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장: 동등한 거래
이베리아 영지를 놓고 벌어진 전쟁이 끝났다.
결과는 슈라우드 왕국의 승리.
단, 그냥 승리가 아니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도출된 완승이었다.
그간 판정승과 판정패가 반복돼 왔을 뿐, 이번처럼 한쪽의 완벽한 승리는 처음인 것이다.
나아가 3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승리이기도 했다.
드디어 이베리아 영지의 소유권이 명확해졌다.
명백한 슈라우드의 영토로.
바이젠과의 강화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이제 막 시작에 들어선 단계라지만 이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협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조약 최상단에 떡하니 박힐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역사와 영토뿐만이 아니었다.
이 승리는 슈라우드에 막대한 금전 역시 안겨 줄 예정이었다.
전쟁배상금, 그리고 포로에 대한 몸값 말이다.
적어도 바이젠 왕국의 1년 치 예산만큼은 받아 낼 작정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포로들의 면면이 지닌 값어치가 그만큼은 했으니까.
포로 명단에는 무려 바이젠의 왕세자와 소드마스터가 포함돼 있었다.
왕국의 현재와 미래가 골고루 사로잡힌 것이다.
여기에 귀족과 기사 90여 명까지 더하면 100만 골드 이상은 받아 낼 수 있었다.
다시 여기에 전쟁배상금까지 고려하면 최소 170만 골드.
슈라우드 입장에서는 돈 놀음 한번 제대로 할 수 있는 판이 깔린 셈이었다.
심지어 5,000여 병사들의 몸값은 여기 끼지조차 못했다.
왕세자와 소드마스터, 귀족과 기사들을 구하는 일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그렇기에 병사들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못 하는 실정의 바이젠이었다.
“그러니까, 병사들의 가족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10만 골드나 깎아 주자는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정확히 들으셨어요, 바로움 후작님.”
레나의 주장은 바로 이 지점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버려진 병사들을 슈라우드가 흡수하자는 것.
다만, 완벽한 흡수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정착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안정적 정착에 있어 가족만 한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니 배상금을 일부 깎아 주고 병사들의 가족을 받아 오자는 것이 레나의 주장이었다.
“강제 노역 좀 시키다 노예로 만들면 그만인 것들입니다. 굳이 배상금을 깎아 줘 가면서 그 가족들까지 데리고 올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에 1왕자 측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슬런트 바로움 후작.
1왕자 크리스토퍼의 외삼촌이자 왕국 외무대신인 그가 태클을 건 것이다.
“처절한 실전까지 거친 정예 병력이에요. 단순히 노예로 부려먹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나요? 그들 중 일부라도 우리 군으로 흡수할 수 있다면 국가적으로 큰 이득이 될 겁니다.”
하지만 레나는 여유로웠다.
여유롭게 좌중을 둘러보며 본인의 주장을 이어 나갔다.
다급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 애초에 레나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 정도 반대쯤이야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
더구나 이 자리에서 레나보다 발언권이 큰 인물은 몇 없었다.
왕국의 주요 대신들이 전부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굳이 찾자면 오브리가 국왕 정도?
자리의 성격 때문이었다.
바이젠과의 전쟁 결과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절대적인 지분을 갖춘 이는 두 명이었다.
하나는 디카프리 델로나 후작.
군의 사령관인 그라면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할 만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없으며, 그의 대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작가 전체가 후계 문제 등으로 정신없는 상황인 것이다.
덕분에 남은 한 명의 지분이 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이 한 명은 굳이 따져볼 필요조차 없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홀로 대량 살상 마법을 막고, 바이젠 측 실력자들을 상대했으며, 왕세자를 사로잡아 이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그였다.
그것도 역사적 대승이라는 최상의 마침표를.
이론의 여지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한데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라이오넬 또한 이 자리 참석이 불가했다.
그는 정계 진출을 금지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왕궁에서 진행 중인 이 정치성 짙은 논의에 발을 들이지 못함이 당연했다.
단, 전자와의 차이점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리인의 유무.
라이오넬에게는 현재 그의 이익을 대변해 줄 대리인이 존재했다.
정계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또 모두가 인정했다.
