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장: 경연(2)
크루젠 벤투스는 초장부터 불의 정령력을 꺼내 들었다.
단순히 꺼내 드는 데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오러를 통해 그것을 강화했으며, 그렇게 강화된 화염으로 라이오넬을 압박했다.
그 또한 숨기고 있는 것을 꺼내 들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오넬은 끝까지 여유를 부렸다.
대결 시작 시점까지 그 힘을 꺼내 들지 않은 것이다.
이에 크루젠도 더는 말로 하지 않았다.
시작 신호와 함께 그대로 짓쳐 들었다.
어린놈의 거만을 더는 받아 주고 싶은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검을 섞어 가다 보면 자연스레 깨달을 터였다.
자신이 부린 것은 여유가 아니라 오만이고 건방이었다는 사실을.
또,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될 것이기도 했다.
라이오넬이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게 되는 때는.
하여 더는 기다려 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라이오넬과의 대결.
초반 양상은 크루젠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라이오넬은 수세를 면치 못했다.
그 원인은 당연히 화염에 있었다.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크루젠의 화기가 검을 타고 라이오넬에게 넘어갔다.
그러고는 내부에서부터 그의 장기를 공격해 들어갔다.
화염의 무서운 점이 바로 여기 있었다.
굳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열기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다.
단, 상대가 소드마스터이기에 괴롭힌다는 표현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었다.
만약 상대가 그저 그런 검사였다면, 대결은 이합을 넘기지 못했을 터였다.
일합에 장기가 전부 익어 버렸을 테니 말이다.
라이오넬이 처한 상황 또한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초반에야 오러로 장기를 보호해 가며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반전은 불가능했다.
반전은커녕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같은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힘과 정신이 분산된 상태에서의 격돌은 오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든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 장기 보호에 실패하거나 혹은 상대의 오러 블레이드에 직접적으로 깨져 나가거나.
더불어 그 시간도 그리 길지 못할 터였다.
캉! 차캉! 콰캉!
일방적인 크루젠의 공세가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품지 않았다.
크루젠은 라이오넬처럼 거만하게 힘만 믿고 날뛰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는 준비해 둔 전략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철저히 이행해 갔다.
브루노 다스의 조언을 바탕으로 수립한 전략이었다.
라이오넬과 두 차례나 검을 맞대 본 브루노였다.
그것도 생사가 오가는 실전 상황에서 말이다.
당연히 라이오넬의 특징을 적잖이 꿰고 있었다.
그런 브루노의 도움을 받아 수립한 전략이니만큼 상당한 효과를 발휘해 나갔다.
차캉! 카강! 카캉!
크루젠은 결코 힘 대 힘으로 맞서지 않았다.
철저히 치고 빠졌다.
그러면서 쉬지 않고 공격해 들어갔다.
일검 일검에 힘을 싣기보다는 공격 횟수를 늘리는 데에 집중한 것이다.
우선 라이오넬의 힘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라이오넬의 라인하트 검법은 중검 계열이었다.
따라서 그 자체로 상당한 무게를 지닌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루노가 전해 준 바에 따르면 이게 다가 아니었다.
중간중간 검법 자체를 넘어서는 추가적인 무게가 실려 왔다.
그는 이것을 정령력의 영향으로 판단했다.
여타 정령력과는 달리 가시적이지 않은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비단 찍어 누르는 힘만이 아니었다.
끌어당기는 힘도 존재했다.
그리고 브루노의 첫 번째 패배 원인이 바로 여기 있다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이 힘이 자세를 무너뜨렸고, 그로 인해 일격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파밧!!
슈악~
이에 따라 크루젠은 회피 동작을 크게 크게 가져갔다.
끌어당기는 힘의 개입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라이오넬에게 반격을 내줄 수밖에 없는 순간에는 차라리 뒤로 빠졌다.
아예 공격 범위를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충돌 횟수 자체를 늘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어차피 전략의 포인트는 화기 전달에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충돌만으로도 충분조건이 달성됐다.
따라서 가볍더라도 쉼 없는 연쇄 공격에 집중하는 크루젠이었다.
쾌검 계열인 그의 검법이 여기에 일조하고 있었다.
비단 검법 만이 아니었다.
정령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기 이외의 방식을 통해 전략 이행에 추가적인 힘을 보태는 중이었다.
동작이 큰 회피의 와중에도 공격이 끊기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화르르륵~
형태 변환을 통해서였다.
