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장: 이베리아 평원 대결전(2)
“확실히 예상한 수준 이상입니다. 이 정도이리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그래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뜻이오?”
스루지아넨의 어정쩡한 대답에 왕세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되물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냐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백작도 알지 않소? 이 계획에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되는 계획이었다.
바이젠, 특히 왕세자 입장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내가 여기에 어떤 투자를 했는지 제국이나 백작이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바이젠 왕실과 왕세자가 이 작전에 쏟아부은 것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우선 바이젠의 정규군 상당수를 희생양으로 내놓았다.
물론 지난 일주일간 나온 사상자 중 대부분이 징집병이기는 했다.
대략 3,500명 정도.
그러나 나머지 1,500명의 사상자는 정예병이었다.
비록 징집병 사상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하나, 어찌 됐든 결코 적은 수라고는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는 단순히 사상자의 숫자에 국한되는 희생이 아니었다.
그 의미가 숫자보다 배는 컸다.
자국군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것도 정규군이 무려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말이다.
이는 추후 군의 사기에 심각한 저하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사안인 것이다.
최고 사령관이 다른 이도 아니고 왕세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또, 왕세자가 지금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가볍지 않은 의미를 띠었다.
이 자체만으로도 위험을 감수한 투자라고 봐야 했다.
왕세자가 직접 미끼 역할을 맡은 상황이니만큼 충분히 그리 볼 수 있었다.
슈라우드는 지금 여기 지휘부를 향해 미친 듯이 진격해 오는 중이었다.
이곳에 샤벨타이거 기가 나부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왕세자를 잡아 이 전쟁의 판도를 단숨에 뒤집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왕세자는 먹음직스러운 미끼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 중이었다.
월척을 낚싯바늘에 꿴 것이다.
이제는 가뿐히 들어 올리는 일만 남았다.
한데, 이 들어 올리는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때는 정말 답도 없어졌다.
고기를 놓치는 것뿐만 아니라 미끼까지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라는 어마어마한 미끼를 말이다.
이건 월척 한 번 낚아 보려다 낚싯배가 뒤집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바이젠 왕국이라는 낚싯배 전체가.
따라서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되는 계획이며, 왕세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연유였다.
“모를 리 있겠습니까? 또,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제국과 스루지아넨이 모를 리 없었다.
이 점을 이용해 계획을 세운 이가 황태자이고, 그 계획의 실행자가 스루지아넨인데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예상한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것뿐이지, 계획에 차질이 생길 만큼은 아닙니다.”
이 판을 짠 궁극적인 목적에는 라이오넬이 있었다.
라이오넬에게 정체불명의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계산에 포함된 바였다.
비록 이 정체불명의 힘이 예상한 수준을 뛰어넘었다 해도 그뿐이었다.
황태자가 준비한 것은 그 이상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저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 계획을 위해 우리 제국이 준비한 바가 어느 정도인지를. 그렇기에 이리 직접 나서신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 어쨌든 다시 한번 명심해 주기 바라오. 이 계획에 절대 실수나 차질 같은 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리하겠습니다.”
하여 스루지아넨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본인이 6서클 대마법사이니 계산 가능한 것이다.
라이오넬의 힘은 분명 예상치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한계치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 정도라면 계획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라이오넬과 슈라우드 군이 여기에 도달하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바이젠 군의 예상외 피해 따위 그가 알 바 아니었고 말이다.
“저하, 슈라우드 군이 거의 다다랐습니다.”
이윽고 끝이 다가왔다.
왕세자의 수하가 라이오넬과 슈라우드 군이 도달 직전임을 알려온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금 스루지아넨이 직접 나설 타이밍이었다.
이 판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
“그럼 잘 부탁하리다, 백작.”
“염려 마십시오. 금방 끝날 터이니.”
* * *
“고양이가 보이는군.”
디카프리의 말대로였다.
슈라우드에서는 고양이라 칭하는 바이젠 왕실의 상징 샤벨타이거.
그것이 펄럭이는 지점에 거의 다다랐다.
바이젠 진영을 가르기 시작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왕세자가 저리 떡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뭔가를 준비하기는 한 모양이구만.”
전방에 바이젠의 왕세자가 보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화려한 갑주로도 모자라 투구를 벗고 얼굴까지 드러낸 상태였으니까.
대놓고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다.
본인은 여기 있으니 자신 있으면 잡으러 오라고.
이 말인즉슨 왕세자는 우리에게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의미.
함정을 파 두고 기다리는 중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역으로 우리를 잡기 위해서 말이다.
“서로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서로의 수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백병전에서는 소드마스터 둘을 보유한 슈라우드가 조건상 더 유리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문을 열고 돌격해 오리라는 것쯤은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였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
우리의 돌격에 대비해 바이젠이 함정을 파 두리라는 사실 또한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서로가 펼칠 수의 전체적인 틀은 공개된 상태.
하면 승부는 이 틀 안에서 얼마나 유효한 변수를 만드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 측이 먼저 변수를 꺼내 들었다.
내 정령력이 바로 그 변수였다.
나아가 이는 상당한 유효성을 창출해 냈다.
예측치 이상의 힘을 발휘 중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조차 이렇게 넓은 범위에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는 예상 못 했으니까.
현재 슈라우드 병력은 구성원 전체가 강력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어둠이 제공하는 중력의 보호막이었다.
영역을 침범하는 적군에게 짓뭉갬을 선사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어둠을 공유하는 아군에게는 당연히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고 말이다.
덕분에 슈라우드 군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다.
사망자는커녕 경상자조차 전무했다.
우리가 뚫고 들어온 곳이 바이젠 진영의 한가운데임을 고려하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성과인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먼저 변수를 꺼내 들었고, 유효한 성과를 도출해 낸 참이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야.”