레나가 라이오넬의 정치적 대리인이자 그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그래서였다.
레나의 발언권은 이 자리에서 가장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넬을 대변하는 그녀였으니까.
물론 이런 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놈도 있기는 했지만.
“멍청한 소리! 바이젠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거냐? 철천지원수로 지내 온 놈들을 우리 군으로 흡수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1왕자였다.
왕녀라는 이유만으로 레나 자체를 극도로 깔보고 무시하는 그였다.
그런 크리스토퍼가 직접 레나의 주장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어차피 바이젠에 버림받은 이들이니까. 우리가 받아 주고 가족까지 챙겨 주면 분명 우리에게 충성할 이들도 적지 않을 거야.”
“하, 이래서 계집이 정치에 끼어들면 안 되는 거라니까? 아주 이상주의자 납셨구만, 이상주의자 납셨어.”
과격한 언사도 함께였다.
레나에게 무안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당장 기본적인 생활이나 언어 차이는? 받아들였을 때 우리 왕국민들의 반감은? 또, 그 안에 숨어 있을 세작은? 놈들이 우리 군사 기밀을 빼돌리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지? 그 책임은 누가 지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이란 걸 해 보기는 한 거냐?”
“당연하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시도에 불과했지만.
“해결책은 간단해. 그들과 우리 왕국민들을 분리하면 돼.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그가 걸고넘어지는 문제들이라 봤자 어차피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뿐이었다.
레나를 당황 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마침 적절한 장소도 마련된 상태야. 이베리아 영지가 비어 있으니까. 바이젠으로부터 포로의 가족들을 넘겨받는다면, 강제 이주 정책을 무리하게 진행할 필요도 없을 테고.”
지난 30년간 전쟁터가 되어 온 이베리아 영지였다.
사실상 군사작전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영지민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그 수가 매우 적었다.
즉, 영지 안정화를 위해서는 영지민의 수를 늘려야만 하는 상황.
따라서 포로의 가족들을 이곳에 정착시키는 것은 일석이조가 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만 해결된다면 말이다.
“퍽이나 간단하고 적절하구나. 바이젠과의 최전선에 바이젠 출신 병력과 그 가족들을 정착시킨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간단하게 바이젠한테 도로 가져다 바치지그래?”
안보 문제였다.
이들을 이베리아 영지에, 그것도 군인으로 두는 것은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컸다.
바이젠 출신들을 이용해서 바이젠 왕국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으니까.
당연히 믿음을 가지기 어려웠다.
무언가 믿을 만한 수단이나 확실한 책임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전부를 다 받아들이자는 게 아니야. 믿을 만한 일부를 선별해서 흡수하자는 거지.”
“그러니까, 그 선별을 누가 하는데? 사고 칠 게 뻔한 놈들을 누가 책임지고 관리하려 들겠느냐고?”
“라이오넬 경.”
그러나 레나는 지니고 있었다.
믿을 만한 수단이자 확실한 책임자를.
라이오넬 라인하트.
이 일에 그보다 완벽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라이오넬 경과 이미 얘기 끝냈어. 병력 선별부터 관리까지 그가 모두 도맡기로. 문제가 생길 시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약속도 받았고.”
“그자가? 또 무슨 수작을 꾸미려고…….”
“수작이 아니라 궂은일을 자청하는 거지. 그가 맡아 준다면 우리는 양질의 병력 확보에 영지민 확보, 그리고 보상 문제 해결까지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는 셈이니까.”
“보상 문제라니?”
“라이오넬 경에 대한 보상 문제 말이야. 설마 세운 공이 얼만데 아무런 보상도 없이 넘어갈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
라이오넬이 세운 공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설령 라이오넬을 극도로 미워하는 크리스토퍼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이론이 없었다.
“순수하게 세운 공으로만 따지면 당장 후작위를 수여해도 모자라겠지만, 이번에도 라이오넬 경이 양보했어. 바이젠 병력에 대한 통솔권과 전반적인 지원 수준에서 만족하기로.”
“……그렇게 맘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하지만 보상 내용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암묵적인 동의가 필요했다.
슈라우드 내부가 아닌 외부의 동의가.
“알지. 누구 덕분에 내정간섭이나 다름없는 꼴을 당해도 참고 넘겨야 한다는 거.”
