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장: 북방 극지대
‘안 돼……!’
겨울바람 일족의 엘프 나르한지아가 탄식했다.
분노와 안타까움 따위로 가득한 그런 탄식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목숨보다 소중한 일족들이 하나둘 쓰러져 가고 있는데.
“으윽!”
“커헉!!”
“크읍……!”
물론 나르한지아라고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족들이 공격받는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친우이자 일족의 지도자인 하이엘프 아인한드라가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그의 대행인 나르한지아에게는 일족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나르한지아의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스아악~
차앙!!
방해 때문이었다.
일족을 공격 중인 100여 마리의 이지가 없는 괴물들.
그리고 이 괴물들을 이끄는 한 흉수였다.
이 흉수의 방해 때문에 나르한지아가 일족들을 도우러 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 가지만 빼면 아름다운 인간 여성체로 볼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하나, 그 몇 가지가 이 흉수를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로 만들었다.
우선 창백하디 창백한 피부였다.
겨울바람 일족의 엘프들도 인간 기준으로는 상당히 하얀 피부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 흉수에게는 가져다 붙일 수조차 없었다.
창백하다 못해 아예 투명할 지경이었으니까.
다음은 시뻘건 눈동자였다.
아니, 시뻘겋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시뻘겋다기보다 핏빛이라고 봐야 했다.
인간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핏빛의 요사스러운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손톱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것 역시 핏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핏빛이 아니라 그냥 피였다.
피에 둘러싸인 길고 날카로운 손톱.
이것이 흉수가 나르한지아를 방해하는 주된 수단이었다.
“비켜라!”
차르르륵~
슈아악~!
나르한지아는 여기에 정령력으로 맞섰다.
검에 덧씌운 물의 정령력으로 흉수를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그의 친화력은 물에 특화돼 있었다.
비록 하이엘프가 아니기에 정령 소환은 불가하나, 전투력 자체는 상당했다.
정령력을 활용하는 수준이 그 방증이었다.
검에 덧씌워진 그의 정령력은 어느새 얼음으로 변환된 상태였다.
검의 형태에 따라 길고 날카로우며 아주 단단한 얼음으로 말이다.
카앙!!
까드드득~!
문제는 흉수 또한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피로 둘러싸인 흉수의 손톱이 나르한지아의 검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대치 국면을 만들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그런 팽팽한 대치 국면이었다.
아까부터 이런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나도 명령을 받는 입장이라 그냥 비켜 주기는 좀 그렇고, 당신이 힘으로 치워 보는 건 어때요, 나르한지아?”
더구나 심리전까지 걸어 왔다.
엘프의 피를 빨아 습득한 유창한 엘프어.
그것으로 나르한지아를 흔들어 댔다.
“힘 좀 써 봐요. 지금 여기서 나랑 노닥거릴 시간 없잖아요. 어어? 저기 당신 일족 하나 또 당하게 생겼네.”
“…….”
슈아악~
차앙~!!
그래도 나르한지아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여기서 나르한지아마저 쓰러지면 정말 끝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신경 끄려고요? 이번에는 꼬맹이인 것 같은데?”
“꺄아아악……!”
“사야나드라!!”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둘밖에 남지 않은 어린 엘프였다.
그런 소중한 일족의 미래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나르한지아의 평정심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비명이 들리는 쪽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까지 돌리고 말았다.
“아이 고마워라~”
스악~
콰창~!
“크윽……!”
대가는 엄중했다.
흉수는 그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귀신같이 파고들어 강력한 피의 일격을 가해 왔다.
이에 나르한지아는 손에서 검을 놓치며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물론 아직 정령력이 남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 잘 자요.”
스아악~!
이미 흉수의 혈조가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을 끌어 올릴 틈 자체가 없었다.
‘아, 안 돼.’
결국, 나르한지아도 직감했다.
여기서 끝이었다.
그도, 일족도.
그리고 그렇기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희망이자 등불인 친우의 존재를.
‘아인한드라…….’
콰각!!
* * *
그 시각, 아인한드라 역시 겨울바람 일족의 엘프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라나지아, 두이아드나…….’
단, 나르한지아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그가 눈에 담은 것은 괴물들의 습격에 격렬히 저항하는 일족이 아니었다.
