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97화 (98/200)

55장: 즉위식과 숙제(2)

“이반 자작, 자네가 폐하께 말씀드려 줄 수 없겠나? 지금의 난 5년 전과 달라.”

황제 위에 오른 아이단의 최측근 카일 이반.

그런 카일에게 청탁 아닌 청탁을 해 오는 인물이 있었다.

“다스 백작님께서 그동안 혹독하게 수련하셨다는 걸 저라고 왜 모르겠습니까? 정령력까지 활용 가능한 지금은 충분히 해 볼 만하다는 것도요.”

그는 바로 브루노 다스 백작이었다.

아이단이 황태자이던 시절 그의 호위를 맡았던 인물.

비록 지금은 그 자리를 자연스레 근위기사단장 가이덴 드라이슬러 공작에게 내주었다지만, 그렇다 해서 경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카일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최측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결정 내리신 이상 제가 어떻게 해 볼 여지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다고 보기 어려웠다.

현재 브루노는 황제의 최측근이라고 보기에 다소 어정쩡한 처지였다.

그가 남긴 전적 때문이었다.

브루노는 벌써 두 차례나 실패한 상태였다.

심지어 이 두 번 모두 아이단과 직접 연관된 일이었다.

한 번은 아이단의 호위에 실패했으며, 또 한 번은 아이단의 특명 이행에 실패했다.

이쯤 되면 황제의 눈 밖에 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

“그리고 기회가 이번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폐하나 저는 물론이고, 그때 일과 관계된 모든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백작님께서 라이오넬에게 밀렸던 것은 순수한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가 원흉이었다.

브루노에게 치욕적인 두 번의 실패를 안겨 준 원흉.

그럼으로써 그의 처지를 어정쩡하게 만든 원흉이기도 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정령석 섭취 여부에서 발생한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도요. 그러니 조금만 더 정령력에 숙달되시고 나면, 누구보다 폐하께서 먼저 설욕의 기회를 마련해 주실 겁니다.”

물론 황제가 브루노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버리거나 벌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특혜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도 무려 정령석이라는 특혜였다.

브루노와 라이오넬의 현격한 차이를 만들어 낸 바로 그것 말이다.

덕분에 브루노는 현재 자신감을 되찾은 상태였다.

하여 카일에게 부탁 중인 것이다.

이번 경연에서 라이오넬의 상대로 본인이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벤투스 후작 각하?”

“자작 말이 맞네, 다스 백작.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확실히 알고 있어. 그래도 정령력에 있어서는 내가 자네보다 선배이지 않은가? 날 믿게.”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제의 신뢰는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지금 눈앞의 인물이었다.

크루젠 벤투스 후작.

그는 15년도 더 전에 벽을 뛰어넘은 숙련된 소드마스터였다.

또한, 정령석을 섭취한 지도 벌써 6년이 다 돼 가는 정령력 숙달자이기도 했다.

“비록 이번 일은 내가 맡게 됐지만, 다음은 분명 자네일 걸세. 지금 숙달 중인 대지의 정령력이 확실히 자네 것이 되고 나면, 폐하를 제외한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게 될 거야. 그러니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져.”

그리고 이런 완숙한 실력이 이유였다.

그가 이번 경연에서 황제의 선택을 받은 것은.

즉, 크루젠 벤투스가 라이오넬의 상대로 낙점된 것이다.

“무엇보다 자네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나나 이반 자작이 이렇게 자네의 조언을 듣고자 찾아왔겠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백작님께서는 두 번이나 라이오넬 그자와 검을 맞댄 경험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런 만큼 이번 경연에 있어서 그에 대한 백작님의 조언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경연의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단순한 승리가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조차 않았을 터.

목적은 어디까지나 라이오넬 해부에 있었다.

그의 실력을 밑바닥까지 샅샅이 긁어내는 것 말이다.

단, 쉬울 리 만무했다.

정령력 덕분이니 뭐니 해도 라이오넬이 세운 업적 자체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업적이 기적이라 부르기에 손색없다는 사실 역시도.

따라서 이번 경연이 제국에게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더욱이 폐하께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일 아니겠습니까? 적극적인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다스 백작님.”

