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 5년(2)
5년 전, 그리핀 군단은 카르가디아 산맥에 입산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5년을 주둔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기적이라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간단한 주둔조차 전례가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최장 주둔 기록은 기껏해야 2개월하고도 보름가량에 불과했다.
그리핀 군단의 그것과는 비교할 깜냥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핀 군단이 세운 기록의 의미는 단순한 주둔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리핀 군단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쉬지 않고 산맥을 쓸고 다녔다.
입산 목적 그대로 카르가디아 산맥을 청소하고 다닌 것이다.
이 기록의 진짜 의미는 바로 여기 있었다.
물론 몬스터의 씨가 말라 버린다든가 하는 드라마틱한 결과가 도출되지는 않았다.
그런 쪽과는 거리도 멀었다.
다 해서 5,000도 안 되는 병력이었다.
5년이 지난 현재는 2,000을 가까스로 넘기는 수준에 불과했고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일개 군단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이런 병력으로 카르가디아 산맥 몬스터의 씨를 말린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괜히 몬스터의 천국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핀 군단의 업적은 누구도 폄하할 수 없었다.
심지어 크리스토퍼조차도 이 부분만큼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몬스터의 씨를 말리지는 못했어도, 몬스터들이 슈라우드로 향하는 것만큼은 완벽에 가깝게 막아 냈기 때문이다.
바르코스 요새가 단적인 예였다.
그리핀 군단이 입산해 있는 동안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피해가 1/10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과도 같은 업적이 곧 징표였다.
그리핀 군단이 지닌 강력함의 징표.
동시에 레나가 지닌 군사적 기반의 강력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레나는 탄탄하고도 강력한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사람들이 가져다준 성과를 기반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져 왔다.
제3의 세력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특히 구심점이 부재한 남부의 하급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레나의 손을 잡았다.
더불어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북부 역시 레나에게 호의적이었다.
바르코스와 라인하트의 우호적인 관계가 레나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여기에 가장 세가 큰 중부의 귀족들 역시 조심스레 간을 보는 중이었다.
친동생인 2왕자 드로튼 카드까지 쥐고 있는 만큼 대안 세력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
이만하면 3왕자 측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고 볼 수 있었다.
“너 감히…….”
“왕자님, 대전입니다.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따라서 레나는 더 이상 일개 왕녀로 치부할 수 없었다.
크리스토퍼가 무작정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존재가 아닌 것이다.
정기적인 대전회의에 레나가 참석한다는 점, 크리스토퍼의 흥분을 슬런트 바로움 후작이 얼른 나서서 자제시키는 점 등이 그 방증이었다.
“그렇지만 왕녀님, 왕자님의 말씀이 다소 거칠기는 할지언정 꼭 틀렸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슬런트 바로움이라고 해서 이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었다.
그가 흥분한 1왕자를 대신하여 좀 더 정제된 언어로 반박을 가해 왔다.
“다른 왕국들은 최소 후계자급이 대표를 맡습니다. 그런데 우리 슈라우드만 다른 행보를 보인다면 왕국의 위신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대륙 각국의 비웃음을 사게 되겠지요.”
“비웃음이라…….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현재 우리 슈라우드의 내부 사정상 감수해야 하는 부분 아닐까요?”
“감수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요.”
“물론 피하는 것이 상책이기는 한데,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 드리는 말씀이랍니다. 우리 왕국에는 현재 정해진 후계자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흔들릴 레나가 아니었지만.
레나가 시선으로 한 방향을 힐끗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아직 경쟁이 한창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대표로 가게 되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까요?”
레나가 가리킨 방향에는 이 경쟁의 또 다른 한 축이 서 있었다.
3왕자 길리언 바이나프 슈라우드와 그의 배경인 서부 귀족 세력.
동시에 그들은 레나의 말에 대놓고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형평성 문제를 고려한다면 중립에 서 있는 제가 가는 편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는데, 아닌가요? 적어도 후계 문제에 있어 괜한 오해는 사지 않을 테니 말이지요.”
레나와 3왕자가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3왕자도 턱밑까지 올라온 레나가 달갑지 않을 터였다.
하나, 지금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3왕자 입장에서 최악은 1왕자가 사절단 대표로 제국에 가는 시나리오.
이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인 레나의 입지 향상을 묵인하는 것이다.
어찌 됐든 3왕자가 최종적으로 무찔러야 할 적은 왕녀 레나가 아닌 1왕자 크리스토퍼였으니까.
“그건…….”
“비단 형평성 문제만이 아닙니다. 사실 형평성은 부차적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보다 더 직접적인 능력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
더구나 레나가 가야 하는 이유는 3왕자 말고도 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레나가 사절단의 대표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경.”
라이오넬이었다.
이번 즉위식에 라이오넬의 참석은 불변의 상수인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라이오넬 경은 제국에 유감이 많습니다. 실제 전적도 있고요. 그냥 뒀다가는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데, 하필이면 제국에서 그를 콕 집었네요. 즉위식 기념 경연에 꼭 참가해 달라고.”
아이단이 그를 콕 집었기 때문이다.
즉위식을 기념하여 열리는 경연의 참가자로서.
물론 그 목적 자체가 뻔한 경연이기는 했다.
5년 전 라이오넬이 선보인 정체불명의 힘에 대해 파악하고자 하는 것일 터.
라이오넬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지명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만 제국 황제의 즉위식을 기념하여, 아이단의 이름으로 개최되는 경연이었다.
불참이라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 자체가 불가했다.
즉,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즐기기라도 해야 하는 법.
그 속에서 얻어 낼 것은 최대한 얻어 낼 심산의 레나였다.
“그러니 후작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1왕자에게 라이오넬 경을 컨트롤 할 능력이 있다고 보시나요? 만약 진심으로 그리 여기신다면 제가 깔끔하게 포기하지요.”
“…….”
슬런트 바로움은 대답하지 못했다.
크리스토퍼가 라이오넬을 컨트롤 한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레나가 이렇게까지 성장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결국, 크리스토퍼를 대신하려던 그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 미치지 않고야 라이오넬이 제국에서 또 사고를 쳐? 억지스러운 핑계 대지 마라. 그리고 정 그렇게 라이오넬 통제가 걱정이거든 네가 내 밑에서 제국으로 가면 될 일이야.”
그러자 다시금 전면에 나서는 크리스토퍼였다.
“아, 그러고 보니 라이오넬 경이 꼭 전해 달라던 한마디가 있었네요.”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사절단에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면 정말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제국으로 오가는 길이 짧지는 않다 보니, 그 길 위에서 한 번은 무조건.”
“뭐……?”
“산맥에 오래 머물러서 그런지 감정 조절이 쉽지 않답니다. 물론 누구 얼굴이라고 콕 집어 말한 건 아니지만.”
세력이 배제된 상태의 크리스토퍼는 레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는 태어난 직후부터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불변의 진리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저를 따르는 귀족들과 그리핀 군단을 대표하여 선언합니다. 수장으로서가 아니라면 저는 절대 사절단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지금 이 순간에도 완벽하게 적용되는 중이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