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95화 (96/200)

54장: 라인하트 영지(2)

“6년 전과는 다를 겁니다, 아버지.”

다이너에게 에릭스 브란부르크는 참으로 복합적인 존재였다.

그의 부친이자 스승이며, 동시에 평생의 우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오직 에릭스의 등만을 좇으며 성장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벽이기도 했다.

평생을 에릭스의 그늘에 갇혀 살 작정이 아니라면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다이너는 생각했다.

오늘이 에릭스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날이라고.

우상이자 벽을 동등한 위치에서 응시하고 있는 오늘이야말로 바로 그날이라고 말이다.

하여 영지 도착 후 가벼운 인사를 마친 뒤 에릭스와 따로 자리를 마련한 참이었다.

이곳 연무장에서.

“그래, 기대해 보마.”

에릭스는 이런 다이너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보였다.

그리하여 두 부자는 현재 검을 뽑은 채 서로를 마주 보는 중이었다.

“으음,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다만, 그 기색은 정반대였다.

진지해질 대로 진지해진 상태의 다이너와 달리, 에릭스에게서 심각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6년 전 마지막 대련 때보다 더 여유 넘치는 모습이었다.

에릭스는 숫제 가벼운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적어도 검을 쥐고 있는 순간만큼은 한 번도 내비친 적 없던 그런 미소를.

“저도 익스퍼트의 끝에 올라선 상태이니까요.”

그래서였다.

처음부터 경지를 밝히고 들어가는 다이너였다.

원래는 검을 섞으며 자연스럽게 공개할 계획이었다.

그편이 아무래도 좀 더 극적이고 심어 주는 인상도 한층 깊어질 테니까.

하지만 다이너는 이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에 없이 여유로운 에릭스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러다 자칫 이 대결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싱겁게 끝날지도 모르는 일.

그런 불상사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다이너였다.

해서 아예 처음부터 경지를 밝힌 것이다.

혹시라도 방심 같은 어이없는 이유가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가 아는 에릭스라면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그래도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만큼 이 대련은 다이너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고생 많았다. 네 나이를 고려한다면, 이 아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발전 속도구나.”

“예……?”

하나, 이에 대한 반응 또한 다이너의 예상과는 달랐다.

검에 있어서만큼은 에릭스로부터 칭찬이란 걸 받아 본 기억이 없는 다이너였다.

그런데 지금, 생전 처음으로 그 칭찬이란 것을 받은 참이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당황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 더 시간 끌 필요도 없겠지. 어디 한번 직접 확인해 보자꾸나.”

반면, 에릭스는 태연했다.

다이너의 경지를 미리 알게 됐음에도 그의 태도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동시에 다이너를 컨트롤하는 그였다.

충분히 인지했으니 이제 입으로 그만 떠들고 얼른 들어오라는 것이다.

다이너가 당황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아, 괜한 탐색전 같은 건 펼치지 말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들어오거라. 어차피 네 입으로 경지도 밝힌 참이니.”

“……예.”

다이너가 원래 그렸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진지하게 시작된 대결의 와중에 자연스럽게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에릭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말이다.

무려 우상이자 평생의 벽과 대등하게 마주하는 날이었다.

이 정도 그림은 연출되어 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착 펼쳐진 상황은 그가 그린 그림과 영 딴판이었다.

상황을 주도하기는커녕 이상하게 끌려다니는 중이었다.

그 원인은 에릭스의 묘한 여유로움.

그렇다면 주도권을 되찾아 오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힘으로 이 여유로움을 깨뜨리는 것밖에 없었다.

구우우웅~

다이너의 검 위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징표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유형화의 경계에 걸쳐 있는 오러의 실, 하나의 검으로 완성되기 직전의 단계, 바로 검사였다.

처음부터 전력을 꺼내 든 것이다.

에릭스의 말대로였다.

이렇게 된 이상 탐색전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구우우웅~

이에 맞춰 에릭스 또한 그의 검 위로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익스퍼트 최상급의 징표인 검사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힘과 힘의 정면충돌.

“갑니다.”

충돌 직전, 시작을 알리며 다이너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비록 과정은 조금 틀어졌을지언정 결과만큼은 원래 계획대로 도출해 내겠다고.