애초에 불에는 고정된 형태가 없었다.
크루젠이 만들어 낸 화염도 이 성질을 그대로 따랐다.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크루젠의 화염은 그 외형을 달리했다.
채찍과도 같은 형태로 변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정거리 또한 늘어났다.
촤라락~!
덕분에 크루젠은 회피 중에도 공격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물론 이 자체로 근접전에서 만큼의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상대에게 끊임없이 손해를 강요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마 라이오넬의 내부는 말이 아닐 터였다.
아무리 오러로 보호한다 해도 매 순간 완벽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것도 눈 깜박할 틈조차 주지 않는 연속 공격하에서는 더더욱.
파앗!!
캉! 차캉! 카강!
이렇게 라이오넬의 반격 타이밍을 흘려보낸 뒤에는 곧장 다시금 짓쳐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쉼 없는 검격을 쏟아 냈다.
빈틈없는 전략 준비와 철저한 이행의 환상적인 콜라보라고 할 수 있었다.
‘으음.’
5분여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크루젠은 그렇게 확신했었다.
모든 것이 준비한 대로 순조롭게 풀려 가는 중이라고.
상황은 크루젠 본인의 통제하에 있다고 말이다.
‘아직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5분이 지난 현재, 크루젠의 확신은 점차 옅어져 가는 중이었다.
동시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상황이 정말 그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
시간 때문이었다.
대결이 시작된 지 벌써 30분가량 흐른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어야 했다.
라이오넬이 버거움을 드러내야 했으며, 결국 견디지 못하고 숨겨 둔 힘을 꺼내 들었어야 했다.
준비해 온 전략과 계획대로라면 그게 맞았다.
‘대체 어떻게……?’
그런데 진작 도출되고도 남았어야 할 결과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숨겨 둔 힘을 꺼내 들기는커녕 버거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라이오넬이었다.
이상했다.
예상대로라면 이래서는 안 됐다.
그렇다고 이행 과정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캉! 카강! 차캉!
지금 이 순간도 쉼 없이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준비해 둔 계획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럼에도 라이오넬은 여전히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는 중이었고 말이다.
라이오넬이 연기를 펼치는 중일 가능성?
그것도 처음 10~20분 때나 가능한 얘기였다.
아무리 포커페이스에 능하다 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30분이 지난 현재까지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건 뜻하는 바가 명확했다.
라이오넬은 실제로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현 상황의 원인 또한 자연스럽게 한 가지로 귀결됐다.
‘……계산 착오?’
수립된 전략 자체의 오류뿐이었다.
애초에 라이오넬에 대한 계산이 잘못된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
문제는 그 지점이었다.
원인이 정령력에 있다는 점은 추측 가능했다.
하지만 정확한 지점은 특정이 요원했다.
라이오넬의 정령력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종류야 크로아티 덕에 밝혀졌다지만, 작용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대략적인 추론뿐이었다.
당연히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도출이 불가했다.
즉, 크루젠은 이런 깜깜이 상태로 대결을 이어 가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당장 이 대결의 승패가 갈리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흐름대로라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나, 사실상 크루젠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황제와 제국의 패배이기도 했다.
이 대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라이오넬의 숨겨진 힘을 끄집어내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목적 달성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어찌 됐든 이대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됐다.
라이오넬이 압박을 받기는커녕, 이렇게 크루젠 본인이 압박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절로 다급해질 수밖에 없는 크루젠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그래서였다.
크루젠은 본인 마음속에 피어난 다급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 다급함의 재촉 하에서 상황에 대한 타개책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상하리만치 급속도로 불어나는 불안한 감정 그 자체에 대해서는 간과한 채로 말이다.
* * *
카강! 차캉!
화르르르~
검격이 교환될 때마다였다.
그때마다 크루젠의 화기가 전해져 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내부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날뛰려 했다.
내부 장기들을 무대로 마음껏 뛰놀고자 하는 것이다.
화르르…….
그러나 의지뿐이었다.
화기에게 주어진 현실은 그 의지와 전혀 달랐다.
날뛸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제공되지 않았다.
호시탐탐 화기만을 노리는 포식자가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아아아~
어둠이라는 이름의 포식자였다.
이 포식자가 쩍 하니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화기가 들어오는 족족 집어삼켰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화기는 내부에서 날뛰기는커녕 좋은 에너지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크루젠은 계속해서 화기를 보내왔고 말이다.
