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장: 선별 작업
바이젠 북부군 소속 정예병인 우다크.
그는 슈라우드와의 전쟁에 벌써 세 번이나 참전한 베테랑 군인이었다.
복무 경력을 인정받아 십인장의 직위까지 맡은 그였다.
물론 이제 와서는 다 쓸모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지만.
바이젠 군으로서 그의 참전 이력은 세 번째가 마지막이 됐다.
더불어 십인장이라는 직위 역시도.
졌기 때문이다.
바이젠 군은 슈라우드의 돌진을 막지 못했고, 결국 왕세자를 내주고 말았다.
그리하여 슈라우드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버려졌다.
바이젠 왕국이 우다크를 비롯한 병사들 전부를 버린 것이다.
왕국은 왕세자와 귀족, 기사들만 챙겨 갔다.
천문학적인 몸값과 배상금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버려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연히 배신감이 들었다.
그간 바이젠 왕국을 위해 헌신한 것이 얼마인데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림받는단 말인가?
동시에 깊은 절망과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이대로면 그의 처지는 한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왕국의 정규군에서 노예로의 전락.
비루하고 비참한 삶이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특히 가장 참담하고 절망스러운 부분은 바로 가족이었다.
앞으로는 가족들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실만큼은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다.
함께 잡혀 있는 동료 중에는 이 사실에 탈옥을 감행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우다크 역시 그것을 계획 중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변수가 발생했다.
슈라우드의 포고였다.
포로 처분에 관한 슈라우드의 의지가 담긴 포고.
이것이 우다크의 탈출 계획 자체를 뒤집어엎었다.
포로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노예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슈라우드 군에 입대하는 것.
그리고 10년간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것.
이게 다였다.
물론 10년간 의무 복무라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터였다.
우다크를 비롯한 포로들은 전부 슈라우드의 적국인 바이젠 출신이었다.
최전방 혹은 최악의 험지에 배치되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할 것이 분명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더 길게 느껴질 터.
하지만 어떤 거지 같은 곳이라 하더라도 노예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더구나 슈라우드에서는 달콤한 보상까지 약속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성실한 복무 태도와 성과, 슈라우드어 습득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단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재로서는 감지덕지했다.
무엇보다 우다크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슈라우드가 제시한 조건들을 그 누구보다 빠르고 완벽하게 이행할 수 있다는 자신 말이다.
우다크는 슈라우드어 구사가 가능했다.
그가 이베리아 영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상황들이 겹치며 바이젠의 군인이 되기는 했지만, 출생지와 유년 시절을 보낸 곳만큼은 분명 이베리아 영지였다.
덕분에 다소 어눌하기는 해도 슈라우드어로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 망설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품지 않은 채 곧바로 입대를 신청한 우다크였다.
“……이보시오, 레몬드.”
“왜 그러나?”
“설마 이게 다요? 그냥 이렇게 신청만 하고 끝?”
그런데 신청 직후였다.
신청 전에는 없던 망설임이나 꺼림칙함 같은 것이 오히려 신청 직후 피어올랐다.
지나치리만치 간단했기 때문이다.
그냥 신청 의사를 밝히고, 데리고 올 가족들의 신상명세를 읊은 게 다였다.
한 20초쯤 걸렸으려나?
그 20초 만에 우다크의 국적 및 소속 이동 절차가 완료되었다.
순식간에 바이젠 군인에서 슈라우드 군인이 된 것이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국적 변경 절차도 이리 간단하지는 않을 터.
하여 우다크는 방금 접수 및 절차를 마무리한 이에게 물었다.
레몬드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자칭 라이오넬 라인하트의 오른팔로서 입을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인물이기도 했다.
덕분에 포로임에도 슈라우드어 구사가 가능한 우다크와 이미 안면을 튼 상태였다.
슈라우드 북부 출신이기에 바이젠에 대한 앙심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어쨌든 그런 레몬드에게 물었다.
정말 이게 다냐고, 이게 끝이냐고 말이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자네 스스로 입대 의사 밝혔고, 가족들 신상명세도 전부 말했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간단하지 않소? 명색이 적국의 군인을 받아들이는 일인데…….”
“그러니까 자네 말은 왜 사상검증이나 테스트 같은 건 거치지 않느냐는 거지?”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렇지 않소? 이렇게 막무가내로 받아들였다가 무슨 사고라도 치면 어쩌려고?”
