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장: 본질과 형체
“브루노 다스 백작.”
브루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착 가라앉은 라이오넬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라이오넬에게 한 방 제대로 먹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별로 잘 지내지는 못한 모양이군.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안색이 좋을 수가 없었다.
웬만한 함정은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여겼을 터.
하지만 그 함정이 소드마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소드마스터 하나만큼의 전력 차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 타이밍에 소드마스터가 등장하리라고는 상상 못 했을 것이기에 더더욱.
소드마스터가 이런 음습한 계략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을 도맡는다?
심지어 바이젠 출신도 아닌 타국의 소드마스터가?
모종의 계약을 맺었거나 혹은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것이 아니고야 불가능한 일.
브루노는 당연히 어느 쪽도 아니었다.
스루지아넨 카이탄처럼 6서클에 오르는 과정에서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치명적인 약점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그러했다.
한데 그랬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브루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생겨 버렸다.
황태자 호위기사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브루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소드마스터인 그가 지금 이렇듯 더러운 음모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이 또한 모종의 계약이라고 볼 수 있었다.
브루노에게 치욕을 안겨 준 장본인 라이오넬.
그를 브루노 손으로 사로잡아 황태자 앞에 무릎 꿇린다.
그리하여 본인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만회한다.
이러한 암묵적 형태의 계약 말이다.
“아니면 내가 달갑지…….”
어찌 됐든 지금은 브루노가 제대로 한 방 먹인 상황이었다.
이어지는 라이오넬의 대응을 통해 이 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슈아악~
라이오넬은 입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재차 검을 휘둘러 온 것이다.
콰카강!!
브루노는 이를 경시하지 못했다.
경시는커녕 온 힘을 다해 막아 냈다.
철저히 자세를 낮추면서 말이다.
당장 반격은 꿈도 꾸지 않는 그였다.
콰쾅!! 콰과광!!
삼격, 사격째도 마찬가지였다.
방어 일변도로 라이오넬의 공격을 오로지 막는 데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이미 인정했기 때문이다.
라이오넬이 브루노 본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물론 검술 경지에서 밀린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령력으로 추정되는 힘까지 종합적으로 따졌을 때, 전체적인 강함에 있어 밀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지난 대결의 결과가 증명하는 바였으니까.
그렇기에 최대한 중심을 낮춘 상태이며, 그럼에도 가해지는 일격 일격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아악~
콰쾅!!
단, 그렇다고 해서 조급한 마음을 품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흐름은 브루노 쪽으로 더할 나위 없이 유리했다.
일단 버겁기는 해도 못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을 만큼은 됐다.
그리고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브루노가 무언가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말고도 해 줄 사람이 있었다.
브루노는 이 사람이 결과를 도출해 낼 때까지 라이오넬을 묶어 두기만 하면 됐다.
우웅!
막 결과 도출을 위한 준비가 완료되었다.
스루지아넨이 캐스팅을 마친 것이다.
이를 느꼈는지 라이오넬의 눈빛 또한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럴수록 브루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 짙어졌고 말이다.
이윽고 완성된 마나의 파동이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확신에 찬 스루지아넨의 목소리와 함께.
“프리즈.”
스루지아넨이 캐스팅한 마법은 프리즈였다.
상대의 움직임을 묶어 버리는, 고작해야 2서클에 불과한 마법.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는 그냥 2서클이 아니었다.
무려 6서클 마법사가 시전한 2서클 마법이었다.
그것도 짧지 않은 캐스팅 시간까지 투자해 가면서.
약할 턱이 없었다.
“……!!!”
그 위력만이 아니었다.
마법의 시전 대상 또한 위력 못지않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흐름 자체를 완전히 굳혀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슈라우드가 완벽히 패배하는 방향으로.
이론의 여지는 없었다.
당황의 빛마저 내보이는 라이오넬의 반응이 그 증거였다.
“각하!! 조심…….”
화아아~
스루지아넨의 마법이 시전된 대상.
그것은 라이오넬이 아니었다.
디카프리 델로나였다.
막상막하의 미르겔 마이웨더와 정신없이 대결을 펼쳐가던 슈라우드 군 총사령관 말이다.
우뚝.
그런 디카프리의 움직임이 순간 정지됐다.
누가 꽁꽁 묶어 두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하게.
물론 정지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터였다.
소드마스터라면 풀고 나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큿……!”
