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장: 강탈(2)
“아, 아아…….”
카를로스는 흘러나오는 탄식을 막을 수가 없었다.
현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펼쳐지고 있는 이 참담한 상황을.
카를로스 본인부터 그러했다.
그는 현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노스페라투 한 마리가 그를 바닥에 찍어 누르고 있었다.
완벽하게 구속당한 것이다.
그런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고개뿐.
하여 고개를 최대한 돌려 가며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참담한 상황에 대한 절망 어린 탄식을 뱉어 가면서 말이다.
그래도 카를로스는 나은 편이었다.
최소한 의식은 갖춘 상태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으니까.
그와 함께 이곳으로 온 자카럼 상단원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대다수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켁!!”
털썩.
그리고 지금 막 대다수는 전부가 됐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상단원이 절명한 것이다.
구슬픈 단말마의 비명만을 남긴 채.
“아아…….”
정말 탄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 불과 10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흘러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모든 것이 카를로스의 계획대로 흘러가며 아주 순조롭기만 했었다.
카를로스가 여유롭게 하이엘프의 관을 살펴보던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때부터였다.
관속 하이엘프의 눈썹이 꿈틀거리던 순간, 그러더니 이내 번쩍 뜨여진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하이엘프가 몸을 일으켰다.
하이엘프만이 아니었다.
34개의 관에 누워 있던 서른넷의 엘프들도 함께였다.
그들 모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대기 중이던 자카럼 상단원들을 향해서.
이 과정에서 카를로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이엘프가 번쩍하고 눈을 뜬 그 순간 이미 땅바닥에 처박힌 상태였으니까.
뜬금없이 불어온 강력한 바람에 단번에 제압당한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였다면 어찌저찌 해볼 만했을지도 몰랐다.
카를로스가 대동해 온 인원들의 전투력이 상당했다.
전투원만 60여 명에 달했을 뿐 아니라, 그중 소드 익스퍼트 급이 15명이나 됐다.
확실한 뱀파이어 처리를 위해 왕실의 지원까지 받아 온 덕분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대동해 온 전투력이 무색하게 상단의 방어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엘프들만으로도 버겁건만, 추가적인 악재가 덮쳐 왔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와 그 수하인 노스페라투들.
이 역겨운 마물들이 갑자기 태도를 달리했다.
엘프들과 함께 자카럼 상단을 습격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뱀파이어 카밀라의 위용이 엄청났다.
그녀의 핏빛 손톱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상단 전투원들이 두셋씩 쓰러졌다.
소드 익스퍼트 급 실력자들이 나서서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카밀라의 속도를 따라잡지도 못했을뿐더러, 그들 또한 핏빛 손톱 앞에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뱀파이어이니만큼 강하리라는 예상은 분명히 했었다.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을 줄 알았다.
소드 익스퍼트 급 실력자 두셋이면 충분한 정도?
하나, 막상 드러난 카밀라의 힘은 그 정도라는 것을 아득히 초월했다.
소드 익스퍼트 급 실력자가 떼로 몰려와도 안 될 것 같은 강력함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안 됐다.
그녀가 짓쳐 드는 족족 픽픽 쓰러질 뿐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중과부적임이 역력했다.
물론, 이런 카밀라에 대한 대응책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카밀라의 강력함을 미처 예상 못 했다 하나, 그래도 카를로스와 상단 측에는 최고의 카드가 존재했다.
바로 마즈리얼 포우 후작.
소드마스터인 마즈리얼이라면 카밀라를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터였다.
단, 그가 카밀라 앞에 설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샤락~ 샤라락!
“쥐새끼 같은……!”
안타깝게도 마즈리얼은 카밀라 앞에 서 보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샤아악~!
콰광!!
하이엘프 아인한드라였다.
그가 뿜어내는 바람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기 그지없는 마즈리얼이었다.
전투 시작 직후부터 어느 한쪽이 압도하지 못하는 형국이 계속됐다.
양상의 팽팽함으로 보건대 이대로면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젠장!”
문제는 이대로일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점을 마즈리얼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이엘프에게 묶여 있다고 해서 눈까지 묶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전황의 불리함을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꾸만 겉으로 내비쳐지는 조급함이 그 방증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바는 없었지만.
지이잉!
샤아악~!
콰과광!!
똑같은 양상만 계속해서 반복됐다.
이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국면 전환을 위해서는 무언가 외부적인 요인이 필요했다.
‘아, 안 돼.’
그리고 카를로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사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막 전투 시작 10분도 안 되어 마지막 상단원이 절명한 참이었으니까.
이 말인즉슨 하이엘프와 소드마스터 사이에 제3의 변수가 끼어들 수 있게 됐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소드마스터 쪽에 지극히 불리한 방향으로.
스윽.
직감은 실제가 되었다.
마즈리얼의 뒤편에 손이 하나 등장했다.
공중에 덩그러니 떠 있는 창백한 손.
오늘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는 장면이었다.
그 손가락 끝에 돋아 있는 핏빛 손톱 역시도.
스아악~!
그것이 사정없이 휘둘러졌다.
훤하니 드러나 있는 마즈리얼의 등판을 향해.
샤아악~!
하필이면 하이엘프의 바람이 강력한 일격을 가해 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말이다.
이윽고.
스걱!!
“커헉……!!”
최고이자 최후의 카드마저 찢어지고 말았다.
쫙 갈라지며 피 분수를 내뿜는 마즈리얼의 등판과 함께.
“안 돼!!!”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전투가 종결된 것이다.