더 밝히고 소명하거나 테스트를 보는 과정이 필요했다.
적국 출신의 일개 병사인 우다크가 보기에도 그러했다.
이렇게 개나 소나 다 받아들였다가는 사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렇다 보니 신뢰도가 뚝 떨어졌다.
이건 뭐 그냥 전장의 화살받이를 받는 수준만도 못했으니까.
망설임이나 거리낌 따위가 피어오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 않아.”
“……?”
“그렇지 않다고. 그럴 필요가 없거든. 사고? 장담하는데 절대 못 쳐. 사고를 치겠다는 생각조차 못 할 거야. 편하게라도 죽고 싶다면 말이야.”
한데, 슈라우드 측은 이런 부분에 대해 계획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확신에 가득 찬 레몬드의 조소가 이를 방증했다.
“……물론 라이오넬 라인하트 경이 대단한 건 알고 있소.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지, 내가 직접 눈앞에서 겪어 봤으니까.”
우다크 또한 그 이유에 대해 짐작은 하는 바였다.
라이오넬을 믿는 것일 터.
그럴 만하기는 했다.
그가 직접 목격한 라이오넬의 힘은 기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랐다.
우다크와 같은 일반 병사들 눈에는 가히 신의 힘에 필적한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라이오넬을 전적으로 믿는 레몬드의 태도가 꼭 잘못됐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게 꼭 힘으로 해결되는 일만은 아니지 않소? 라인하트 경께서 항상 자리를 지키고 계실 수 있는 노릇도 아닐 테고.”
단, 그렇다고 해서 라이오넬이 진짜 신은 아니었다.
사람의 감정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힘으로 무작정 찍어 누른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다.
포로 중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들이 한둘은 아닐 터.
그들이 작당한다면 라이오넬이 있다 해도 사고가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아아,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어. 오히려 라이 경은 딱히 뭘 하지 않으실 거야. 말했다시피 그럴 필요가 없을 거거든. 자네들이 알아서 자제하고 설설 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레몬드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는 우다크의 경고를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확신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사고 좀 쳐 줬으면 좋겠어.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그리고 아주아주 크게. 그러면 혹시 또 모르거든, 그 지옥에 가지 않게 될지도.”
“무슨 말이오, 그게?”
“그런 게 있어. 하아, 라이 경 일만 아니었어도 곧장 라인하트 영지로 내빼는 건데, 오른팔이라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에휴, 내가 어쩌자고 여길 와서…….”
“……??”
“그러니까 쓸데없는 염려로 시간 낭비 말고 가서 잠이나 자 둬.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맘 편히 잘 수 있을지 모를 테니까. 후우, 내 팔자야…….”
동시에 한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런 한탄.
이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우다크였다.
* * *
“얼마나 남길 생각이야?”
“정해 두지는 않았어. 저들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거야.”
창밖으로 포로수용소가 내려다보이는 이베리아 영주성 내 영주 집무실.
새로 만들어질 군단의 장인 내가 임시 집무실로 사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현재 이곳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렇겠지. 그래도 웬만하면 절반 정도는 남겨 줘. 그래야 군단 무늬라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알겠어, 사네.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 누군가란 바로 발터우스 자작가의 서자, 사네 발터우스였다.
명백한 내 사람이자 나의 절친한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목적은 이 집무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원래 영주 집무실은 영지 전반의 업무를 돌보기 위한 곳.
이런 쪽으로 관심도 재능도 없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하여 사네를 불렀다.
이 집무실에는 그가 훨씬 더 적합하고 잘 어울릴 테니까.
사네는 올해 아카데미 3년 차로 아직 졸업 전이라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그가 점찍어 마검학연에 가입시켜 둔 인재들을 곧바로 데리고 올 수 있었으니까.
비록 영지 경영 경력이 전무한 초짜들뿐이라지만 이 또한 괜찮았다.
이베리아 영지 역시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
이들이 배우고 익힌 바를 마음껏 펼쳐 가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시간적 여유도 충분했다.
이베리아 영지는 왕실 직할지로 정해졌다.
지난 30년간 이 지역 전투를 왕국 정규군이 담당해 온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영지 계승권을 지닌 귀족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리고 직할지가 된 영지의 관리를 맡은 이는 레나였다.