오죽하면 크루젠쯤 되는 실력자가 조언을 듣고자 찾아온 참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브루노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를 달래는 두 사람의 말마따나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언젠가는 반드시 설욕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다짐과 함께 말이다.

“……내가 뭘 어떻게 도우면 되겠나?”

“감사합니다, 백작님. 어려울 것 없습니다. 라이오넬, 그자에 대해 백작님께서 아시는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전부 말입니다.”

* * *

제국 황도로 향하는 길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렇다 할 사건이나 사고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도 위를 지나는 데다 사절단의 규모 자체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내가 포함된 행렬이었다.

미치지 않고야 여기에 수작을 부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덕분에 다소 늦게 출발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당도한 로만 제국의 황궁 대전.

이곳에서 새로운 황제 아이단에 대한 즉위식이 진행되었다.

즉위식은 성대했다.

정말 성대하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었다.

황제 즉위식답게 볼거리도 많고 중간중간 화려한 요소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만, 이런 것들은 그저 곁가지에 불과했다.

즉위식을 성대하게 만든 진짜 요소는 바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대륙의 향방을 결정짓는 저명인사들이 모조리 집합했다고 봐도 좋았다.

최하가 각국의 왕세자 혹은 그에 준하는 계승권자이거나 권력자였다.

그 귀하다는 소드마스터조차 고개만 돌리면 동서남북 어디서든 확인 가능했다.

대전을 가득 메운 수많은 참석자 중 누구 하나 주요 인사 아닌 이가 없는 것이다.

이런 즉위식이 성대하지 않다면, 성대하다는 단어는 존립 자체가 불가할 터.

이렇듯 성대한, 그리고 압도적인 즉위식이었다.

이런 것이 티끌만 한 잡음 하나 없이 완벽하게 진행됐다.

그런 뒤 새 시대를 알리는 황제의 선언과 함께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제국 전역을 들썩이게 만드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제국에만 해당하는 들썩임이 아니었다.

축제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대륙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황제 아이단의 야심으로 말이다.

즉위식 직후부터였다.

차례대로 각 왕국 사절단의 개별적인 축하 인사가 이루어지는 자리에서부터 황제의 야심은 요동치는 중이었다.

그 단적인 예로 황제와 마이바크 왕국 왕세자의 대화를 들 수 있었다.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폐하.”

“고맙소, 왕세자.”

마이바크 왕국의 알현 순서는 슈라우드 바로 전이었다.

덕분에 아이단과 나우트라 매크리 마이바크의 대화 내용을 귀에 담는 것이 가능했다.

대화는 기본적인 축하 인사와 이에 대한 답례로 시작했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아, 내가 왕세자에게 부탁이 하나 있는데.”

황제가 왕세자에게 어떤 부탁을 하나 하기 전까지는.

“말씀하십시오, 폐하.”

“내 동생인 3황자가 마이바크 왕국이 자랑하는 썬더 그라운드를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말이지. 귀찮으리라는 건 알지만, 부탁 좀 해도 되겠소?”

이 지점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화가 특별한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로만 황가의 3황자, 그리고 마이바크 왕국의 썬더 그라운드.

마이바크 왕국에 비극의 신호탄이 될 치명적인 단어들인 것이다.

회귀 전 흐름대로라면 3황자는 마이바크 왕국 내에서 살해된다.

그러자 이를 명분 삼아 제국이 마이바크 왕국에 침공한다.

물론 이는 말 그대로 명분에 불과하다.

진짜 이유는 마이바크의 썬더 실크라는 특산품과 이를 통한 왕국의 발전에 있다는 점을 모두가 알았다.

하나, 어찌 됐든 명분은 제국이 쥐고 있는 상태.

결국, 마이바크는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야 만다.

그리고 이 망국의 과정에서 그래플 스트라우스가 떠오른다.

나와 황도 아카데미에서 적잖은 친분을 쌓은 바로 그 그래플 말이다.

그가 마이바크를 지탱하는 마지막 등불이자 최후의 보루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다.

그래 봤자 끝내 왕국의 몰락을 막지는 못하지만.