오늘을 반드시 그의 인생에 있어 기념비적인 날로 만들 작정이었다.

평생의 우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런 날 말이다.

파앗!!

다이너는 이런 다짐과 함께 전력을 다해 짓쳐 들었다.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는 에릭스를 향해.

그의 여유로움을 놀라움과 경악으로 뒤바꿔 놓고자.

그렇게 두 부자의 대결이 시작됐다.

콰과광~!!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꿈틀꿈틀.

다이너의 다짐은 일정 부분 현실이 되었다.

놀라움과 경악이 도출되고야 만 것이다.

단, 그 주체는 다이너의 다짐과 달랐다.

놀라움과 경악의 주체는 에릭스가 아니었다.

다이너 본인이었다.

검면에 흠씬 두들겨 맞은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다이너 본인.

“……미리, 크윽.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어디가 덧납니까?”

“어차피 검을 섞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인데, 입 아프게 말로 해서 무엇 하느냐?”

반면, 에릭스는 여전했다.

여전히 태연했으며, 여유로운 미소 또한 그대로였다.

결국, 다이너는 에릭스의 무엇 하나 바꿔 놓지 못한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시도 자체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내가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 줬다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랬다.

에릭스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최상급이든 뭐든 소드 익스퍼트로서는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그런 경지에.

이로써 모든 것이 설명됐다.

소드마스터라는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

전에 없던 여유와 뜬금없는 칭찬 모두 그 이유 하나면 납득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럴 만한 경지였고, 그래도 되는 경지였다.

소드마스터라는 경지는.

“그래도 언질 정도는……. 에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 넘어서신 겁니까?”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일주일 째니.”

“정말 얼마 안 되셨네요.”

“표정이 어째 떨떠름해 보이는구나.”

“아니 뭐, 그냥 좀…….”

그렇기는 했다.

솔직히 좀 떨떠름한 다이너였다.

오늘을 기념비적인 날로 만들겠다며 잔뜩 별러왔다.

한데, 그런 다짐들이 전부 뻘짓이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혼자 신나서 설레발 친 꼴이 됐다.

무려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말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민망함은 덤이었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떨떠름하기는 해도 이건 진심입니다.”

“고맙다. 그리고 네 녀석도 축하한다. 나도 진심이다.”

“축하요? 저 말입니까?”

“그래. 다이너, 네 녀석.”

한데, 갑자기 역으로 뚱딴지같은 축하를 건네오는 에릭스였다.

물론 다이너의 경지 또한 축하받을 만한 일이기는 했다.

고작 26살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만, 그 축하를 소드마스터에 오른 지 일주일 된 사람이 건네는 것은 좀 애매했다.

자칫 놀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결혼 축하한다.”

“……???”

당연히 에릭스의 축하는 그런 쪽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다이너가 에릭스에게 건넨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의 축하였다.

나아가 다이너의 떨떠름함, 민망함 따위를 단번에 날려 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대련 결과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을 안겨 줌으로써 말이다.

“너 내일모레 결혼한다, 다이너.”

* * *

무려 로만 제국 황도에서 1년을 지낸 경험이 있는 나였다.

덕분에 잘나고 예쁜 여자들은 수도 없이 봐 왔다.

즉, 심미적인 기준이 나름 상당히 높은 편인 것이다.

따라서 웬만큼 예쁜 것으로는 내 눈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더욱이 나는 대상의 본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외적인 것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 자체가 현저히 낮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외적인 것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의 모습이 단번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 누군가란 바로 에일린.

웨딩드레스를 입은 친동생의 모습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에일린은 아름다웠다.

객관적인 기준이고 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환한 미소와 함께 버진로드를 가로지르는 에일린만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보내기 아까울 만큼 너무나도 예뻤으니까.

그래서였다.

다이너가 한층 더 못마땅해진 것은.

나사가 열 개쯤은 빠진 듯한 웃음을 짓고 있는 녀석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세상에 둘도 없이 귀한 보물을 도둑맞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제 다이너를 전처럼은 다룰 수 없었다.

에일린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눈꼴신 감정을 과하게 실었다가는 에일린이 나를 잡아먹으려 들 터.

또, 비단 에일린의 감시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제 정식으로 내 동생의 하나뿐인 남편이 된 다이너였다.