내가 세운 공적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다.
덕분에 영지 소출이나 세금 징수 등의 측면에서 크게 압박받을 일도 없었다.
물론 세월아 네월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네가 점찍어 둔 인재들이었다.
영지가 본궤도에 오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터였다.
“이거 참, 내가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기는 하다. 미친 짓 벌이는 친구를 말리지는 못할망정 절반이라도 남기니 마니 하고 있으니…….”
“마냥 미친 짓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아니까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나나 레나 왕녀님이나 사고의 기준이 상식선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버렸어. 이래도 되는 건지 불쑥불쑥 의문이 들 지경이라니까?”
“그냥 받아들여. 그럼 편할 거야.”
사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포로들을 데리고 벌이려 하는 어떤 일 때문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말리지 못하는 사네였다.
말리기는커녕 아예 구체적인 부분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아는 것이다.
남들 눈에는 미친 짓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측면에서 그러했다.
우선 내가 데려가는 이 포로들은 철저하게 버려진 상태였다.
전원 몰살당한다 해도 누구 하나 신경 써 주지 않는 것이다.
바이젠 출신 포로들이었기 때문이다.
슈라우드의 철천지원수인 바로 그 바이젠 말이다.
그래서였다.
내가 벌이려는 일에 이들보다 적합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슈라우드 군으로 벌이려 한다면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몰살이 눈에 훤한 일이었으니까.
하여 몰살당해도 상관없는 이들이 적임자인 것이다.
또 감정의 골을 메우는 데에도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다.
슈라우드 군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슈라우드의 염원이었다.
누군가 해 주기만 한다면 쌍수 들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일 말이다.
따라서 포로들에 대한 적개심을 대폭 경감시켜 줄 것이 분명한 일이기도 했다.
동시에 전례가 없는 업적이었다.
시도만으로도 그러했다.
그런데 만약 단순 시도를 넘어 성공까지 한다면?
신설 군단과 이베리아 영지가 확고히 자리 잡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나아가 레나가 세력을 다시 한번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왕국의 숙원이 레나의 힘으로 풀리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직접 나선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점이 가장 중요했다.
그 어떤 미친 짓이라 해도 내가 나서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으니까.
그간 내가 써 내려온 말도 안 되는 기적들이 그 방증이었다.
따라서 사네가 말리지 않는 것이다.
레나 역시 마찬가지임은 두말할 필요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예정이야?”
“한 달 뒤. 포로 가족 중 일부가 4주쯤 뒤에 1차로 도착한다고 하니까, 희망이란 걸 좀 보여 주려고. 맛보기로 살짝만. 그러면 의지를 더 강하게 불태우겠지.”
“라이, 가만 보면 너 의외로 냉정한 면이 강해.”
“저들은 아직 내 사람이 아니니까. 내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철저히 남일 뿐이지.”
창밖의 포로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은 냉정했다.
공식적으로 내 휘하에 들어온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저들은 아직 내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아직 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자신들의 본성을 밑바닥까지 나에게 드러낼 기회.
그리하여 내 사람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
이번 일이 펼쳐지는 장소가 그 기회의 장이 될 터였다.
인간에게는 지옥이라 불리는 그곳, 반면 몬스터에게는 천국이라 불리는 그곳이 말이다.
* * *
자원입대라는 새로운 희망이 제시되고 두 달 뒤, 슈라우드에 군단이 하나 탄생했다.
4,632명의 바이젠 군인 출신으로 구성된 신생 군단이었다.
전쟁 종결 직후 포로로 잡힌 병력의 수가 4,800명에 조금 못 미쳤다.
따라서 사실상 거의 모든 포로가 전환된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중간에 탈출을 시도했던 100여 명가량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우다크 또한 이 군단에 속해 있었다.
당연했다.
포고가 뜨자마자 탈출 계획을 접고 가장 먼저 입대를 신청했던 그였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군단의 일원으로서 한창 행군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저거구나, 말로만 듣던 그 바르코스 요새가.”
“대 몬스터용 성벽이라 그런가, 일반 성벽들하고 규모 자체가 다르네.”
2개월간 이어진 행군의 종착지는 바르코스 요새였다.
