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82화 (83/200)

45장: 이적

이베리아 영주성 앞 드넓은 평야에 펼쳐진 바이젠 군 1만의 진영.

이 진영의 정중앙에 위치한 최고 지휘관의 막사.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한창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중이었다.

“저하, 마지막으로 요청드립니다. 작전을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 주제가 군의 작전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이미 다 끝난 얘기입니다, 후작. 그만하시지요.”

화자들의 면면은 한층 더했다.

읍소하듯 재고를 요청하는 이는 전 총사령관이자 현 부사령관인 미르겔 마이웨더 후작.

그리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는 현 총사령관이자 왕국의 왕세자인 미르카디안 아조네스 바이젠이었다.

“하지만, 저하. 왕국 전체의 사기를 깎아 먹을 가능성이 농후한 작전입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불가피합니다, 후작. 그것이 전쟁이에요. 후작께서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저라고 그걸 모르겠습니까? 만약 이곳에 있는 병사들이 그저 그런 징집병들뿐이었다면 저도 이해했을 겁니다. 한데, 아니지 않습니까?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정규군이 절반입니다.”

이것은 왕국 간 전쟁이었다.

그것도 30년이나 이어져 온 기나긴 전쟁.

후작가 하나가 주변 영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일개 귀족 가문 차원에서 감당 가능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바이젠 군 1만 중 징집병이 아닌 왕국 정규군의 수는 무려 5천에 달했다.

비단 바이젠뿐만이 아니었다.

슈라우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라우드의 경우 현재 5천 병력 중 3천 이상이 왕국 정규군이었다.

그만큼 강력한 동시에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을 희생시키면 왕국의 미래에 좋을 것이 없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손해만이 아니라 왕국에 대한 충성심 차원에서도.”

굳이 설명조차 필요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일국의 왕세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모를 리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왕세자는 단호했다.

“아까부터 자꾸 미래, 미래 하는데, 지금 우리가 미래를 따질 수 있는 처지이기는 한 겁니까? 당장 왕국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해진 이 판국에?”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부터 극복하고 봐야 한다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마냥 잘못됐다고만 볼 수도 없었다.

“아니면 후작께 슈라우드의 신임 소드마스터를 막아 낼 복안이라도 따로 있는 겁니까? 대륙 최연소다, 그랜드 소드마스터 감이다 뭐다, 아주 시끄러워 죽겠는 그 빌어먹을 놈을?”

“…….”

바이젠은 현재 2명의 소드마스터를 보유한 상태였다.

반년 전까지의 슈라우드와 같은 숫자이며, 이를 기반으로 양국 간 균형이 팽팽하게 유지돼 왔다.

그런데 갑자기 라이오넬 라인하트가 부상했다.

그가 소드마스터에 오르며 균형추를 슈라우드 쪽으로 대폭 기울여 버린 것이다.

당장 바이젠에는 이 균형추를 되돌릴 힘이 부재했다.

라이오넬을 막을 수단이 마땅치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미래를 보고 와신상담할 수 있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당장 슈라우드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결코 밝지 못했다.

고작 19살의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오른 라이오넬이었다.

언젠가는 그랜드 소드마스터에도 오르지 말란 법이 없었다.

당장 대륙에서 가장 높은 확률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벌어질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보세요,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당장 이베리아 영지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슈라우드 놈들이 고작 이베리아에서 멈출 리 있겠습니까? 칼끝을 겨누고 휘둘러 온 세월이 대체 얼만데.”

“……방법은 저와 참모들이 어떻게든 내 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작전을 미루고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대안이라 할만한 것은 딱히 나오지 않았고 말이지요.”

“하나…….”

“그만하세요, 후작. 이미 국왕 전하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제국과의 논의까지 전부 끝마친 사안입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무를 수도 없어요.”

바이젠 내부에는 라이오넬을 막을 힘이 모자랐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도 없는 노릇.

해서 외부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곧바로 괜찮은 대안이 하나 눈에 띄었다.

