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 5년
“캬아아악~!”
와이번이 포효했다.
날개까지 있는 대로 활짝 펼친 채였다.
자기가 이렇게 크고 웅장한 존재라는 것을 뽐내기라도 하는 모양새.
이런 와이번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놈, 원래 이렇게 작았었나?
기억 속의 놈은 이보다 훨씬 더 크고 흉폭하며 위협적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날개 끝이 덜덜 떨려올 만큼.
어미를 가지고 놀다시피 하던 때의 놈이 풍기던 존재감과 위압감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떠돌이 수컷 와이번의 위용은 분명 그러했다.
그래서 카오는 이곳까지 찾아오며 나름의 각오를 다진 참이었다.
“…….”
그런데, 그랬던 시간 자체가 허무해졌다.
놈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극복하고자 각오를 다졌던 시간 전부가.
다시 마주한 놈은 기억 속의 모습과는 천지 차이였다.
왜 이렇게 작고 초라하며 볼품없단 말인가?
이건 뭐 맞대응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해서 울부짖는 놈을 그냥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캬, 캬아아악……!”
격차를 느끼기는 놈도 마찬가지였다.
울부짖음 속에 느껴지는 떨림이 그 증거였다.
놈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지르는 포효는 그저 발악에 불과했다.
자신이 압도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겨 보고자 하는 처절한 발악 말이다.
카오는 이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미 한번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과거 이놈을 마주했던 어미가 딱 이런 모습이었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있는 대로 울부짖었다.
카오를 등 뒤에 숨긴 채로.
따라서 매우 익숙할 수밖에 없는 광경인 것이다.
빙글.
다만, 이어지는 광경은 그렇지 못했다.
전혀 익숙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포효 뒤 와이번이 보인 모습은 어미의 그것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놈은 제 몸을 빙글 돌렸다.
퍼덕퍼덕~
그러고는 필사의 날갯짓을 시작했다.
카오를 등진 채로 말이다.
즉, 사투를 선택했던 어미와 달리 놈은 도주를 선택한 것이다.
퍼덕퍼덕퍼덕~
이해는 되는 바였다.
놈에게는 죽은 어미와 달리 카오 같은 짐 덩어리가 없었으니까.
또, 본능적인 감이 뛰어난 놈이기도 했다.
과거 주인의 영역에는 발도 들이지 않은 채 도망쳤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도주라는 선택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단지 우스울 따름이었다.
고작 이런 놈에게 잔뜩 겁을 집어먹었었다는 사실이.
그랬던 과거가 카오 스스로 좀 부끄럽기도 하고 말이다.
파앗!!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마저 잊지는 않았다.
뭐가 됐든 여기까지 온 이상 마무리는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뇌리에 각인됐던 공포는 놈을 마주한 순간 해소됐지만, 어미에 대한 복수는 아직 남아 있었다.
또, 어차피 힘든 일도,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해서 놈을 뒤쫓았다.
쐐애액~
그리고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체급은 물론 속도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놈의 등 위를 점한 상황.
이 또한 익숙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에도 카오와 놈은 이런 광경을 연출한 적이 있었으니까.
단, 그때는 위치가 이와 반대였다.
카오는 주인을 향해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으며, 놈은 그런 카오를 등 위에서 여유롭게 내려다봤었다.
한데, 지금은 정반대의 입장에 놓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왕 이렇게 된 거 카오는 다음 광경 또한 그때와 비슷하게 만들기로 했다.
화아악~
퍼걱!
당시 카오는 등에 와이번의 발길질을 한 대 얻어맞았었다.
놈은 장난삼아 한 대 툭 친 것에 불과한 그런 발길질이었다.
하나, 카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타격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를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와이번이 그러했던 것처럼, 장난삼아 한 대 툭.
물론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당시 카오는 덜 여문 새끼에 불과했다.
반면, 지금의 놈은 완연한 전성기의 성체 와이번이었다.
타격을 받아들이는 조건 자체가 달랐다.
“캬아아아악!!!”
그런데, 실제는 또 그렇지가 않았다.