여기서 바이젠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터.
하나, 그 정도는 되지 못했다.
도망치지 않고 떡하니 버티고 선 바이젠의 왕세자가 그 증거.
그렇다면 이제 바이젠이 변수를 꺼내 들 차례였다.
“그럼 우리도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로 하지. 잊지 말게,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명령을 내리는 거.”
그리고 이에 대해 우리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아니, 단순히 주의를 기울이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극도로 조심해야만 했다.
하여 디카프리와 미리 말을 맞춰 둔 상태였다.
역부족의 기미가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퇴각하기로.
왕세자를 사로잡는다면 당장 전쟁의 결과를 비롯하여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질 터였다.
그러나 과도한 욕심은 금물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나 디카프리나 과도한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마침 내 능력이라면 정말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는 무사 퇴각이 가능했다.
이를 활용하여 한번 기회를 노려 보되, 역부족일 경우 곧바로 퇴각하는 것이 우리 계획이었다.
“판단은 전적으로 경의 몫이라고 생각해야 하네. 난 어차피 여유가 없을 테니.”
더불어 디카프리는 명령권을 사실상 나에게 위임했다.
지금부터 진퇴 판단을 전적으로 나에게 맡기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디카프리는 이제부터 한눈팔 구석이 없을 예정이었으니까.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운을 빌겠습니다, 각하.”
“경도 마찬가지일세. 마침 저기 마이웨더 후작이 보이는군.”
그가 적의 소드마스터를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바이젠의 소드마스터 미르겔 마이웨더 후작 말이다.
우리의 돌격도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참이었다.
바이젠 왕세자를 비롯한 적 지휘부와의 정면충돌 일보 직전이었다.
자연스레 검을 빼 든 채 충돌을 준비하는 미르겔 마이웨더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럼 경만 믿고 가지. 뒤를 부탁하네.”
파앗!!
그렇게 디카프리가 먼저 튀어나가며 대열을 이탈했다.
적진 한복판에 들어선 상황이었다.
더구나 함정까지 깔려 있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돌격이 중단되는 일만큼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적의 소드마스터를 치울 필요가 있었다.
그가 돌격의 가장 큰 장애물이니 말이다.
해서 디카프리가 선제적으로 나선 것이다.
차캉~! 콰앙~!
그리하여 두 소드마스터의 대결이 시작됐다.
디카프리와 미르겔은 이미 몇 차례 대결을 펼친 바가 있었다.
그때마다 뚜렷한 승부는 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면 이번에도 짧게 끝나지는 않을 터.
이렇게 거대한 장애물 하나를 옆으로 살짝 밀어 둔 채 우리는 돌진을 계속했다.
“막아라!”
“놈들이 저하를 노린다!”
“저하를 보호하라!”
당연히 바이젠이라고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다.
바이젠의 기사들이 우리의 돌진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구구구구~
“크읍!”
“무슨……!”
단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에 짓눌린 것이다.
물론 일반 병사들보다야 좀 낫지만, 중요한 순간 움직임에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크아악!”
“뚜, 뚫린다!”
“안 돼! 막아! 커헉!!”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기사들이 세운 벽을 송곳처럼 뚫어 가며, 최종 목표인 왕세자를 향해.
그때였다.
우우우웅~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이 난리의 와중에도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파동이었다.
파동의 근원이 누구일지는 추론조차 필요 없었다.
답은 하나로 고정돼 있었으니까.
우리를 괴롭혀 온 6서클 대마법사, 그자 하나뿐이었다.
드디어 악몽의 원흉과 근거리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계속 나아가십시오. 마법만 처리하고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하여 나도 잠시 대열에서 이탈하고자 했다.
마법사의 캐스팅을 막기 위함이었다.
모이는 마나 양으로 봤을 때 위력이 상당한 마법일 것으로 판단됐다.
변수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면 사전에 차단하는 편이 바람직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원거리라는 조건이 충족돼야 했다.
물론 6서클쯤 되면 각자만의 근거리 대처법이 있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검사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원거리가 필수조건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와 마법사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마법사가 왕세자와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진 경로에서 살짝 우측으로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눈 깜박할 사이에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렇기에 가서 금세 처리하고 올 작정이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캐스팅만 취소시킬 생각이기에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또, 내 뒤에는 디카프리의 부관인 스콧 보리스 남작은 물론이고 다이너 녀석도 있었다.
한 호흡 정도의 시간은 믿고 맡겨도 문제없는 것이다.
정령력도 대열을 위해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었고 말이다.
파앗!!!
하여 망설임 없이 바닥을 박차고 나섰다.
그러고는 곧바로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실었다.
어차피 발돋움 한 번이면 닿을 거리였다.
휘두르기만 하면 마법사에게 닿는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슈아악~
그렇게 검을 휘둘렀다.
‘음?’
다만, 마법사를 향한 휘두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상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6서클 마법사에서.
지잉!
갑자기 끼어든 소드마스터로.
그리고 이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로.
콰카캉!!
내 검격이 막혔음은 두말할 필요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끼리의 충돌인 데다 나로서는 사실상 기습을 당한 셈이었으니까.
“…….”
한데, 이는 단순히 막혔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두 가지 사실이 파생됐다.
구우우웅~
하나는 내가 결국 마법사에게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는 점.
이로 인해 캐스팅은 이어졌으며, 마법이 완성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즉, 변수가 개입하며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당신…….”
그리고 나머지 하나.
그것은 내가 이 소드마스터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얼굴을 가린 투구 바이저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이미 익숙한 자였기 때문이다.
상대 역시 내가 익숙했고 말이다.
“잘 지냈나, 라이오넬 라인하트?”
“브루노 다스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