덕분에 대결 시작 후 30분 넘게 흐른 현재까지 내가 소모한 힘의 총량은 극히 미미했다.
가져다 쓰는 족족 크루젠이 도로 채워 준 것이다.
인력을 한 단계 발전시킨 흡수의 힘, 흡력이었다.
끌어당기다 못해 아예 잡아먹어 버리는 것이다.
경험과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이기도 했다.
이베리아 영지에서의 경험을 통해 어둠에 대한 이해도를 대폭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발전의 단초가 제공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 단초를 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확실하게 잡아챘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정령력 활용법까지 터득할 수 있었다.
물론 이 힘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아직 무리였다.
무작정 흡수하려 들다가는 되려 심각한 내상을 입을 수 있었다.
단, 그 아래라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둠이 포식자로서의 위용을 얼마든지 뽐낼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못 해 보고 그대로 잡아먹힌 크루젠의 화기가 그 단적인 예였다.
카강! 콰캉!
“…….”
크루젠은 쉬지 않고 검격을 내질러 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검격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힘만 야금야금 깎아 먹을 뿐.
그리고 이 점을 크루젠도 인식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에 깃든 약간의 의구심이 포착됐다.
사실 난 이 상태로 시간만 끌어도 상관없었다.
이 흐름대로라면 시간은 좀 걸릴지언정 크루젠이 먼저 나가떨어질 터였다.
나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승리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황제의 계획도 망쳐 버리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뭐랄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간이 좀 걸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결과가 도출되기까지 족히 두어 시간은 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크루젠의 진이 다 빠지기까지 그 정도는 소요될 테니 말이다.
이기긴 이기되 애매하고 재미없는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없었다.
해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애매하고 재미없는 결과는 나도 사절이었다.
확실하게 끝을 낼 작정이었다.
황제의 계획뿐만 아니라 그의 자존심까지 뭉개 버릴 수 있도록.
스으으으~
답은 이번에도 어둠이었다.
어둠으로 크루젠의 눈빛에 깃든 의구심을 붙잡았다.
그리고 흔들었다.
크루젠이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단,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으음…….”
의구심은 그 크기를 불려 갔다.
동시에 다급함 따위를 불러일으켰으며, 나아가 침음으로까지 발전했다.
현 상황에 대한 고민과 답답함 등이 가득 담긴 그런 침음으로.
숙련된 소드마스터가, 그것도 대결이 한창인 와중에 내뱉은 침음이기도 했다.
즉, 그 흔들림의 크기가 눈에 훤히 보일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실제 선택의 성급함으로까지 이어졌다.
슈아악~
파밧!
내 반격 타이밍에 맞춰 크루젠이 또다시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렇다면 이제 화염의 채찍이 휘둘러질 차례였다.
지금까지의 패턴대로라면 그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패턴이 무너졌다.
지이이잉~!
거리를 벌린 크루젠이 선택한 것은 채찍이 아니었다.
풀무질이었다.
풀무질을 통한 화염의 강화.
대결 시작 직전에 한 차례 선보였던 바로 그것 말이다.
콰아아아아~!
대신 이번에는 그때와 수준이 달랐다.
다시 한번 변화하는 화염의 색이 그 방증이었다.
크루젠이 뿜어내는 화염은 노랑의 영역조차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새로이 들어선 곳은 백색의 영역이었다.
백염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강력했다.
아니, 꼭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전해지는 열기만으로도 압도적인 강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확실했다.
이건 크루젠의 필살기였다.
오러 블레이드와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백색의 화염.
완성된다면 나 또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그런 위력일 것이 분명했다.
파앗!
단, 완성된다면 말이다.
크루젠에게는 안타깝게도 이것의 완성 가능성은 극도로 낮았다.
성급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의도하고 만들어 낸 상황이었다.
크루젠의 안에 깃든 의구심을 흔들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말이다.
그런 내가 구태여 필살기의 완성을 기다려 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또한, 바로 지금이었다.
필살기가 완성에 다다르기 직전의 순간.
그 반대급부로 불안정이 극에 달한 지금 이 순간.
대결을 날로 먹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역으로 먼저 짓쳐 들었다.
지이잉!
슈아악~!
쿠구구구!!
“……!!!”
오러 블레이드는 물론이고 중력까지 가득 실은, 나아가 이 대결의 마침표를 찍을 마지막 일격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