확연한 조건의 차이와 달리 실제 펼쳐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오의 발톱이 훑고 간 직후 터져 나오는 것들은 그때와 비슷했다.
피분수, 그리고 처절한 비명.
과거의 카오에게서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현재 와이번에게서도 마찬가지로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휘우우웅~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이 결과 또한 비슷했다.
카오가 그랬던 것처럼 놈도 타격 후 비행 유지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쿠구궁!!
지면과 충돌했다.
커다란 굉음을 유발하면서.
사라락.
그런 와이번을 따라 사뿐히 착지하는 카오였다.
위치는 대자로 뻗은 놈의 정면.
그리하여 다시금 놈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캬아…….”
잔뜩 겁에 질린 눈빛이었다.
물론 오늘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두려움에 떨기는 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닌 척, 겁먹지 않은 척 숨기려고 노력은 하던 놈이었다.
하나, 이제는 그런 노력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따위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간절함까지.
카오의 자비를 바라는 간절함이 눈빛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누가 보면 카오가 무고한 와이번을 이유 없이 괴롭히기라도 하는 모습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척.
“캬, 캬아아…….”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다고 흔들릴 카오가 아니었다.
놈의 목덜미에 발을 올렸다.
그러고는 움켜쥐었다.
애초에 카오의 어미를 죽인 놈이었다.
어설픈 자비 따위를 베풀 이유도 없었거니와, 그런 걸 배운 적도 없었다.
그간 주인의 옆에 찰떡같이 붙어 다녀온 카오였다.
그런 카오의 눈에 비친 주인은 칼 같은 인간이었다.
주인의 사전에 어설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예 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시작한 상태라면 끝을 보고야 마는 그였다.
그리고 카오는 이런 주인을 닮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 왔다.
덕분에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자비를 베풀어 이 와이번을 살려 준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이곳을 다시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
시작했으면 깔끔한 마무리는 필수였다.
와이번의 애처로운 울음 따위 카오가 알 바 아니었다.
콰드득.
움켜쥔 발에 힘을 가했다.
그리하여 단숨에 목덜미를 부숴 버렸다.
망설임 따위는 눈곱만큼도 품지 않은 채로.
그렇게 모든 것을 종결지었다.
와이번의 목숨과 어미의 복수, 그리고 각인된 트라우마까지 전부 한 방에.
배운바 그대로의 아주 깔끔한 마무리였다.
“…….”
마지막까지 포효 같은 건 내뱉지 않았다.
그럴 가치조차 없었다.
포효가 아까울 만큼 쉽고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대신 절명한 와이번의 사체를 한번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펄럭~
그러고는 가볍게 날아올랐다.
날아올라 와이번의 영역이었던 곳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지금은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이 영역.
야생의 법칙대로라면 카오가 이 영역의 새로운 주인이 돼야 했다.
하지만 카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카오에게는 이미 그만의 영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영역 따위 철저히 카오의 관심 밖이었다.
공중에서 한번 스윽 훑는 것이 다였다.
그런 뒤에는 미련 없이 방향을 선회했다.
너무나도 확고한 그만의 영역을 향해서.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왔구나.”
이내 카오는 그만의 영역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그만의 영역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 영역은 익숙하다는 듯 카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고 말이다.
이에 대한 카오의 기분 좋은 하울링은 덤이었다.
“카오오~”
주인이 곧 카오의 영역이었다.
주인의 옆 말고 다른 영역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의 옆에서 카오는 더할 나위 없는 포근함과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런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 왔으며, 지금도 커 가는 중이었다.
산맥에 들어온 뒤 확장을 거듭해 온 주인의 존재감과 함께.
따라서 앞으로도 카오가 주인의 곁을 떠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오히려 어떻게든 더 달라붙기 위해 노력한다면 모를까.
영역으로 복귀하며 카오가 한 일 또한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고 말이다.
“녀석아, 적당히 몰고 왔어야지.”
역시나 주인은 그런 카오의 노력을 단번에 알아봐 주었다.
그렇기에 한층 더 기분이 좋아진 카오였다.
물론 카오도 느끼고 있기는 했다.
와이번의 영역은 상당히 넓었고, 그러다 보니 그 안에 있던 몬스터들을 좀 많이 몰고 오기는 했다.