“이런, 부탁까지 하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고귀한 로만 황가의 방문이라면 언제든 두 팔 벌려 환영이니 말입니다.”

문제는 이 대화의 특별함을 지금으로서는 황제와 그 측근들, 그리고 나밖에 모른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부탁이 순수할 관광 목적일 리 없다는 점은 왕세자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짐작이 최종 결과까지는 미치지 못할 터.

흔쾌히 이루어지는 왕세자의 수락이 그 방증이었다.

“고맙구려. 왕세자와 귀국의 호의는 내 꼭 그에 걸맞게 보답하지.”

황제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었다.

어둠의 태동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그런 미소였다.

안타깝게도 오로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은밀한 어둠이었지만.

그렇게 황제의 흡족함과 함께 마이바크의 차례가 종료됐다.

그러자 그 미소는 이제 다음 타깃을 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오, 레나. 그리고 그대도, 라이오넬.”

바로 레나와 나.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타깃이기도 했다.

이미 얽힐 대로 얽힌 관계였으니까.

“경하드립니다, 폐하.”

“경하드립니다.”

“나보다는 오히려 그대들이 축하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6년 전과 비교하면, 이 자리가 지니는 의미는 두 사람에게 훨씬 클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6년 전의 아이단은 황태자였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 황제가 된 참이었다.

단순하게 본다면 원래 예정돼 있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에 불과했다.

반면, 레나와 나는 정반대였다.

6년 전의 레나는 일개 왕녀, 그리고 나는 촉망받는 유망주에 불과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초라했던 입지는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레나는 한 정치 세력의 수장으로, 나는 제국마저 긴장시키는 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리하여 오늘 이 성대하기 짝이 없는 자리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참이었다.

황제의 말마따나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 말씀하시면 저희가 너무 민망합니다, 폐하. 저희 처지가 아무리 나아졌다 해도 어떻게 황위에 오르신 폐하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글쎄, 아무리 봐도 비교가 되는 것 같단 말이지. 지금 레나 그대의 모습이 그렇지 않소? 말은 그리하면서 정작 태도는 이리도 당당한 것을 보면, 이제는 정말 한 명의 어엿한 정치인이 따로 없어.”

“과찬이십니다, 폐하. 어엿한 정치인이라기에는 아직 부족한 게 너무 많습니다. 여태 그래 왔듯, 앞으로도 폐하의 넘치는 은총만을 절실히 바랄 뿐이랍니다.”

“이거야 원, 빼먹을 게 아직도 더 남은 모양이구려. 어디까지 빼먹을 작정인지 미리 말 좀 해 주면 안 되겠소?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게 말이지.”

그리고 이 성장에는 황제의 역할이 지대했다.

지금껏 황제의 개입이 급속한 성장 동력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레나 개인적인 측면과 그녀가 이끄는 세력 모두에서.

황제와 레나 모두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럴 리가요, 폐하.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그저 폐하께서 베풀어 주시기만을 기다릴 뿐인 것을요.”

따라서 이는 레나가 날리는 일종의 경고라고도 볼 수 있었다.

어설픈 간섭이나 수작질은 통하지 않으리라는 그런 경고.

더는 6년 전 황도 아카데미에서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레나가 아니었다.

동시에 증거이기도 했다.

이제는 레나가 정말 한 명의 어엿한 정치인으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 말이다.

“그런 것이오?”

“그럼요, 폐하. 당연히 그렇답니다.”

이어지는 대화의 방향 또한 다르지 않았다.

레나는 당당한 정치인이자 한 세력을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공손한 태도와 은은한 미소의 뒤편에서.

그렇게 레나의 순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황제의 시선이 향할 곳은 한 곳뿐이었다.

“그나저나 라이오넬, 컨디션은 좀 어떻나? 혹시 문제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문제없습니다.”

“다행이군.”

경연은 닷새 뒤부터 사흘간, 황제의 이름으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 경연의 목적은 나를 향해 있었다.

“경연 날까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 주기 바라네. 그대의 신위에 대한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그렇기에 부러 컨디션 체크까지 해 주는 황제였다.