카를로스가 의도하고 계획했던 것과는 정반대이자, 상상조차 못 했던 비참하고 끔찍한 방향으로.
“아아…….”
저벅저벅.
한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끝난 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이었던 전투에 불과했다.
전체적인 상황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오롯이 카를로스 홀로 떠안게 될 몫이기도 했다.
당장 의식이 온전한 인간이라고는 그밖에 없을뿐더러, 애초에 이 상황의 시발점은 누가 뭐라 해도 카를로스였기 때문이다.
“묻겠다, 카를로스 지안.”
전투를 마치고 카를로스에게 다가온 하이엘프 아인한드라.
그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이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네가 거래를 통해 데려간 우리 일족 네 명은 지금 어디 있지?”
“그, 그게…….”
샤아~
“헙!!”
단,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서늘한 바람도 함께였다.
살기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한 줄기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머뭇대지도, 잔머리 굴리지도 말라는 것이다.
목이 댕강 잘리고 싶지 않으면.
“그, 그게 이미 제 손을 떠났습니다. 벌써 전부 다 팔려 버려서…….”
“역시 그런가.”
하나, 머뭇대지 않고 입을 연다고 해서 딱히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어차피 카를로스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라 봤자 한정적이었다.
그리고 이는 전부 하이엘프의 화를 돋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본인의 일족이 이미 노예로 팔려 간 뒤라는데 분노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카밀라.”
그런데 이에 대한 하이엘프의 반응은 카를로스의 예상과 달랐다.
그는 크게 분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카밀라를 호명할 뿐이었다.
콰득.
그러자 또다시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하이엘프의 호명에 따라 카밀라가 곧장 마즈리얼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그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마치 흡혈이라도 하려는 듯한 모양새로 말이다.
“저 인간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리고 당분간 죽지도 않을 예정이다. 우리 일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사 상태에 빠져 있을 테니까.”
“예??”
“저자는 너희 왕국에 굉장히 중요한 인간일 텐데?”
하지만 그것은 흡혈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말씀은……?”
“너 또한 여기서 죽이지 않고 살려서 보내 주겠다. 그러니 가서 우리 일족들을 데리고 오도록. 저자를 끝까지 살려 두고 싶다면.”
그것은 단초였다.
마즈리얼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거래의 단초.
더불어 이것이 지닌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정령석과 겨울바람 일족이 오가던 직전의 거래보다도 배는 더.
그 대가가 앙기리스 왕국에 둘밖에 없는 소드마스터 중 하나의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즉, 왕국의 안보와 직결된 거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 하지만 이미 다 팔려 나간 지 오래입니다.”
“그건 일을 벌인 네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겠지. 어떤 식으로 해결을 하든 나와 우리 일족이 바라는 것은 확고하다. 팔려간 일족들을 우리 품에 되돌려 놓는 것.”
“…….”
“오래 기다리지는 않는다. 명심하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사시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카를로스는 완전히 끝이었다.
물론 수습한다 해도 그의 암울한 미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터.
정령석을 잃은 데다 국가 안보마저 위기에 빠뜨린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면 정말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이대로 알거지가 되어 노상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은 수습부터였다.
지금은 그다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말 팔려 간 일족들만 데리고 오면 후작 각하를 무사히 돌려주시는 겁니까?”
“아니. 살려 준다.”
“……??”
“착각하지 말도록. 일족의 무사 귀환은 저 인간을 살려 주는 조건일 뿐이다. 돌려주는 조건에 관한 논의는 일단 우리 일족이 돌아온 다음에 다시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이 수습조차 험난하기 그지없을 예정이니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 카를로스를 향해 활짝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어때?”
내가 아인한드라에게 물었다.
느낌이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잠시.”
그러자 아인한드라는 곧바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힘을 끌어 올렸다.
그 힘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정령력이었다.
아인한드라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람의 정령력 말이다.
따라서 힘을 끌어 올린 사실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후우우우웅~!
한데, 끌어 올린 힘의 수준은 그렇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특별했다.
몰라보게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전에 끌어 올린 바람이 돌풍 정도였다면, 현재 그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은 폭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정령력이라니…….”
옆에서 나르한지아의 감탄이 들려왔다.
함께 지켜보던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프어인지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나르한지아와 같은 감탄의 기색이 두드러졌다.
“이 정도면 불러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러낸다니, 뭘?”
“이름을 지닌 정령. 일족 내에서도 수 대째 현현시키지 못한 존재다.”
감탄인 동시에 기대감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인한드라가 오늘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런 것이 점점 더 강력해져 가는 바람에 발맞춰 분지 내를 가득 채워갔다.
콰아아아아아~!!
그렇게 바람은 폭풍마저 넘어 태풍에 다다랐다.
그리고 이내.
샤아아.
한 존재의 현현과 함께 잦아들었다.
반투명한, 그러나 분명한 실체를 지닌 존재였다.
이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존재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령력을 지닌 엘프나 나뿐만 아니라 뱀파이어인 카밀라와 테페슈의 눈에까지 전부.
두 뱀파이어의 시선 역시 공중에서 가볍게 살랑이는 이 존재를 쫓고 있었다.
크기는 아인한드라의 상체 정도에 불과한, 그럼에도 아인한드라를 쏙 빼다 박은 외양을 지닌 이 존재를 말이다.
―나는 샤테이어. 바람을 이끄는 바람.
잠시 후, 한 줄기 분명한 의지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왔다.
―아인한드라. 나를 불러낸 자. 그리고 나의 동반자.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