슈라우드 왕국의 남쪽 끝인 이베리아 영지에서 북쪽 끝인 바르코스 요새까지 이동해 온 것이다.
“이번 겨울은 내내 몬스터 피로 목욕을 하겠구만.”
“말로만 듣던 카르가디아 산맥 몬스터들은 좀 다르려나?”
“달라 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그래 봐야 다 같은 몬스터인데. 그냥 덩치 조금 더 크고 숫자 좀 더 많은 정도겠지.”
길었던 행군에도 불구하고 군단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복무 강도가 병사들이 걱정했던 것만큼 무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냥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군단 창설 직후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적잖은 훈련을 받았다.
주로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바이젠 왕국은 몬스터 출몰 빈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이었다.
하여 몬스터에 관한 노하우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형 몬스터는 상대해 본 경험이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여 지난 몇 개월간 이에 대한 꽤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 온 것이다.
하지만 그 강도가 이들을 긴장시킬 만큼에는 미치지 못했다.
병사들의 대부분이 바이젠 정규군 출신이었다.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는 나름 엘리트이자 베테랑들인 것이다.
웬만한 훈련으로는 이들의 혀를 빼 물게 만들기 어려웠다.
더구나 슈라우드 측에서도 그리 고강도의 훈련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한 수준의 몬스터 대처법 훈련에 그쳤을 뿐이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임무를 주려나 걱정했는데, 요새 끼고 몬스터랑 싸우는 정도라면야, 뭐.”
“솔직히 인간 적군하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야성이니 뭐니 해 봤자 결국 멍청하다는 거잖아. 진형 짜고 덤비는 인간 군대하고는 비교할 게 못 되지.”
“맞아. 빡세기야 하겠지만, 이베리아 영지에서 벌어졌던 전쟁만 하려고?”
또, 이들의 대화가 꼭 자만이나 오판이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전쟁을 수차례 경험한 병력이었다.
익숙해질 시간 약간이면 충분했다.
그러고 나면 슈라우드 북부 베테랑 못지않은 실력을 보여 줄 터였다.
그만한 실력과 기본기는 갖춘 이들이었으니까.
“몬스터 웨이브 막아 내고 겨울 좀 지나고 나면 그래도 한 번씩 휴가는 주겠지?”
“그렇지 않을까? 웨이브가 1년 내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는 편이 우리 사기 유지에도 더 좋을 테니까.”
“휴가 얘기하니까 제인이 또 보고 싶네. 출발 전날 정말, 어우…….”
“어디 너만 그래? 나도 오랜만에 우리 와이프랑…….”
“염장 지르냐? 두고 봐. 이베리아 영지로 돌아가면 우리 가족들도 도착해 있을 테니까, 나도…….”
군단의 분위기가 훈훈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가족들과의 시간이었다.
바르코스 요새로 떠나기 직전, 이베리아 영지에 도착한 가족들과 재회한 것이다.
물론 군단 병력 모두가 이 시간을 누리지는 못했다.
전체의 1/3 정도에 불과했다.
아직 작업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 시간도 기껏해야 이틀에 불과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누린 이는 행복했던 그 시간을, 누리지 못한 이는 희망을 곱씹었다.
그럼으로써 불태우는 중이었다.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말이다.
이것이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봐 우다크, 표정 좀 풀어. 왜 이렇게 굳어 있어?”
“아아, 그래.”
단, 우다크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 훈훈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점점 더 표정을 굳혀 가는 중이었다.
그러자 스티브라는 동료가 이런 우다크의 태도를 장난스럽게 타박해 왔다.
“왜, 이베리아에 두고 온 크리스티나 생각나서 그래? 설마 너도 나 염장 지르는 거냐, 앙?”
우다크는 전자에 속했다.
그의 가족들이 머무는 곳은 이베리아 영지 근처 플라다 영지였다.
덕분에 1차 이송 명단에 포함돼 있었고, 출발 전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 그의 심란함이 가족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면 전에 레몬드 교관이 너한테 겁 준거? 아직도 그거 때문에 그래?”
“으음…….”
레몬드 때문이었다.
그와 나눴던 대화가 우다크의 마음을 자꾸만 무겁게 만들었다.