그렇지만 딱히 신경은 쓰지 않았다.
“몬스터 출현! 전투 준비!”
“종 구별 없어. 그냥 떼거지로 몰려온다!”
“X발, 또?? 밥 좀 먹자, 밥 좀! 어떻게 5분을 안 주냐!!”
잡것들이야 어차피 주인의 또 다른 권속들 몫이었기 때문이다.
또, 저들의 반응이 어떠한지 따위 역시 철저히 관심 밖이었다.
지금 이 순간, 카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주인의 손길뿐이었으니까.
“카오오~”
그렇게 카오는 자신이 몰고 온 난리통에는 완전히 신경을 껐다.
다시 한번 기분 좋은 하울링과 함께 주인의 부드러운 손길만을 즐길 뿐이었다.
* *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절대 인정 못 합니다.”
회의가 한창인 와중 강하게 고개를 젓는 크리스토퍼였다.
지금 논의 중인 안건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를 표명하고 나선 것이다.
“계승권 1위인 제가 버젓이 존재하는 마당에 일개 왕녀 따위에게 대표를 맡긴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말씀하시는 부분도 이해는 됩니다만, 왕자님께서도 상황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사정상 황제 즉위식 사절단은 왕녀님께서 맡으시는 편이 적합해 보입니다.”
이에 내무 대신인 아이르만 다스더 백작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의 반대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극렬해졌다.
“적합하다니요? 슈라우드 왕실의 법도와 질서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두고 어떻게 적합하다는 말이 나온단 말입니까?”
왕국의 중대사를 결정짓는 대전회의였다.
주요 대신들이 모두 집합한 공식 석상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가는 중이었다.
바람직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또 무작정 그를 나무라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안건이 안건이었기 때문이다.
로만 제국의 황제 즉위식 날짜가 정해졌다.
바로 이 즉위식의 사절단 대표를 정하는 것이 오늘의 안건이었다.
그리고 레나가 그 대표로 정식 거론된 참이었다.
심지어 단순한 거론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까지 했다.
크리스토퍼의 극렬한 반대는 그래서였다.
다른 일도 아니고 로만 제국 황제의 즉위식이었다.
각국의 이름난 실력자들이 축하사절로 한자리에 모이는 대륙급 행사인 것이다.
이런 자리에 대표로서 참석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슈라우드의 후계자임을 천명하는 셈이었으니까.
크리스토퍼로서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자리임이 당연했다.
한데, 지금 그런 중요한 자리를 레나가 가져갈 판이었다.
1왕자이자 계승권 순위 1위인 그를 제치고 말이다.
이러니 미치고 팔짝 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백작께서 곤란해하고 계시네요. 애꿎은 분 그만 곤란하게 만들고, 저랑 직접 얘기하시죠?”
물론 어디까지나 크리스토퍼의 사정에 불과했다.
레나는 크리스토퍼의 사정 따위 쥐똥만큼도 고려해 주지 않았다.
애초에 크리스토퍼부터가 레나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수프에 말아 먹은 놈이었다.
그런 놈을 고려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개 왕녀 따위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입 다물고 있어.”
“글쎄요, 그리 여기는 건 아무래도 1왕자 혼자뿐인 듯하네요. 사절단 대표로 거론되는 건 저이니만큼, 입은 오히려 1왕자가 다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 그래야 할 입장과도 거리가 멀었다.
지난 5년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이베리아 전쟁이 슈라우드의 승리로 끝난 지도 벌써 5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 시간 동안 레나의 입지는 수직 상승한 상태였다.
레나는 현재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자리매김한 이베리아 영지의 실질적 주인이었다.
사네와 마검학연 출신 인재들이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덕분에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나아가 레나의 군사적 기반은 탄탄한 수준을 넘어섰다.
강력했다.
단일 전력으로는 슈라우드 내 최강이라 봐도 무방했다.
지난 5년간 써 내려온 그리핀 군단의 역사가 이를 뒷받침했다.
카르가디아 산맥 청소.
군단은 이 전례 없는 대역사를 통해 그 힘을 만방에 증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