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장: 나갈까 말까
저벅저벅.
오늘의 전투가 끝났다.
슈라우드는 오늘도 이베리아 성을 지켜 냈다.
그리고 나는 전투가 끝난 뒤의 어둑어둑한 성벽 위를 걷고 있었다.
그런 내 옆에는 카오가 함께였다.
부리를 들이밀며 한 번씩 애교를 부리는 녀석과 함께 지휘부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한데, 이런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비단 카오만은 아니었다.
“라이오넬 경!”
“감사합니다, 라이오넬 경. 정말 감사합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라이오넬 경~”
“이거라도 잠깐 걸치시는 게 …….”
슈라우드 병사들의 반김도 함께였다.
나를 보는 병사들 모두 적극적으로 반가움을 표해왔다.
개중에는 직접적인 감사를 전하는 이도, 감사뿐 아니라 제 옷을 건네주려는 이도 있었다.
내가 막아 낸 적의 대량 살상 마법, 그리고 이 과정에서 추레해진 외양 때문이었다.
조금 전 적의 마지막 마법 공격을 막아 낸 참이었다.
이로 인해 내 꼴은 지금 말이 아닌 상태였다.
내상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온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붕 떴고, 의복은 여기저기 타 버려 엉망이 됐다.
이런 모습에 병사들이 한층 더 감성적인 반응을 내비치는 것이다.
나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음…….’
단, 이 상황을 긍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긍정적이기는커녕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하게.
이 신뢰를 얻게 된 과정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 자체가 발생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초거대 화염구의 등장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간 우리 측 사상자는 2,000명이 넘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전체 병력의 2/5가 전투 불능이 된 것이다.
피해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슬아슬하기는 했어도 화염구 자체는 잘 막아 냈다.
마지막 순간에 등장한 카오 덕분이었다.
카오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한 것은 물론이요, 정령력에 소드마스터로서의 힘까지 보탤 수 있었다.
그리하여 끝내 화염구를 파괴하는 데에 성공했다.
성벽 바로 앞에서 이를 산산조각 내 버린 것이다.
나아가 그 파편들까지 중력으로 확실하게 찍어 누름으로써 2차 피해 역시 최소화했다.
그러나 진짜 피해는 이다음부터였다.
화염구는 대규모 살상보다는 대규모 파괴에 좀 더 어울리는 마법이었다.
한데, 이런 화염구가 먹히지 않자 곧바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아예 대규모 살상에 특화된 쪽으로.
뇌전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려 6서클 급 뇌전이.
확실히 화염구와는 달랐다.
성벽 자체를 파괴해 버리려던 화염구와 달리, 뇌전은 성벽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 학살에 집중했고, 그만큼 효과는 분명했다.
물론 내가 열심히 막으러 다니기는 했다.
하지만 화염구 때처럼 완벽하게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속도가 문제였다.
뇌전의 속도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언제나 현장 도달이 다소 늦을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적잖은 피해가 뒤따랐다.
한번 발사 때마다 50~100명가량씩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마저도 굉장한 선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약간씩 늦기는 해도 내가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터.
전쟁은 지금까지 이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대규모 전쟁에 있어 마법사가 검사보다 높이 평가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가능했던 데에는 카오의 활약이 지대했다.
카오 덕분에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전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사들로 가득 찬 성벽 위를 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다만, 카오도 온전한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어린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카오는 아직 새끼였다.
기껏해야 몸집이 성인 남성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제 몸집만 한 크기의 나를 들어서 옮기는 녀석이었다.
이는 순전히 그리핀이기에 가능한 기적이라고 봐야 했다.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카오가 지금 내 옆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녀석도 지칠 대로 지쳐 버린 것이다.
“왔는가?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네.”
그렇게 카오, 그리고 병사들의 환대와 함께 걸음을 옮긴 끝에 지휘부에 도달했다.
이곳에서도 들어서자마자 사령관 디카프리의 환대를 받았다.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디카프리의 부관인 스콧 보리스 남작을 비롯하여 간부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를 향하는 그들의 눈에는 호의만이 가득했다.
모두가 아는 것이다.
지금 이 전선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를.
“앉게. 지금 전황에 대해 논의 중이었네.”
그러나 나를 향한 호의와 전체적인 분위기는 별개였다.
지휘부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황이 매우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중이었으니까.
전쟁 시작 직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런 방향으로 말이다.
“계속하도록, 스콧. 사상자가 얼마나 된다고 했지?”
“오늘까지 사망자 1,912면에 부상자 179명입니다. 다 해서 2,091명입니다.”
“전투 가능 병력이 채 3,000명이 안 되는군. 바이젠은?”
“사상자가 최소 4,500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전체의 절반가량입니다.”
양측 사상자의 숫자만 놓고 보면 나쁠 건 없어 보였다.
바이젠 측 사상자가 2배 이상 많았으니까.
하지만 재차 입을 여는 스콧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진 상태였다.
“문제는 흐름입니다. 병사들이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사릴 수밖에.”
실제 전장의 흐름은 숫자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젠 군은 마치 악귀라도 든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반면, 슈라우드 군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중이었다.
사상자 숫자 면에서 분명 바이젠에 앞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이런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추세였다.
“이 정도로 막무가내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자국 정예병들을 이렇게 사지로 내몰다니…….”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 여긴 것이겠지. 문제는 놈들의 이 미친 짓이 지금 당장 어마어마한 효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고.”
바이젠의 전략 때문이었다.
디카프리의 말마따나 미친 짓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그런 무지막지한 전략.
단순히 강력한 마법만 뿌려 대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놈들은 그 전에 먼저 환경을 조성했다.