저항은커녕 얼핏 봐서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일족들이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로 웬 관 속에 누워들 있으니 그리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시체처럼 관 속에 누워 있는 이 14명의 엘프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비정상적으로 가늘고 길기는 하지만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가사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
‘대체 무슨 짓을……?’
현재 아인한드라가 위치한 곳은 북방 극지대에서조차 극지라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끊이지 않는 눈보라가 대낮에조차 햇빛을 완전히 가려 버리는 극도의 척박함과 음울함.
한데, 이 척박하고 음울한 장소에 웬 외딴 성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다.
사실 성이라고 하기에는 심히 조악하지만, 어쨌든 어울리지 않는 인위적인 건축물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아인한드라는 현재 이 성안에 몰래 잠입해 있는 상태였다.
흉수의 행적을 쫓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6년 전, 아인한드라는 제국을 탈출한 뒤 곧장 북방 극지대로 향했다.
목적이야 두말할 필요 없었다.
이곳으로 도망친 그의 일족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찾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엘프의 수호나무인 이그드라실의 가지 덕분이었다.
도망친 일족이 이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정령력 활용을 통해 이 기운을 느끼는 것이 가능했다.
덕분에 아인한드라는 북방 극지대 진입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족과 재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천신만고 끝에 재회한 일족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아인한드라가 본인을 희생하며 이들을 탈출시킬 때만 해도 인원은 200이 넘었었다.
한데, 북방 극지대에서 가까스로 재회했을 당시 생존자는 70여 명에 불과했다.
불과 2년가량 동안 인원이 1/3 토막 난 것이다.
비단 숫자만이 아니었다.
남은 생존자들 역시 상태가 좋지 못했다.
거지꼴이 따로 없음은 물론이요, 오늘내일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북방 극지대의 환경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연 친화적인 엘프들조차 맥을 못 차리고 픽픽 쓰러져 나갈 정도로.
그래도 아인한드라가 합류한 뒤에는 좀 나았다.
그는 바람의 정령을 한계치까지 소환하여 일족에게 향하는 칼바람을 최소화했다.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버틸 만큼은 된 것이다.
단,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본질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여 아인한드라는 일족을 이끌고 다시 북방 극지대를 떠돌기 시작했다.
그나마 살 만한 정착지를 찾기 위함이었다.
이 과정에서 상태가 좋지 않았던 엘프들이 명을 달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임시방편만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3년가량이 흐른 시점, 끝내 찾아내고야 말았다.
언덕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분지였다.
지형 덕분에 베일 것 같은 바람이 그나마 조금 덜한 곳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아주 조금에 불과했지만, 여긴 북방 극지대였다.
이 정도만 돼도 감지덕지한 것이다.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더는 떠돌 힘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제는 56명밖에 남지 않은 겨울바람 일족의 주거지가 정해졌다.
나아가 희망을 품어 볼 만했다.
분지라는 지형에 아인한드라의 정령이 더해지니 약간은 지낼 만한 장소가 됐다.
이제 여기에 이그드라실을 심고 어떻게든 키워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정말 새로운 터전이 마련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겨울바람 일족의 역경과 시련은 계속됐다.
더욱이 이번에는 한층 더 직접적이었다.
일족을 향한 습격이 시작된 것이다.
노스페라투라 불리는 괴물들의 습격이었다.
이것은 오크나 오우거 같이 하나의 종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극지대 몬스터인 예티나 아이스 트롤 등 다양한 종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애초에 생명체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다.
이것들은 시체였다.
이미 죽어 썩어 문드러졌어야 할 시체.
그런 것들이 땅바닥에 누워 있지 않고 멀쩡히 서서 돌아다니는 것이다.
단, 이들에게는 독립적인 의지가 없었다.
그저 주인만을 따를 뿐이었다.
오직 자신들을 감염시킨 주인의 명령에만 말이다.
이 말인즉슨 1년 전부터 시작된 이 습격에는 주동자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아인한드라는 이 주인이자 주동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뱀파이어였다.
생명체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존재.
아니, 살아간다는 정의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어둠의 종속.
살아 있되 살아 있지 않은 존재였다.
머나먼 과거에 마계에서 넘어왔다 여겨지는 마물이기도 했다.
이런 것이 북방 극지대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인한드라와 겨울바람 일족을 습격해 왔다.