하나, 디카프리가 처한 현 상황이 문제였다.
그는 동급의 소드마스터와 일대 결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더구나 디카프리가 강력한 일격을 날려 가던 순간이기도 했다.
즉, 찰나의 뒤틀림만으로도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촤아악~!!
“커헉!!!”
그리고 그것이 실제가 됐다.
라이오넬과 슈라우드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가 도출된 것이다.
디카프리가 일격을 정통으로 맞았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상반신 전체를 사선으로 베이고야 말았다.
그냥 일격도 아니었다.
소드마스터 미르겔의 오러 블레이드가 한가득 실린 일격이었다.
마지막 순간 마법을 풀어내고 최대한 회피기동을 펼쳤다 하나, 가망은 별로 없었다.
털썩.
별로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넘어가는 디카프리였다.
곧바로 의식까지 날아가 버린 것이다.
…….
비록 난전 상황은 아니라 해도 전장 한복판이었다.
그런 곳에서 깊은 정적마저 흘렀다.
모두가 이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특히 슈라우드 병력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전부가.
이로 인해 끊이지 않을 것만 같던 슈라우드의 돌진도 뚝 하고 끊겨 버렸다.
날아가 버린 디카프리의 의식과 함께.
저벅저벅.
그렇게 정적이 내려앉은 직후였다.
걸음 소리가 이 무거운 정적을 가로질렀다.
디카프리를 쓰러뜨린 미르겔이 걸음을 옮기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브루노와 라이오넬 쪽으로 가까워졌다.
의미하는 바가 명료한 발걸음인 것이다.
이윽고 걸음 소리가 멎었다.
지이잉!
대신 그 자리를 미르겔의 오러 블레이드가 차지했다.
대기를 가르며 라이오넬을 향해 겨눠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로써 완성되었다.
라이오넬을 둘러싼 삼각 구도가.
소드마스터 둘에 6서클 대마법사가 하나로 구성된, 절대적이라 불러도 좋을 그런 삼각 구도였다.
“괜한 질문이었군. 확실히 달갑지 않을 거야. 나라도 이 상황은 절대 달가울 수 없을 테니까.”
최악의 상황이었다.
왕세자 포획은커녕 퇴각조차 불가능해졌다.
왕국의 소드마스터 하나를 잃은 채로 3,000여 병력과 함께 고스란히 사로잡히게 생긴 것이다.
달가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단, 어디까지나 라이오넬의 입장에서 말이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없네. 하니, 이제 눈치 그만 살피고 검은 내려놓지 그러나?”
브루노 입장에서는 그와 정반대였다.
계획한 바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바이젠의 왕세자로 슈라우드 군을 진영 깊숙이 유인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브루노가 등장한다.
라이오넬이 당황할 수밖에 없도록.
나아가 이 당황을 극대화시킨다.
스루지아넨의 마법으로 라이오넬이 아닌 디카프리를 노리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타이밍에.
그리하여 라이오넬을 둘러싼 삼각 구도를 만들어낸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절대적인 삼각 구도를.
이 모든 계획이 그대로 실현된 참이었다.
이보다 산뜻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직 최종 마무리가 남기는 했다.
하나, 이미 끝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라이오넬에게 빠져나갈 구멍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슈라우드의 병력이야 어차피 라이오넬만 제압하면 정리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미련하게 굴지 말도록. 그래 봐야 다치기만 할 뿐이니.”
라이오넬은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저항이라도 할 모양.
그러나 브루노는 이마저 허용해 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대는 다치지 않을 거야. 그분께서 온전한 상태의 그대를 보고 싶어 하시니까. 하지만 저들은 다르지 않겠나?”
그가 눈짓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라이오넬 너머, 쉼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돌진이 우뚝 멈춰선 곳이었다.
그곳에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슈라우드 3,000여 병력이 서 있었다.
이어서 브루노가 고갯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척! 척! 척!
그러자 바이젠 측에서 움직였다.
흐트러진 대형을 정비하고 슈라우드 군을 포위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쓸어버릴 것만 같은 기세는 덤이었다.
“미련하게 굴수록 애꿎게 다치는 이들만 늘어날 터.”
황태자가 그 앞에 무릎 꿇리고 싶어 하는 건 어디까지나 라이오넬뿐이었다.
따라서 라이오넬 이외의 것들은 관심 밖이었다.