마법이 최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간단했다.
바이젠은 자국 병력에 미친 듯한 돌격을 강요했다.
자칫 밀리기라도 했다가는 등 뒤에서 마법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 줌으로써.
아니, 날아올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날아왔다.
실제로 밀리는 지역에 마법을 뿌리는 것이다.
적아 구별 없는 대량 살상 마법을, 밀리기는 해도 아직 자국 병력이 남아 있는 지역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이런 미친 짓이 바이젠 병사들에게는 독전관 노릇을 톡톡히 했다.
병사들이 광전사처럼 앞으로만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반면, 슈라우드에는 최악의 악재로 작용했다.
바이젠 군을 너무 심하게 밀어붙였다가는 대량 살상 마법이 날아온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지만, 내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피해는 누구도 막아 주지 못했다.
정예병이고 뭐고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렇듯 소극적인 태도는 전황을 악화시켰고, 악화된 전황은 한층 더 소극적인 태도를 유발했다.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일단 이 효과를 어떻게든 끊어 내야만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저 마법부터 어찌해야 할 터인데…….”
“역시 현재로서는 마땅한 방안이 없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각하. 죄송합니다.”
활약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디카프리 또한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성벽 위를 누비는 중이었다.
그만큼 전황이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고 말이다.
“마법사는? 정체 파악이라도 가능하겠나?”
“……주어진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정보를 수집 중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적잖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바이젠의 꿍꿍이속이 무언지는 인지한 상태였다.
이렇게 당했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6서클 마법사.
슈라우드의 새로운 소드마스터에 대마법사로 대응코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까지 제대로 먹혀들었다.
단순한 대응을 넘어 전황 자체가 바이젠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더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꿍꿍이속에 대해 인지는 했지만, 그 깊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마법사의 이름이 무엇이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혹은 정말 바이젠 출신이 맞는지까지, 무엇 하나 밝혀진 바가 없었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바이젠의 추가적인 노림수 유무와 그 파훼 가능성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
이것을 알아야 슈라우드도 망설임 없이 다음 수를 내놓을 터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고, 안타깝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시간이 없다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더는 버티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더 끌다가는 자칫 퇴각조차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양자 간의 선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정보 수집 같은 걸 기다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나아가든가 혹은 퇴각하든가.
“으음…….”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남은 3,000 병력의 목숨뿐 아니라, 지난 30년의 세월이 걸린 결정이기도 했으니까.
나아가 향후 슈라우드의 세력 구도까지도.
쉬울 리 만무했다.
그래서였을까?
중대한 양자택일을 앞둔 마지막 순간, 디카프리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받아 주었고 말이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사령관 디카프리의 입이 열렸다.
* * *
―나오겠나?
“나올 겁니다.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마법 통신구 너머로 전해져 오는 한 가지 질문.
이에 대해 황태자의 심복인 카일 이반은 확답을 건네주었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 때문에 이대로 퇴각하지 못합니다.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배치된 전장입니다. 그런 곳에서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해 보고 패퇴한다? 불가능한 선택이지요.”
퇴각?
이 상태로는 절대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디카프리 델로나 후작과 라이오넬 라인하트 둘 다.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투입된 전쟁이었다.
그런 곳에서 이렇게 속절없는 퇴각은 납득이 불가능했다.
병력 손실은 손실대로 입고, 영지까지 허무하게 내준 채로는 더더욱.
설령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그럴듯한 명분 하나쯤은 마련해 두어야 했다.
따라서 최소한 한번은 정면으로 부딪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 계산상으로도 명분이 부족합니다. 이 전쟁을 결정지을 실력자의 숫자는 결국 2대2로 대등합니다. 그것이 소드마스터 라이오넬이냐 아니면 대마법사이신 백작님이냐의 차이일 뿐.”
질문을 건네 온 이, 즉 현재 카일의 통신 상대는 바로 그 마법사였다.
슈라우드 군을 혼란에 빠뜨린 그 6서클 대마법사 말이다.
스루지아넨 카이탄.
최근 6서클의 경지에 오르며 백작위를 내정 받은 로만 제국 대마법사의 이름이었다.
“더구나 그간 라이오넬이 펼친 활약도 있으니, 근접전에만 들어가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길 겁니다. 이런데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이오넬은 지난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스루지아넨의 6서클 대량 살상 마법을 홀로 막아 낸 것이다.
비록 피해가 없지는 않으나, 이 정도면 막아 냈다는 표현을 쓰기에 무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라이오넬의 활약은 야전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 분명했다.
돌격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병력은 뭉쳐 있을 터.
하면 라이오넬 혼자 완벽한 커버가 가능해졌다.
그간 범위 때문에 곤란을 겪어 왔을 뿐, 마법 자체의 위력은 그에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못했다.
“하니 상황 조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계획대로 라이오넬 라인하트를 사로잡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따라서 결론은 한 가지였다.
슈라우드 군은 돌격해 올 것이다.
그리하여 바이젠 군과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다.
하면 이 과정에서 스루지아넨이 신경 쓸 일 역시 한 가지뿐이었다.
라이오넬을 사로잡는 것.
그런 뒤 제국으로 끌고 와 황태자 앞에 무릎 꿇리는 것.
그것이 이 판을 짠 황태자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였다.
“다만 한 가지, 황태자 전하께서 꼭 전하라고 하신 당부의 말씀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뭔가, 그게?
“라이오넬 라인하트가 발휘하는 불가사의한 힘. 정령력인지 뭔지 모를 그 힘만큼은 반드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계획에 변수가 있다면 역시 그것뿐이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