중이시지요.”
아무리 황제의 뜻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기분 덜 상하게 돌려 말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다.
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제이든은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뱉어 냈다.
이는 대놓고 제국의 3황자를 무시하는 짓거리나 다름없었다.
“혹시 심기가 불편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당연한 걸 묻고 있었다.
불편한 수준을 넘어섰다.
눈앞의 남작이라는 놈을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10년 전까지의 니바스라면 이 심정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겼을 것이다.
“……아니네. 형님 폐하의 의중이 그러하시다면 기쁜 마음으로 따라야지. 전혀 불편하지 않아.”
그러나 지금의 니바스는 그럴 수 없었다.
다른 황자들과 달리 마지막까지 아이단과 후계 경쟁을 벌이던 니바스였다.
그리고 10년 전, 로만 제국의 후계 구도가 완전히 아이단으로 굳어진 그 순간, 니바스는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살고 싶다면 아이단의 발가락을 핥는 것은 물론이요 대소변이라도 받아야 했다.
또한,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니바스였다.
이번 일 역시 그런 삶의 연장 선상이었다.
니바스의 욕구와 관계없이 마이바크 왕국의 썬더 그라운드가 보고 싶어져야만 했다.
더불어 강짜를 부리고 진상이 되고 싶어져야만 했다.
그것이 황제 아이단이 바라는 바였으니까.
무엇보다 이번 일은 니바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반드시 성사시켜야만 했다.
아이단이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만 성사시키면 과거의 잘못을 모두 뉘우쳐 주겠다고.
그러므로 지금의 나바스에게 체면 따위는 하등 중요치 않았다.
감히 남작 따위의 황자에 대한 무례를 꾸짖는다?
그런 건 꿈조차 꾸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사실상 행렬의 책임자인 제이든에게 아양이라도 떨 작정이었다.
“그리고 걱정 말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충분한 기회를 만들어 줄 테니까. 강짜 수준이 아니라 진짜 미친놈이 되어서라도 말이야. 그러니 다른 걱정 말고 이번 일만 반드시 성사시켜 주게, 반드시!”
굳은 결심을 다지는 니바스였다.
어떻게 할지 벌써 시뮬레이션까지 돌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래서였다.
그렇게 본인의 다짐에 지나치게 집중하느라 니바스는 보지 못했다.
번뜩.
순간적으로 제이든 스미스의 동공을 스치고 지나간 한 줄기 혈광을.
미세하게 끌어 올려진 음산한 입꼬리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