“이 친구야, 그게 벌써 넉 달도 더 전이야. 그냥 괜히 무게 잡은 거라니까? 지옥을 경험하게 해 준다느니, 지금이라도 많이 자 두라느니 하는 것들, 우리도 신병 군기 잡을 때 많이 써먹던 거잖아.”
물론 그는 동료들에게도 레몬드와의 대화 내용을 전했다.
이에 동료들도 처음에는 잔뜩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졌다.
으레 하는 군기 잡기용 멘트라고 여긴 것이다.
“음, 그래도 좀 꺼림칙해서 말이야. 요새를 지나쳐서 아예 산맥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쓸데없는 과대망상이라니까 그러네. 생각해 봐. 다 죽일 작정이면 뭐 하러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오겠어? 그것도 바이젠한테 무려 10만 골드씩이나 써 가면서. 말이 안 되잖아, 말이.”
“그렇기는 한데…….”
“그렇기는 한데가 아니라, 그래. 그러니까 인상 좀 풀어, 이 예민한 친구야.”
이 또한 가족들과의 시간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스티브의 말이 백번 옳았다.
슈라우드가 가족들의 몸값으로 쓴 돈이 무려 10만 골드였다.
정확히는 받을 돈을 감면해 준 것이지만, 어찌 됐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기껏 이런 천문학적인 돈을 써 놓고 병사들을 죄다 죽을 자리로 보낸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다크 역시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
하지만 가슴이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자꾸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레몬드의 태도 변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물론 그가 겉으로 이렇다 할 낌새를 내비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이베리아 영지를 출발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 다른 동료들은 몰라도 우다크만은 느낄 수 있었다.
슈라우드어 구사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우다크에게 수시로 말을 걸어 오던 레몬드였다.
그런 그가 바르코스 요새가 가까워짐에 따라 찾아오는 횟수를 부쩍 줄인 것이다.
어제부터는 아예 말 자체를 걸어 오지 않는 중이었다.
그저 같은 라인하트 영지 출신인 바비와만 대화를 나눌 뿐.
이런 레몬드의 변화가 못내 불안한 우다크였다.
그렇게 그는 불안감을 한가득 안은 채로 바르코스 요새에 입성했다.
“모두 주목.”
그리고 이는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머지않아 그 사실이 밝혀졌다.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바르코스 요새 입성 다음 날, 라이오넬 라인하트가 군단을 집합시켰다.
“지금부터 우리 군단의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집합 장소는 성문 앞이었다.
군단이 입성한 쪽과 정반대 쪽에 위치한 성문.
즉, 카르가디아 산맥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성문 앞인 것이다.
“이 너머에 있는 것이 무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따로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러고는 그 너머를 가리켰다.
성벽 너머, 에펜시아 대륙 전체에 그 위명이 자자한 곳을.
“이번 훈련의 목표는 하나다. 카르가디아 산맥.”
이쯤 되니 병사들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군단의 진정한 행선지에 대해서.
웅성웅성.
동시에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군단장의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만큼 밝혀진 행선지의 정체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우다크의 동료인 스티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우다크를 타박하던 그였다.
한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현실이 된 참이었다.
자연스레 그 또한 웅성거림에 한 몫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카르가디아 산맥이었다.
몬스터의 천국이라 불리는 바로 그곳 말이다.
그런 곳에서 군단의 훈련을 진행한다니, 이는 미친 짓이 따로 없었다.
병사들이 자신만만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요새를 끼고 싸운다는 전제하에서였다.
몬스터의 야성을 멍청함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요새가 존재할 때의 이야기.
요새가 없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야성은 광폭한 저돌성이 되어 병사들의 목숨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슈라우드 측의 누구도 이 웅성거림을 제재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부군단장인 다이너를 비롯하여 지금껏 교관 역할을 해 온 바비와 레몬드 모두.
“지금부터 카르가디아 산맥을 청소한다. 슈라우드 범위 내에 있는 곳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깨끗하게.”
어차피 상관없었던 것이다.
웅성거림이 있든 말든 라이오넬의 목소리는 또렷이 전파되었으니까.
4,632명 전원에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깔끔하게.
“분명 지옥이 펼쳐지겠지. 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라. 그 지옥 속에서 끝끝내 살아남는다면.”
그렇게 시작되었다.
병사들에게는 지옥이자,
“제군들은 그때 비로소 ‘그리핀’ 군단의 진정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별 작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