이 또한 경고라고 봐야 했다.

어설프게 대충 때우고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말라는 경고.

“유지하겠습니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즉위식을 기념하여 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개최하는 경연이었다.

대충하는 것 자체가 황제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생사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무게를 지닌 것이다.

대련이 아닌 실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또 실망하시는 일도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나 또한 어설프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작정이었다.

황제가 원하는 것 그 이상으로.

“좋군. 그럼 나도 기대하지.”

즉위식과 숙제(3)

“어떻게 봤소?”

즉위식 당일의 축하 연회가 끝난 직후였다.

자정을 넘긴 시간, 로만 제국 황제 아이단이 위치한 곳은 침실이 아니었다.

집무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진 참이었다.

“공작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소?”

이 야심한 시각, 아이단에게 공작이라는 칭호를 들을 누군가란 한 명밖에 없었다.

황제를 최근접거리에서 호위하는 황실 근위기사단장이자 제국 유일의 공작, 그리고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마스터, 가이덴 드라이슬러.

그뿐이었다.

“신의 눈에도 확실히 가볍지는 않아 보이더군요.”

질문의 대상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언급할 필요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오넬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명했으니까.

더욱이 가이덴 또한 이미 그를 마주한 뒤였다.

그것도 아이단만큼이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황실 근위기사단장이니만큼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검을 맞대 보기 전에는 정확한 파악이 어렵습니다.”

“역시 보는 것만으로는 어려운 모양이구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기세를 섞어 본 것도 아니니 말이지요.”

그러나 거리만 가까울 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파악을 위한 충분조건이 갖춰졌다고 할 수 없었다.

“기세를 한번 섞어 본다면?”

“그런다 해도 알 수 있는 건 그자가 소드마스터라는 사실 정도. 어차피 폐하께 필요한 것은 검의 경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기세를 섞어 본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실력 파악은 요원했다.

더구나 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라이오넬의 전력이었다.

검술에 정령력이 조합된 라이오넬의 진정한 힘 말이다.

그걸 파악해 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직접 검을 섞어 보지 않는 이상은 어렵다는 것이 가이덴의 확답이었다.

“라이오넬 그자에 대해서는 크로아티의 판단이 더 의미 있을 겁니다. 당장 신이 할 수 있는 판단은 제한적이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이 그렇다면야. 하면 그대가 한번 말해 보시오, 에르나르 백작. 백작은 어떻게 봤소?”

황제와 가이덴만이 아니었다.

현재 황제 집무실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의 이름은 크로아티 에르나르.

30대 후반에 불과한 로만 제국의 젊은 백작이었다.

동시에 소드마스터이기도 했다.

라이오넬 등장 전까지만 해도 대륙 최연소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던 그런 소드마스터.

“송구합니다, 폐하. 신 역시 정확한 파악은 하지 못했습니다.”

“흐음, 백작도 말이오? 백작이 얻은 능력이라면 어느 정도는 먹힐 줄 알았는데, 이건 좀 예상외군.”

“송구합니다. 다만…….”

“다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가 다가 아니었다.

그게 다였다면 굳이 이 자리에 함께할 이유가 없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조차 라이오넬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 최연소라고는 하나 어찌 됐든 평범한(?) 소드마스터에게 따로 묻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크로아티에게는 그를 이 자리에 불러들일 만큼 특별한 능력이 존재했다.

“그자가 지닌 이능을 어둠의 정령력으로 추정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5년 전 이베리아 평야에 있던 인원들이 증언한 바대로라면 일단은 그렇소. 라이오넬이 뿜어낸 검디검은 힘에 짓눌렸다고 하니까.”

“그 추정이 정확했습니다. 그자가 지닌 힘은 어둠의 정령력이 확실합니다.”

지금까지는 라이오넬의 능력에 대해 추정만 가능할 뿐이었다.

물론 이베리아 평야에서 드러난 바가 있으니만큼 상당히 확률 높은 추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추정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지나지 않았다.

오류의 확률이 상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류는 언제든 계획 자체를 망쳐 버릴 수 있었다.