바로 로만 제국.

제국에게는 바이젠의 모자람을 채워 줄 능력이 차고 넘쳤다.

그리하여 결국 제국이라는 대안을 선택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위기, 우리 바이젠에게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작전대로 여기서 슈라우드의 소드마스터 두 놈을 한꺼번에 처리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또, 우리라고 이베리아 이상을 노리지 말란 법은 없지요.”

이 점이 왕세자에게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동시에 왕국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도 함께.

“그리되면 약간의 희생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겁니다. 하니,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제 말에 따라 주세요, 후작.”

* * *

이베리아 영주 성의 성벽은 기본적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바이젠 병력이 성벽 위까지 도달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연출되곤 했다.

개중에는 병사처럼 가벼운 무장 상태로 오르는 기사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다시 개중에는 수준 높은 기사 역시 존재했다.

이런 기사들이 성벽 위를 휘젓기 시작하면 수성에 애로사항이 꽃 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지금 막 눈앞에서 펼쳐지려 하는 광경이 딱 그런 장면에 해당했다.

스아악~

“흐엑!!”

농성 중이던 슈라우드의 병사 하나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무방비 상태인 그의 목을 향해 시퍼런 검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검에는 오러까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병사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검인 것이다.

슈각!

이윽고 검에 베이는 소리와 함께, 육신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한 생명이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사, 살았다…….”

단, 그것이 당혹을 금치 못했던 슈라우드 병사의 생명은 아니었다.

병사의 목은 여전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대신 스러진 것은 검을 내리치던 바이젠 기사의 생명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결과가 병사의 힘으로 도출됐을 리는 만무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감사 인사는 끝까지 살아남은 뒤에 하고, 지금은 일단 저기 올라오는 놈부터 떨구도록.”

“예!!!”

내가 개입한 결과였다.

병사의 위기를 목격하고는 끼어들어 역으로 기사의 목을 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내가 맡은 역할이기도 했다.

성벽 위로 올라와 날뛰는 바이젠 측 실력자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것.

방금 병사의 목숨을 구한 것 역시 그 일환이었다.

단, 누가 부탁해서 억지로 하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자청해서 맡은 역할일 뿐.

그렇지 않으면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디카프리와 나눈 대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내게 협조를 구한 바는 정말 간단했다.

무슨 비밀 임무 따위를 맡기는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나서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다였다.

바이젠에 꿍꿍이속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게 정확히 무언지는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나를 일단 아껴 두고 싶다는 것이 사령관으로서의 의중이었다.

적어도 바이젠의 한 수가 무엇인지 밝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딱히 문제 될 만한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내 입장을 고려한다면 이야기는 그리 단순치가 않았다.

나는 공적을 쌓기 위해 이곳에 왔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내 경우는 한층 더 특별했다.

잘못을 상쇄하는 공을 세우겠다고, 그 이상을 왕국에 안기겠다 선언하고 온 참이었다.

물론 이번 전쟁에 한정한 선언은 아니었지만,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눈에 띄는 공적이 긴요한 입장인 것이다.

이런 나를 당분간 나서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일개 기사도 아니고 무려 소드마스터를 통제해야 하는 상황.

아무리 사령관이라 해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디카프리에게 갚아야 할 빚도 있거니와, 적진에 바이젠 왕세자까지 자리 잡은 마당이었다.

어떤 수작이 됐든 무언가 강력한 한 방을 준비했을 터.

공적 쌓기는 그 한 방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갈음할 작정이었다.

그 정도면 넘칠 만큼은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지나친 개인적 욕심에 경도될 생각은 없었다.

해서 지금은 이렇듯 눈에 띄지 않게 성벽 위를 조용히 누비는 중이었다.

“후우, 처리했습니다.”

“좀 늦었는데?”

“……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겁니다만? 전 공자님과 달리 한 명 한 명 상대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요.”

나 혼자 누비지는 않았다.

다이너 녀석도 함께였다.