라이오넬이 외부의 누군가와 깊게 얽힌 처지였기 때문이다.
대륙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누군가와.
라이오넬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보상은 이 인물의 암묵적 동의가 전제돼야만 했다.
“어쨌든 반대 이유로는 그게 가장 큰 거지? 어차피 오빠한테 다른 이유는 그냥 핑계에 불과할 테니까.”
크리스토퍼가 싸지른 똥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오로지 여기에 쏠려 있을 뿐이었다.
“그럼 더는 딴지 걸려고 애쓸 필요 없어. 그 부분도 이미 얘기 끝냈어.”
“뭐……?”
“이미 얘기 끝냈다고. 당사자랑, 직접.”
하나,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 될 것 없었다.
이 또한 예상 범위 내였으며, 이미 해결까지 마친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 * *
―라이오넬에게 일군에 대한 지휘권을 만들어 주겠다라…….
왕국 내부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전, 레나는 더 중요한 자리를 마련했다.
외부 인사와의 자리였다.
라이오넬과 깊게 얽힌 바로 그 인물 말이다.
마법 통신구를 타고 아이단 황태자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이거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구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지요? 왕국의 30년 숙원이 라이오넬 경의 손으로 풀린 상황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이미 건넨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동의를 구하는 단계에 있었다.
다만, 굴욕적인 저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통신구 너머로 보내는 말에 담긴 가시가 그 방증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흔한 작위 하나 받지 못하네요. 덕분에 전하의 드높은 위엄을 다시 한번 체감했답니다.”
―어쩐지 말에 잔뜩 가시가 돋아 있는 듯한데.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전하의 드높은 위엄과 관대한 자비심에 기대어 볼 뿐입니다. 아니라면 전하의 사람을 은밀히 따로 빼 둘 이유가 없었겠지요.”
일방적인 구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래였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동등한 거래.
“그 마법사는 현재 모처에서 보호 중이랍니다. 때가 되면 무사히 전하께 돌려보낼 수 있도록.”
―그때라는 것은 아마도 내 동의가 떨어진 뒤일 테고?
제국의 6서클 마법사가 라이오넬에게 사로잡힌 상태였다.
그것도 한창 슈라우드에 해가 되는 수작질을 펼쳐 가던 현장에서.
따라서 상대가 황태자라 해도 동등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크리스토퍼가 싸지른 똥만 아니었다면 더 유리한 위치를 점했을 터.
그래서였다.
황태자의 반문에 레나가 가벼운 침묵으로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이거야 원, 어쩔 도리가 없군. 외통수에 걸려들었어. 좋소, 레나. 당신 뜻대로 하시오.
황태자가 레나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 역시도.
결국, 이번 일은 레나의 뜻대로 흘러가게 됐다.
1왕자 측의 반발이 예상되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어차피 동부와는 거리가 먼 남부의 일인 데다, 라이오넬이 세운 전공은 반박 불가 수준이었으니까.
3왕자 측이나 중립 세력은 흔들리는 구도를 오히려 반길 테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황태자의 동의뿐이었는데, 그건 지금 막 얻어 낸 참이었다.
―아, 축하도 같이 건네는 게 좋겠군. 이제 그대도 실질적인 무력과 기반을 갖추었으니,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필요한 조건들은 모두 충족한 셈이구려.
“별말씀을.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글쎄, 그 모자란 부분들도 어쩐지 금방 채워 나갈 것 같은 느낌은 순전히 내 기분 탓인가?
황태자의 말대로였다.
이제 기본 조건들은 모두 충족한 셈이었다.
바이젠 출신 병력이 라이오넬의 휘하에 놓이며 실질적인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베리아 영지 또한 사실상 레나의 관리하에 들어오게 될 터였다.
영지 주둔 병력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을 명목으로 말이다.
물론 아직 손아귀에 전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바이젠 출신들이 실제로 얼마나 흡수될지 불분명했다.
또, 레나의 이베리아 영지 관리에 대해 이런저런 딴지가 걸려 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전자는 라이오넬이, 후자는 레나 본인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꽉 틀어쥘 테니까.
레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라이오넬과 함께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