물론 방어에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심히 역부족이었다.
극지대로 넘어오며 일족 전체가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난 1년간 일족의 숫자가 무려 34명이나 더 줄어들었다.
이제 더는 버티고 싶어도 버틸 수 없는 상황.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언가 수를 내야만 했다.
그래서 모험을 감행했다.
아인한드라가 분지를 비우고 직접 나선 것이다.
그러고는 뱀파이어의 본거지를 추적했다.
본거지의 위치와 규모를 확보한 뒤 최후의 반격이라도 가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현재, 본거지를 확인 후 잠입해 들어온 상태였다.
‘굳이 이렇게 재워 둔다고? 왜?’
한데, 이런 아인한드라의 눈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잡아끌고 있었다.
성안에 쭉 늘어서 있는 웬 관들이었다.
그리고 이 관 안에는 가사 상태에 빠진 엘프들이 누워 있었다.
습격에 따른 전투 종료 후 시체를 찾지 못했던 일족들이었다.
상황상 당연히 죽었으리라고 여겼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총 18명의 실종자 중 무려 14명이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절로 의문이 일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하여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려던 찰나였다.
샤라락~
파앗!
주위를 맴돌던 바람이 경고를 보내왔다.
이에 아인한드라가 재빨리 회피 동작을 펼쳤다.
동시에 몸을 돌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꽈득.
그러자 공중에 덩그러니 떠 있는 창백한 손 하나가 보였다.
아인한드라의 목덜미가 있던 자리를 움켜쥐고 있는 손이었다.
즉, 은밀히 접근하여 아인한드라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던 것이다.
소름 돋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
주인 없는 손이었다.
그런 것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더구나 목덜미를 움켜쥐려고까지 했다.
누구라도 식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토리.”
하나, 아인한드라는 그렇지 않았다.
식겁한 모습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살짝 찌푸린 인상이 전부였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는 주인이 있다는 사실과 그 주인의 정체까지 모두.
스스스스.
“역시 바로 알아차리네.”
이내 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말이다.
그러나 정확히는 없던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단지 안개화 상태였기에 보이지 않았을 뿐.
뱀파이어 퀸, 바토리의 능력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바람이 알려 줬나? 성가셔.”
지난 1년간 수도 없이 부딪쳐 왔다.
그렇기에 서로의 능력을 서로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동시에 이것이 그간 겨울바람 일족에 피해가 누적되어 온 이유이기도 했다.
습격 시마다 아인한드라가 바토리에게 묶여 있었던 것이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아, 이거? 별거 아니야. 그냥 장사를 좀 해 볼까 해서.”
아인한드라가 고갯짓으로 관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1년 만에 처음으로 순순히 답을 주는 바토리였다.
“너희 엘프들, 굉장히 비싼 몸들이시잖아. 인간들이 사족을 못 쓸 만큼.”
그렇게 얻은 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인간들에게 팔아먹겠다는 것이다.
또, 매우 익숙한 이유였다.
엘프들을 이 척박한 극지대까지 내몬 이유였으니까.
아인하드라는 직접 겪어 보기까지 했고 말이다.
“뱀파이어가 인간과?”
“뱀파이어라고 인간과 거래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갖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그러려면 너희들 엘프가 꼭 필요해, 아인한드라. 물론, 너 역시도.”
다만, 이곳에서까지 같은 이유가 적용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심지어 인간도 아닌 뱀파이어에 의해서일 거라고는 더더욱.
“그래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어.”
“……?”
“네가 그 분지에서 나오기만을. 너 때문에 나머지 엘프들을 최대한 상처 없이 끌고 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거든.”
“……!!”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다.
이유의 적용은 장소와 주체를 가리지 않았다.
나아가 시간 역시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남겨진 일족들을 향해 마수를 들이밀고 있었다.
“가 보려고? 늦었어, 그것도 많이. 지금쯤이면 카밀라가 한창 사냥을 벌이고 있을 테니까.”
비단 분지만이 아니었다.
당장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대로 보내 줄 생각도 없고 말이야.”
샤라락~
바람이 또다시 경고를 보내왔다.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괴물들이 일어나 성을 포위하는 중이라고.
상당히 뒤늦은 경고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으니까.
지금은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할 때였다.
‘모두 조금만, 조금만 버텨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