사상자를 얼마나 내든 하등 상관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복잡하게 돌아가거나 힘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었다.
라이오넬은 성향상 병력의 무의미한 희생을 감내하지 못한다.
따라서 저들만 들먹여도 일은 쉽게 풀릴 터였다.
“…….”
실제로 라이오넬은 흔들렸다.
검은 아직 내리지 않았으나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그였다.
“으음…….”
“이제 어떻게……?”
“라이오넬 경…….”
이를 포착한 것은 브루노만이 아니었다.
슈라우드 군 역시 라이오넬의 흔들림을 포착했다.
오히려 정면에 선 브루노보다 더 크게 느끼는 듯했다.
지금껏 통일된 목소리와 움직임만을 보이던 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평원에서 단 한 차례도 보인 적 없던 불안과 초조 따위를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저들도 오매불망 그대만 바라보는군. 어떻게, 끝까지 가 볼 생각인가?”
어찌 됐든 일은 더 쉬워졌다.
라이오넬의 흔들림을 더욱 부추기는 꼴이었으니까.
하여 브루노는 이 타이밍에 압박의 강도를 한층 더 높여 갔다.
우우웅~
때마침 스루지아넨도 가세했다.
재차 캐스팅에 들어간 것이다.
라이오넬을 향한 압박이 극대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만을 바라보는 3,000여 병력의 불안과 초조 역시도.
스륵.
이에 라이오넬의 검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또한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라이오넬의 명시적인 항복뿐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네. 무의미한 피를 볼 필요는 없지. 그대는 옳은 선택을…….”
브루노는 확신했다.
라이오넬이 현실을 직시했다고.
그렇기에 곧 항복의 말을 뱉어 낼 것이라고.
꿈틀.
떨어져 내리던 라이오넬의 검이 갑자기 하강을 멈추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스스스.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느낌에서 그칠 수가 없었다.
눈에 직접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라이오넬의 주위로 무언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검디검은 무언가였다.
어쩐지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그래서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그런.
“무슨……?”
그래서일까?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건 위험하다고.
위험하니 멀리 떨어지라고.
무려 소드마스터의 본능이 말이다.
스스스스스스~
이 또한 경고에서 그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경종까지 발전했다.
점점 더 크기를 불려가는 어두운 무언가와 함께.
아른거리는 수준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것은 라이오넬 자체를 덮어 버렸다.
그의 몸은 더 이상 터럭 하나 보이지 않게 됐다.
정체 모를 어둠에 완전히 뒤덮인 것이다.
스아아.
여기서 끝인 것일까?
어둠이 꿈틀거림을 멈췄다.
확장 역시 중단됐다.
라이오넬을 완전히 뒤덮은 것이 그 기점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잠시간의 멈춤은 오히려 시작이었다.
폭발적인 확장의 시작.
라이오넬을 집어삼킨 어둠이 순식간에 뻗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하늘을 향해.
* * *
나는 분명 흔들렸다.
항복을 고민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여 실제로 검을 내려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는 순식간에 병사들에게 전파되었다.
하나의 어둠으로 긴밀하게 엮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가 겪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저들에게는 지진과도 같았다.
증폭을 거쳐 어마어마한 감정의 격랑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3,000여 인원들이 일제히 감출 수 없는 불안과 초조를 드러낸 것은 그래서였다.
한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어둠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3,000의 불안과 초조 또한 어둠을 타고 나에게로 돌아왔다.
역시나 공명을 통해 막대한 증폭을 거친 채로.
따라서 나에게 돌아온 그것은 더 이상 불안과 초조 따위로는 형용이 불가했다.
좌절과 절망 같은 것 역시 한참을 뛰어넘었다.
마치 무저갱에 빠져든 것만 같았다.
소드마스터로서의 수양조차 압도하는 깊은 어둠 속으로 말이다.
본능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물밀 듯 밀려왔다.
동시에 그것이 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잠식할 기세로.
그렇기에 깨달았다.
그간 내가 다뤄 온 것은 어둠의 표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여겼으나 그것은 이해가 아니었다는 사실 역시도.
나는 어둠의 본질을 마주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 주제에 이해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어불성설인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이기도 했다.
덕분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중이었다.
어둠의 본질이라는 녀석을.
나아가 그 형체를 직접 만지고 빚어내는 중이었다.
내 존재를 잠식하려는 녀석과의 치열한 사투를 통해.
콰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