라이오넬과 관련해서는 벌써 두 번이나 그래 왔고 말이다.

한데, 이 추정을 아예 사실로 못 박아 버리는 크로아티였다.

“다른 이들을 간파할 때처럼 명확하게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제 낮은 숙련도 때문인지 아니면 그자가 지닌 능력 때문인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자가 지닌 것이 어둠의 정령력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명확하게 보지는 못했음에도?”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느꼈습니다. 그건 거부감이었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어떤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것 말입니다.”

근거는 본인의 느낌이었다.

그가 느낀 본능적인 거부감.

크로아티는 라이오넬로부터 이것을 받았고, 그렇기에 라이오넬이 지닌 힘은 어둠의 정령력이라는 것이다.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이단과 가이덴은 이렇다 할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눈을 빛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인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크로아티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주친 것만으로도 느껴진다라……, 좋군. 만약 그가 전력을 끌어내는 순간이라면 어떨 것 같소?”

“역시나 확신은 어렵습니다. 다만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소. 라이오넬의 밑바닥은 벤투스 후작이 확실히 긁어내 줄 터. 백작은 그 순간을 절대 놓치지 마시오.”

“예, 폐하. 명을 받듭니다.”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또 하나의 수를 마련해 두는 아이단이었다.

라이오넬의 직접 상대인 크루젠 벤투스 후작만이 다가 아닌 것이다.

장외에는 그랜드 소드마스터 가이덴과 특별한 능력을 지닌 크로아티가 대기할 예정이었다.

오로지 한 가지 목표, 라이오넬의 철저한 해부를 위해.

* * *

나를 향한 관심은 지대했다.

비단 제국만이 아니었다.

각국 사절단들이 골고루 관심을 보내오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최연소 소드마스터라는 사실만으로도 시선을 끌기에는 나름 충분했다.

그런데 그냥 최연소도 아니었다.

압도적인 전공까지 쌓은 최연소였다.

이베리아 영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제국의 개입은 비밀에 부쳐졌으나 상관없었다.

승리는 승리이되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려 30년의 역사를 일단락짓는 승리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면 어느 정도 운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소드마스터이니만큼 실력은 보장되겠으나, 그렇다 해도 상당히 어린 나이였다.

나이를 고려하면 전공 전부가 순수한 실력 덕분이라고 만은 보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난 5년이 완벽하게 잠재워 버렸다.

카르가디아 산맥에서의 5년 말이다.

그렇기에 더는 누구도 내 능력을 의심하지 못했다.

의심 자체가 불가능했다.

전례가 없는 일,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보란 듯이 떡하니 해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를 향한 관심 또한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이 즉위식 후 이어지는 축하 연회에서 여실히 증명되는 중이었다.

일주일로 예정된 연회였으며, 그중 벌써 절반가량이 지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찾아오는 발걸음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시오, 라이오넬 경. 나는 그리안 왕국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라이오넬 경. 저는…….”

“대륙 남부까지 경의 위명이 퍼지고 있소. 그래서 꼭 한번…….”

이만하면 연회에서 도망칠 법도 했다.

귀족의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내 성향이라면 원래 그래야 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연회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인사를 전부 받아 주는 중이었다.

“그리안 왕국의 보루탄 백작님이시군요. 그렇지 않아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보루탄 상단이 왕국에서…….”

레나 때문이었다.

이곳은 제국이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최우선순위는 레나 보호에 있었다.

물론 가능성은 적다고 하지만, 이미 전례가 존재했다.

따라서 레나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레나는 그 누구보다 활발히 사교 활동을 펼쳐 가는 중이었고 말이다.

“그리샴 백작님의 명성 또한 대륙 북부에 적잖이 퍼졌답니다. 왕녀인 제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로 말이죠. 저도 꼭 한번 만나 뵙고…….”

동시에 레나 덕분이기도 했다.

쏟아지는 관심 전부를 레나 홀로 커버했다.

그것도 완벽하게.

내가 할 일이라고는 처음 인사를 받고 몇 마디 나눠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고 나면 레나가 알아서 모든 관심과 대화를 그녀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따라서 레나의 호위 말고는 내가 딱히 신경 쓸 만한 부분이 없었다.

