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장: 이베리아 평원 대결전
“그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군들은 끝끝내 그 고난과 역경을 견뎌 낸 역전의 용사들이다. 본 사령관은 그런 제군들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이베리아 영주성 성문 앞.
이곳에 지금 3,000여 슈라우드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이 3,000은 그냥 3,000이 아니었다.
지난 일주일간 살상의 불꽃과 번개가 난무하던 전장.
그 지옥과도 같던 전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그런 3,000이었다.
그리고 이런 역전의 용사들을 앞에 둔 채 연설을 펼쳐 가는 디카프리였다.
“나아가 본 사령관이 약속한다. 제군들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은 오늘부로 막을 내릴 것이다. 왜? 오늘, 바로 지금, 이 역전의 용사들이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저 잔악무도한 바이젠 놈들을 향해.”
디카프리는 결국 진격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결정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을 터였다.
이번 전쟁의 특수성과 이에 따른 정치적 입장, 또 향후 슈라우드의 세력 구도 등등 여러 가지가.
“그리하여 오늘 제군들에게 남겨질 것은 딱 두 가지뿐이다. 승리의 영광, 그리고 승자의 특권. 다시 한번 약속한다. 이것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출진을 앞둔 지금 이 순간,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전쟁이 각자의 입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세력 구도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따위, 하등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이 확신의 공유.
“전투 직전에 아무렇게나 막 갖다 붙이는 허언 따위가 아니다. 본 사령관의 굳건한 믿음이다.
또, 이 믿음을 강요할 생각도 없다. 그저 확신할 뿐이다. 제군들 또한 이미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한데, 디카프리는 이 중요한 한 가지에 대해 어떠한 미사여구도 붙이지 않았다.
병사들을 설득하려 하지도, 그들과 공유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믿는다는 말 한마디가 다였다.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슈라우드의 수호신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그가 지금 바로 우리 옆에 있다는 것 역시도. 그리고 최선두에서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주리라는 것까지 전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상태였으니 말이다.
대신 바통을 넘길 뿐이었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과 확신의 근원에게.
“라이오넬 라인하트 경, 앞으로.”
그리하여 내가 모두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디카프리가 건넨 바통을 이어받았다.
확신의 근원이자 슈라우드의 새로운 수호신으로서.
“사령관 각하와 마찬가지다. 여러 말 하지 않겠다.”
스릉.
다만, 나 또한 중언부언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심연을 뽑아 들었다.
사아아아아~
동시에 어둠으로 병력 전체를 덮어 나갔다.
내 영역 안에 모두를 들인 것이다.
그리고 원래라면 여기서 끝이었다.
내 영역 안에 들어선 이들의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고 안정감을 심어 주는 것.
원래 내 어둠이 해 온 역할은 딱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을 예정이었다.
여기서 멈추는 대신 한 발짝 더 나아갈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어둠을 매개체로 영역 안의 모든 것들을 한 줄기에 엮어 나가기 시작했다.
병사들 개개인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지닌 각자의 생각과 감정들까지도 전부.
나로서도 내디뎌 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나,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본능이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라고.
지금이 미지의 영역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라고 말이다.
쿠우우우웅~!
결국, 내디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엮어 냈다.
공명하여 증폭시킨 뒤 융합했다.
그럼으로써 한 줄기 거대한 어둠을 만들어 냈다.
나라는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쉼 없이 넘실대는, 어쩌면 손에 잡힐 것도 같은 그런 어둠.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은 잡히지 않는 그런 어둠을.
물론 당장은 중요치 않은 부분이었다.
지금 내가 집중할 일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바로 이 거대한 줄기가 오롯이 나만을 향하도록 만드는 일 말이다.
“내 등만 보고 따라오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목표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오늘, 바이젠을 쳐부순다.”
* * *
“후! 후! 후! 후!”
십인장 주드가 쉼 없이 어떤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복부에서부터 시작해 목과 입을 타고 올라와 터져 나오는 짧고 굵은 소리였다.