어차피 우리는 남부군에 꼽사리 낀 입장.

내가 나서서 병력을 이끌지 않는 이상, 다이너의 위치 역시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 다이너도 나와 함께 다니며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그리고 다이너에게는 이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실력을 끌어 올리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환경은 존재할 수 없었다.

한치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 살벌한 실전이 쉼 없이 펼쳐졌다.

심지어 그 상대는 전부 소드 익스퍼트 급의 실력자들.

한 명 한 명 상대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은 괜한 투정이 아니었다.

덕분에 실력이 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공자님,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무 무모하다는 거지?”

“예, 이상하리만치 무모해요. 적이 알아서 들이박아 주니 우리야 편하긴 해도, 이런 방식은 전술상 말이 되지 않는데…….”

다이너의 읊조림대로였다.

지금 바이젠은 납득이 어려운 공성 방식을 펼치고 있었다.

바로 정공법.

성벽을 향해 단순히 병력을 쏟아붓는 가장 일반적인 공성 방법 말이다.

이렇다 할 묘수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맨땅에 헤딩만을 해 올 뿐.

물론 방식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정공법이라는 이름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이 방식이 활용되는 조건과 상황에 있었다.

공성에 있어 정공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수비 측보다 병력이 최소 3배는 많아야 했다.

그런데 바이젠의 병력은 고작 1만.

슈라우드의 2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앞서는 것도 아니었다.

1만에서 절반 가까이가 징집병이었다.

이들로 양적인 부족함을 메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더구나 현재 이베리아 영주성에는 소드마스터인 내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답도 없어지리라는 점을 바이젠이 모를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무모하리만치 정공법을 펼쳐 가는 중인 것이다.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수를 준비한 건지 몰라도, 너무…….”

“잠깐만.”

그때였다.

내 기감에 이질적인 것이 걸려들었다.

“왜 그러세요?”

“이건……?”

힘이었다.

마나가 한데 뭉치며 발산하는 힘.

일반적으로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할 때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힘이기도 했다.

즉, 지금 어떤 마법이 캐스팅 중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마법 시전 자체로 특별할 것은 없었다.

여기는 전쟁터 한복판.

마법사들의 마법이 불을 뿜는 것쯤은 흔하디흔한 광경인 것이다.

그런데 이건 그렇지가 않았다.

심각하리만치 특별했다.

그 힘이 너무나도 막대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내 기감이 이 힘을 이질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한 마디로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기감 이외의 방식으로도 입증되었다.

“어어???”

다이너 또한 힘을 느꼈다.

그러고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그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비단 다이너뿐만이 아니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느끼는 중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는 중이기도 했다.

힘의 진원지, 바이젠 진영의 정중앙에 현현한 압도적인 이적에.

“아…….”

비현실적이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10미터쯤은 가뿐히 넘기는 불덩이라면, 마치 태양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화염구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다면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일 터.

“저, 저게 뭐야???”

“맙소사……!”

“말도 안 돼…….”

이제는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이들만도 아니게 됐다.

전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됐다.

보지 않으려 해도 도저히 보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저거 설마……?”

“아니지? 아니겠지?”

그리고 이와 함께였다.

이렇듯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에 담음과 동시에 모두가 한 가지 예감을 공유하게 됐다.

너무나도 끔찍한, 그래서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런 참혹한 예감을.

“미, 미친!!!!”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끔찍한 예감은 늘 현실이 되곤 했다.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온다! 이쪽으로 온다고!!!”

현현을 마친 초거대 화염구.

그것이 움직임을 시작했다.

도저히 막지 못할 것만 같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한껏 응축한 채로.

슈라우드와 바이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한데 뒤엉켜 있는 성벽을 향해서.

파앗!!

그리고 그래서였다.

나 또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은.

“고, 공자님……!”

기겁한 다이너의 부름을 등 뒤에 남겨 둔 채로.

불덩이가 쏘아져 오는 성벽의 목표 지점을 향해서.

0