그렇다면 나 또한 녀석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었다.

하여 앞으로는 에일린의 말대로 딱 필요한 만큼만 굴릴 생각이었다.

정말 딱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만.

물론 그것만으로도 다이너에게는 절대 쉽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에일린과 다이너는 오늘 그렇게 결혼식을 올렸다.

정오에 있었던 본식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으며, 지금은 파티가 한창이었다.

아니, 파티가 아니었다.

축제였다.

라인하트 영지 전체의 축제.

모든 영지민이 에일린의 결혼을 축하하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성년도 안 된 어린 나이부터 살뜰하게 영지 살림을 챙겨 온 에일린이었다.

모두가 그런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덕분에 라인하트 영지는 축복과 기쁨, 즐거움의 감정과 웃음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단 한 곳만을 제외하고.

그 한 곳은 영지 외곽이었다.

영지 외곽의 그리핀 군단 임시 주둔지 말이다.

“당분간은 다이너가 정신이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신경 좀 써 줘, 바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서포트 하겠습니다. 그보다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그러려고. 왕녀님께서 기다리시는 중이니까.”

내가 바비에게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그리핀 군단 통솔에 관한 지시였다.

나는 내일 아침 카오를 타고 홀로 왕도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이베리아 영지까지 군단을 통솔해 줄 군단장 대리가 필요했다.

물론 부군단장인 다이너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다이너는 오늘 막 결혼식을 올린 참.

신혼의 달콤함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하여 바비에게 지시를 내려 놓는 것이다.

바비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만한 인재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뭘 부탁할지는 말 안 해도 알지?”

“……예, 군단장님.”

바비에게 시킬 것은 군단 관리만이 아니었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리고 이 한 가지 때문이었다.

지금 이곳이 축제가 한창인 중심가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크으읍…….”

“음? 점점 내려가네.”

축축했다.

그리고 끈적끈적했다.

물론 매우 좋지 못한 의미로.

비 오듯 흐르는 땀과 육신의 고통이 유발하는 신음.

이런 것들이 만들어 낸 축축함과 끈적함이었기 때문이다.

“크읍, 죄송…… 합니다.”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나 보지?”

“아,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모양인데? 무릎이 자꾸 내려가. 그러다 닿겠어.”

땀과 신음의 주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리핀 군단은 물론이고 라인하트 영지 전체를 통틀어도 딱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입을 싸게 놀린 놈, 그리하여 현재 나와 개인적인 면담 시간을 가지는 중인 바로 그놈.

레몬드뿐이었다.

“흐으읍!!”

내 지적에 레몬드가 기합을 내뱉었다.

자꾸만 굽혀지는 무릎을 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다시 무릎을 펴 낸 것이다.

비록 덜덜 떨고는 있지만, 어쨌든 자세를 회복한 레몬드였다.

일명 ‘대가리 박아’라 불리는 어떤 체위의 정자세를 말이다.

“오호, 아직 힘이 남아 있었네. 그런데 왜 그랬어?”

“죄, 죄송합니다.”

물론 그 이유야 너무나도 자명했다.

정오에 진행된 결혼식 본식이 끝난 직후부터였으니까 벌써 8시간째였다.

8시간째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천인장이 되며 주어진 갑옷까지 착용한 채로.

꼼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철저한 감시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무려 그리핀인 카오의 감시였다.

허튼 꼼수 따위가 허용될 리 만무했다.

따라서 육체적인 한계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다.

레몬드가 아무리 소드 유저라지만, 이쯤 되면 마나고 체력이고 배겨 낼 재간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정신력 하나로 버티는 중이었다.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냐니까?”

“아닙니다!”

“아닌데, 왜 그랬지?”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아직 버틸 정신력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전부가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더 털어도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여 오늘은 아예 탈수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내일부터는 내가 자리를 비워야만 하는 상황이니만큼 더더욱 철저하게.

바비에게 맡긴다지만, 내가 직접 하는 것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죄송…… 크읍, 합니다.”

“죄송하다면서 또 내려가네. 일종의 명령 불복종 같은 건가?”

“아, 아닙…….”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모두의 군 생활이 그러하듯 무한히 반복될 예정이었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고통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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