웬 귀족 하나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왕녀님께서 엘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었나요, 지안 백작?”

앙기리스 왕국의 카를로스 지안이라는 자였다.

또, 왕국을 대표하는 상단인 자카럼 상단의 주인이라고도 했다.

다만, 그나 상단의 이름 같은 것은 중요치 않았다.

나로서는 따로 들어 본 적 없는 이름들이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따로 출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왕녀님께서 과거 하이엘프 경매에 관심을 보이셨다고 전해 들었을 뿐인지라…….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범한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카를로스라는 자가 찾아온 대상이었다.

그는 내가 아닌 레나를 찾아왔다.

6년 전 황도 아카데미 재학 시절, 레나는 아인한드라 경매에 관심을 보이는 척했었다.

아인한드라를 구출하고자 하는 내 부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부적으로는 다르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레나가 엘프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카를로스는 이 소문을 접하고 직접 레나를 찾아온 참이었다.

“아, 그런 건 아니에요. 무례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레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대충 얼버무리고는 목적을 되묻는 그녀였다.

“그러시다면 제가 왕녀님께 좋은 선물을 드릴 수도 있을 듯합니다.”

“좋은 선물이라면, 엘프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희 상단이 가까운 시일 내에 갓 잡은 엘프 노예들을 가지고 슈라우드 왕국에 방문할까 합니다. 그걸로 왕국, 그리고 왕녀님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카를로스가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엘프 노예 매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번 되물을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했다.

“노예가 아닌 엘프들은 현재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아는데, 갓 잡았단 말인가요? 어떻게……?”

“저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것들이 북방 극지대에 숨어 있었지 뭡니까? 그러니 사라진 것으로 보일 수밖에요.”

“설령 그렇다 해도, 북방 극지대에 숨어 있는 엘프들을 무슨 수로 잡아들인다는 것인지?”

“그 부분은 저희 상단만의 비밀인지라 말씀드리기가 다소 곤란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저희가 싱싱한 엘프를 확보할 수 있고, 이를 왕녀님께 제공해 드릴 수 있다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자가 레나와의 거래를 위해 들고 온 품목.

그 품목이 엘프라는 사실, 그것도 북방 극지대로 도망친 엘프라는 사실이었다.

이 말인즉슨, 아인한드라가 이끄는 겨울바람 일족에 무언가 변고가 생겼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겠군요.”

“예, 그런 겁니다. 우선 제국에 먼저 들르겠지만, 제가 특별히 왕녀님을 위해 몇은 빼 두도록 하겠습니다.”

“백작의 배려에 감사를 표합니다.”

“감사라니요. 그저 왕녀님과 우호를 다지고 싶은 마음에 드리는 작은 선물일 뿐입니다.”

물론 단순한 선물일 리 만무했다.

최근 슈라우드는 최상급 몬스터 부산물을 시장에 내놓고 있었다.

그리핀 군단의 활약 덕분이었다.

카르가디아산 이상 가는 몬스터 부산물은 대륙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를 지난 5년간 실크로 상단이 꾸준히 가공하여 판매해 왔지만, 아직도 남은 양은 산더미 같았다.

그리핀 군단이 워낙 미친 듯이 사냥을 이어 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냥 속도가 급증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레나의 관리하에 있다는 점은 개나 소나 다 아는 사실.

하여 카를로스가 레나를 찾아온 것이다.

정식으로 거래를 트기 위해서.

이어지는 대화 내용은 점차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거절할 수가 없겠네요. 저 역시 백작의 자카럼 상단과 우호적인 관계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니까요. 그럼 언제쯤 방문할…….”

레나는 이를 적절히 받아넘겼다.

하나,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한 번씩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인한드라에 대한 염려를 담고서.

끄덕.

이에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무래도 군단장 자리를 꽤 오래 비워 두게 될 듯싶었다.

이번 제국행이 나에게 적잖은 숙제를 안겨 주었다.

덕분에 대륙 이곳저곳을 쏘다니게 생긴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당장 코앞에 닥친 황제의 계략부터 망쳐 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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