쉴 새 없이 발을 놀리며 진군하는 와중에 새어 나오는 거친 호흡?
아니었다.
이것은 호흡이되 호흡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안에서부터 끓어올라 저절로 터져 나오는 어떤 것.
굳이 정의하자면 함성의 압축본 혹은 축약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후! 후! 후! 후!”
비단 주드만의 것도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진군 중인 슈라우드 3,000여 병력.
이들 모두에게서 일정한 리듬을 타고 동시에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슈라우드 군 전체가 하나의 악기가 되어 만들어 내는 장엄한 음률인 것이다.
더욱이 장엄함은 기본 베이스에 불과했다.
장엄함을 기반으로 그 위에 갖가지 화음이 얹어진 상태였다.
용기, 희망, 환희, 기쁨 등등 긍정적인 의미로 가득 찬 그런 화음들.
동시에 사기를 하늘 끝까지 솟아오르게 만들어 주는 그런 화음들이기도 했다.
콰아아아아!
파지지지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난 일주일이 슈라우드 군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악몽의 근원이 무언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대량 살상 마법.
불덩이와 뇌전으로 이루어진 죽음의 사신들이야말로 원흉임이 명백했다.
쿠과과과광!!!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았다.
불덩이와 뇌전은 더 이상 병사들에게 공포와 무력감을 심어 주지 못했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기 때문이다.
공포와 무력감 따위는 채 꺼내 들어 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당연히 이것이 자의일 리는 만무했다.
사신들은 여전히 그 치명적인 혀를 날름거리고자 했다.
단지, 제대로 날름거려 보기도 전에 허무하게 소멸당했을 뿐.
어떤 등판 덕분이었다.
슈라우드 진형의 최선두에 선 어떤 등판.
사신들은 결코 이 등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앞에 도달하는 족족 꼬랑지를 말고는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러고는 고개 한번 들어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소멸당했다.
지난 일주일간의 악몽이 허탈하게 느껴질 만큼 허무하게.
악몽의 근원조차 저 한없이 넓은 등판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후!! 후!! 후!! 후!!”
그래서였다.
터져 나오는 음률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최선두에 선 저 등판이 그렇게 만들었다.
심지어 여기서 그치지도 않았다.
등판은 그 추종자들 앞에서 또 다른 이적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슉~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바이젠에서 쏘아 올려져 슈라우드 위로 떨어져 내리는 그런 장대비였다.
그렇다면 우산을 펼쳐야 했다.
비에 맞지 않으려면 우산을 펼치는 것이 당연했다.
더구나 이는 대충 맞고 아무렇게나 흘려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구성 때문이었다.
이 비는 물로 구성된 평범한 빗방울에 해당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쇠 촉과 길게 뻗은 나무 대, 유려한 깃털 날개로 이루어진 빗방울이었다.
화살이라는 이름의 치명적인 빗방울.
살짝 스치기라도 했다가는 치명상을 유발하는 사신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
한데, 우산은 펼쳐지지 않았다.
지니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똘똘 뭉쳐 있는 병력 전체를 가릴 만큼은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화살이라는 빗방울에 특화된 우산을 말이다.
방패는 결코 허울뿐인 장식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누구 하나 머리 위로 들어 올리지 않은 것이다.
단순한 무대응만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는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적 덕분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선이었다.
등판을 기준점으로 하여 그어진 보이지 않는 하나의 선.
투두두두두두둑.
화살의 장대비는 결코 이 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 선 앞에서 모두 힘없이 고꾸라졌다.
단 하나의 예외도 존재하지 않았다.
앞선 사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허무하게 바닥에 처박힐 뿐이었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방패를 들어 올리기는커녕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것은.
주드만이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이적을 만들어 낸 하나의 등판.
슈라우드의 새로운 수호신이 지닌 넓디넓은 등판에 말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의 저 등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그 뒤를 따르고 있노라면 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벅차오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해서 참지 않고 뱉어 냈다.
차올라 터질 것만 같은 이 벅참을 있는 그대로.
“후!!! 후!!! 후!!! 후!!!”
이제는 완연한 함성이라고 봐도 좋았다.
극도로 압축된, 그렇기에 더할 나위 없이 웅장하고 강렬한 함성.
이런 것이 3,000여 병력의 입에서 일제히 터져 나왔다.
덕분에 치솟아 오른 사기는 이제 끝에 다다르다 못해 아예 하늘을 찢어발기기라도 할 기세였다.
“카오오오오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강렬한 사기에 자극될 대로 자극된 하늘이 내놓는 반응이었다.
동시에 이는 화음이기도 했다.
하늘까지 흔들어 놓은 슈라우드의 장엄한 음률.
이 음률에 탄복한 나머지 하늘마저 참지 못하고 그 위에 얹은 화음 말이다.
우우우우웅~!
그렇게 하늘과 땅이 공명했다.
공명하여 하나의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끝없는 고양감으로 가득 채워진 지극히 장대한 울림.
이것이 슈라우드 전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목표는 정면의 고양이 깃발!”
“오우!”
바로 지금이었다.
최고조에 다다른 지금, 바이젠의 코앞까지 도달한 이 시점에 선명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 거대하고도 장엄한 울림이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단 하나의 외침이었다.
“전군! 일점 돌파!!”
“오우! 오우!!”
“고양이를 찢어 버린다!!!”
“오우! 오우!! 오우!!!”
3,000은 일제히 화답했다.
그리하여 하나의 송곳으로 화했다.
하나의 송곳이 되어 거침없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바이젠의 진영 한가운데를, 장대한 울림과 함께.
드디어 막을 올린 것이다.
나와 레나, 그리고 슈라우드의 명운을 건 일전이.
나아가 대륙의 판도를 뒤틀 이베리아 평원 대결전의 막이.
* * *
하나로 뭉친 3,000여 슈라우드 군은 거침이 없었다.
마치 그 앞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바이젠 진영을 찢어 나갔다.
반면, 바이젠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바이젠이 가하는 그 어떠한 반격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할 수조차 없었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두 가지 원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기이하리만치 높은 슈라우드의 사기.
사기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나아가 이 사기가 슈라우드의 3,000여 병력을 완벽하게 하나로 묶어 놓았다.
이들은 현재 하나의 완성체였다.
단단하고도 날카로운 하나의 쐐기가 되어 바이젠을 무참히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일말의 틈조차 찾을 수 없었다.
틈이 없으니 어설픈 반격 따위가 파고들 공간 또한 없는 것이고 말이다.
나머지 하나는 기이한 힘이었다.
슈라우드 군 전체를 감싼 어떤 불가사의한 힘.
이것이 바이젠의 어떠한 반격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검과 창은 물론이요, 활과 마법까지 무용지물이었다.
슈라우드 진영에 다가가기만 하면 죄다 고꾸라지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반격이든 속절없이 바닥에 처박히기만 할 뿐이니 답이 없었다.
그저 슈라우드의 공격에 얌전히 몸을 내주고 길을 터 주는 것 말고는.
그렇게 슈라우드는 바이젠의 정중앙, 가장 깊숙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사실상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눈부신 속도를 자랑하며.
“저게 무슨…….”
그러자 바이젠 측에서도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바이젠의 정중앙, 샤벨타이거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이었다.
즉, 이는 바이젠 군 최고 지휘부에서 흘러나온 신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자연히 그 주인공 역시 평범치 않았다.
평범할 수가 없었다.
신음의 당사자가 바로 최고 사령관이었으니까.
바이젠의 왕세자이자, 거침없이 진격 중인 슈라우드의 제1 목표, 미르카디안 아조네스 바이젠 말이다.
“이거 괜찮은 것이오, 카이탄 백작? 계획에는 차질 없는 것이겠지?”
왕세자가 물었다.
염려를 한가득 품은 채였다.
슈라우드의 힘이 예상한 바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이에 스루지아넨 카이탄 또한 곧바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진중한 눈빛과 함께 한 차례 턱을 쓰다듬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